# 31
귀환 마교관
31화
고작 이 푼의 확률.
열 번의 시도에서 한 번에도 속하지 않을 정도로 낮은 확률이다.
그러나 이 낮은 확률과 연이 닿은 자는 인생이 바뀔 만큼 큰 변화를 겪게 된다.
그렇다면 이 이 푼의 확률이란 무엇을 뜻하는가?
바로 마계의 결계가 형성되지 않을 확률이다.
또는 결계가 형성되었지만 완전하지 못한 경우다.
안강의 어느 동혈.
그곳에는 원래 결계가 형성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다소 부족한 음기와 지형적 특성, 자연이 품은 정기 등으로 인해 결계는 미완성이 되고 말았다.
그곳을 제일 처음 발견한 자가 바로 혈수궁 단구기였다.
그렇게 그는 마계에서 넘어온 물건들을 취했다.
이후 ‘폭렬궁’이라는 별호로 불리게 된다.
폭렬궁 단구기.
안강의 사대 문파 중 세 군데를 멸해 버린 자.
그 이후 고향인 안강을 떠나 강호를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당연히 정도맹에서는 그를 추적했다. 하지만 워낙 신출귀몰하여 잡아들이진 못했다.
수년이 흘러 마계의 군대가 나타났을 때는 잠시 뛰어난 활약을 보였지만, 그 역시 죽음을 피할 순 없었다.
그는 왜 안강의 삼대 문파를 멸문시켰을까?
세간에는 의협심이 뛰어나고 공명정대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그는 어떻게 삼대 문파를 하루아침에 지워 버렸을까?
당시에는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수수께끼였다.
물론 사비강은 훗날 두 번째 질문의 답을 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왜 삼대 문파를 섬멸한 것인지는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안강에서 유일하게 건사했던 창천문(蒼天門)의 장문인을 추궁해 보기도 했지만, 역시 답을 알진 못했다.
안강백가.
안강을 대표하는 문파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니 사람들은 백가의 앞에 ‘안강’을 붙여서 부른다.
하지만 안강에서 가장 먼저 그 흔적이 지워진 문파.
정확한 날짜는 몰랐지만, 대략 이때쯤 연쇄 멸문이 시작됐다는 것을 알았다.
때문에 사비강은 오늘 안강백가를 찾아갔다.
그런데 늦어 버린 것이다.
단 하루 차이.
이미 폭렬궁이 안강백가를 세상에서 지워 버린 후였다.
그렇다면 오늘 밤….
‘두 번째 문파가 사라진다.’
사비강은 언덕 위에 마차를 세워 두고는 지붕 위에 올라 마을 전경을 내려다보았다.
문제는 두 번째 사라질 문파가 어디인지 모른다는 것.
안강백가가 가장 먼저 사라졌다는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기억했지만, 그 다음 순서에 대해서는 구전으로 자세히 이어지진 않았던 것이다.
뭐든 첫 인상만이 강하게 기억에 남는 법이기에.
그 때문에 사비강은 오늘 밤 언덕 위에서 노숙을 결정했다.
‘오늘은 반드시 폭렬궁을 잡아야 한다.’
아직 건재한 문파 중 역사에서 곧 지워질 예정인 곳은 두 군데.
금정문(金鉦門)과 승도진가(昇刀眞家).
‘어느 쪽을 먼저 칠 거냐? 폭렬궁.’
사비강이 천천히 일어섰다.
저만치 아래에 금정문과 승도진가가 보였다.
위치는 확실히 눈에 익혀 두었다.
모든 사건은 자정을 지나 발생한다.
아직은 시간이 있다.
‘제길, 그때 내가 직접 봤어야 하는 건데!’
안강백가가 초토화 된 것을 확인한 직후, 단리정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 그 선배님도 안강백가가 이렇게 된 건 모르셨나보구나.”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오는 길에 길을 안내해 준 자에 대해서 얘기했다.
“강호 선배님으로 보였습니다. 커다란 궁을 메고….”
“궁을 멨다고!”
사비강이 단리정의 어깨를 콱 움켜쥐며 소리쳤다.
“예…, 상당히 큰 궁이었는데 왜 그러시는….”
“그자를 어디에서 봤지?”
“마을 어귀로 들어오기 전에 관도에서….”
사비강은 나머지 말을 듣지도 않고 몸을 날렸다.
하지만 그때까지 단구기가 그 자리에 있을 리가 없었다.
결국 그를 찾지 못한 사비강은 다시 돌아와 생도들을 이끌고 이곳 언덕으로 온 것이다.
생도들을 모두 풀어 그를 찾아내도록 할까도 생각했지만 너무 위험했다.
‘뭐, 예정이 조금 틀어졌지만 어쩔 수 없지.’
**
쒜에에엑!
푹! 다르르르.
기를 머금고 날아간 화살이 나무기둥에 깊숙이 박히면서 부르르 떨었다.
단구기는 활을 내려놓고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용천관이라….’
용천관에서 연무기행을 이쪽으로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안강백가를 찾아 하루를 묵을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그럴 수 없게 됐다.
어디 마을의 객잔으로 갈 줄 알았지만, 뜻밖에도 뒷산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객잔에서 방을 구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수련의 일환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예기치 못한 방해물이 생긴 건 분명하다.
하지만 상관없다.
만약 방해가 된다면 녀석들도 한꺼번에 날려 버리면 그만이다.
그리고 이 더러운 곳을 영영 떠 버릴 것이다.
자신에게는 아직도 열일곱 개의 폭렬단(爆裂團)이 있다.
단구기는 손바닥에 올린 붉은 기운의 돌을 가만히 바라보며 웃었다.
**
“젠장, 언제 한 번 본때를 보여줘야 하는데.”
곡보옥이 투덜거렸다.
아직도 사비강에게 맞은 엉덩이가 욱신거리는 것만 같았다.
그 곁을 나란히 걷던 연우경이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서두를 건 없어. 연무기행은 우리에게도 기회니까. 교관을 파멸시켜 버릴 수 있는 기회.”
그의 표정이 어딘지 섬뜩하게 변했다.
사실 처음에는 그저 능력 없는 교관을 골려 먹을 생각으로 시작한 장난이었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장난의 범주를 넘어서서 은원관계처럼 되어 버렸다.
그때였다.
샤아악!
날카로운 파공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생도 한 명이 검집에서 검을 뽑아내길 반복하고 있었다.
연우경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자는…?”
“단리정이야. 왜 있잖아. 이번에 회비를 내지 못해서 잡역꾼으로 함께 가는 녀석.”
“그건 알고 있어.”
연우경이 딱딱하게 대꾸했다.
다만 어떤 검술을 익히기에 저리도 발검이 깔끔하단 말인가?
검집에서 뽑혀 나와 곧장 뭔가를 베어내는 기술이 수준급이다.
그 생각을 읽었는지 곡보옥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봐야 반쪽짜리야.”
“반쪽짜리라니?”
“저 녀석, 중소문파인 일성검문(一星劍門) 문주의 막내인데, 발검만 뛰어나거든. 오로지 발검만.”
그 말은 곧 발검한 이후의 초식을 제대로 구현하지 못한다는 뜻.
아니나 다를까, 발검 이후에 휘두르는 검로는 엉성하기 짝이 없었다.
잠시나마 놀랐던 연우경은 차갑게 조소를 흘리고는 걸음을 돌렸다.
한편, 단리정은 먼발치에서 걸음을 돌리는 연우경 일행을 보고는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자신에게 시비를 걸까 봐 긴장하던 터였기에.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검집에서 검을 뽑아냈다.
샤아악!
깔끔하게 뽑혀 나오는 검.
이 순간의 짜릿한 쾌감은 말할 것도 없다.
떨어지는 낙엽도 이렇게 벤다면 여지없이 성공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뽑은 후에 휘두르면 낙엽을 베지 못한다.
때문에 단리정은 계속해서 발검만 연습했다.
그 순간만큼은 절정고수라도 된 기분이었기에.
“호오. 훈련을 아주 열심히 하는군.”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돌아보니 사비강이 팔짱을 낀 채 지그시 바라보고 있었다.
단리정이 얼른 자세를 바로잡았다.
“아닙니다. 아직 멀었어요.”
“아직 멀긴. 발검이 꽤 훌륭해. 아니, 생도들 중에서는 가장 뛰어나겠다.”
“하지만 그뿐인 걸요. 발검 외에는 영 제대로 되질 않아서.”
“그거야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연습을 해야 하는데 자꾸 발검 연습만 하게 됩니다.”
“아냐. 잘하고 있어.”
“예?”
“하기 싫은 건 하지 마라. 네가 좋아하는 걸 최대한 갈고 닦아라.”
“하지만… 그래서는 실전에서 전혀 쓸모가….”
사비강이 고개를 저으며 다가왔다.
평소에 잘 보지 못한 진지함이었다.
“너는 출공(出功)에 소질이 있다. 그러니 앞으로도 그런 쪽으로 갈고 닦으면 좋을 것이다. 혹시 활을 쏴 본 적은 있냐?”
“아… 아뇨. 저희 문파는 검술로….”
“그딴 건 상관없어. 네 적성이 중요한 거지. 내일부터는 활을 쏴 봐라. 한 순간의 집중을 요하는 발검과 활을 쏘는 것에는 상통하는 부분이 많을 거다. 어쩌면 네게 검보다 더 잘 어울릴 지도 모르지.”
어쩌면이 아니지.
‘넌 무조건 활을 잡아야 해.’
지금 사비강이 강요하지 않아도 미래의 그는 결국 활을 잡는다.
나중에서야 자신의 특기를 깨달은 것.
만약 그가 진작 활을 잡았더라면 훨씬 뛰어난 고수가 될 수도 있었으리라.
“하지만 아버지께서 반대하실….”
“뭐, 그럼 하지 말든지.”
“네?”
“네가 아버지 인생을 대신 사는 것으로 효를 다하겠다면 나도 어쩔 수 없잖아? 하지만 네 인생을 살겠다면 생각해 보란 말이다.”
말을 마친 사비강이 미련 없이 몸을 돌리고는 걸어가 버렸다.
‘활이라….’
물론, 궁법 수업을 들을 때 활을 만진 적은 있다.
하지만 진지하게 접근해 본 적은 없다.
‘확실히… 싫진 않았었지. 그 감각.’
돌연 가슴이 두근거렸다.
같은 것도 다른 마음가짐으로 대하면 완전히 새로운 것처럼 느껴지는 법.
지금 단리정이 그랬다.
단리정이 얼른 소리쳤다.
“교관님!”
“뭐냐?”
“혹시 제가 활을 사용하면… 저도… 저도 고수가 될 수 있을까요?”
“그야 네놈이 하기에 달렸지.”
“아… 역시 그렇겠죠? 하하….”
“그러나 노력 여하에 따라 초절정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리란 법도 없지.”
초절정을 넘어선다니!
이건 단순히 의욕을 북돋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다.
그만큼의 가능성을 얘기해 주는 것이다.
웬만한 무인들은 아무리 노력해도 초절정의 수준에 도달할 수 없기에.
때문에 ‘너는 열심히 하면 절정고수가 될 수도 있다.’라는 말은 기재에게나 하는 말이다.
가슴이 부풀어 올랐다.
그게 거짓이든 아니든.
그 가능성을 품은 말이 단리정의 가슴을 뛰게 했다.
“감사합니다, 교관님!”
단리정이 멀어져 가는 사비강의 뒤통수에 대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
어둑한 밤.
자정이 다가오고 있었다.
사비강은 마차 위에 앉아 하릴없이 마을 전경을 바라보았다.
물론 그 중에서도 두 곳을 유심히 보았다.
금정문과 승도진가.
‘어느 쪽이냐? 폭렬궁!’
눈을 가늘게 뜨고 바라보는데, 마침 옥구슬이 구르듯 맑은 목소리가 들렸다.
“교관님? 뭐하시나요?”
“아, 매 소저. 잠시 바람을 좀 쐬고 있었소.”
“저도 오늘은 왠지 잠이 오지 않네요.”
매설란이 생긋 웃고는 지붕 위로 올라왔다.
그녀가 사비강 곁에 나란히 앉았다.
“어머, 이렇게 아름다운 야경을 보게 될 줄이야.”
“이 야경도 매 소저의 아름다움에 비할 바는 아닐 거요.”
사비강의 말에 매설란이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웃었다.
하지만 내심은 은근히 조바심이 났다.
‘뭐해? 그럼 어서 덮치지 않고?’
원래 오늘밤이면 사비강이 물불가리지 않고 자신에게 뛰어들었어야 한다.
안강백가에서 숙박하려던 계획이 조금 틀어졌기 때문일까?
사비강은 좀처럼 그녀에게 접근해 오지 않았다.
“혹시 안강백가가 걱정되시나요?”
“이미 죽어 버린 자들을 걱정해서 뭣에 쓰겠소?”
의외로 차가운 대답에 매설란이 갸웃거리다가 곧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저, 오늘 그런 무서운 광경을 봤기 때문일까요? 자꾸만 가슴이 두근거려서 잠이 오지 않아요.”
그녀의 곱디고운 손길이 봉긋 솟아오른 가슴을 꾹 눌렀다.
‘여길 좀 보라고. 이 고자 녀석!’
하지만 사비강은 여전히 시선을 마을 쪽에만 두고 있었다.
‘하!’
도대체 모르겠다.
언제는 굶주린 짐승마냥 달려들 것처럼 굴더니, 이제는 옆에 놓인 돌덩이 취급이 아닌가?
매설란이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좀 더 도발적으로 나섰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좀 편한 차림으로 있어야 할까 봐요.”
그녀가 슬쩍 옷깃을 풀었다.
부드러운 계곡이 더욱 아찔하게 드러났다.
‘이래도 가만히 있을 수 있겠어?’
마침내 사비강이 벌떡 일어났다.
매설란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맺혔다.
‘그럼, 그렇지.’
그런데.
“저기였군!”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내뱉는 사비강.
다음 순간.
꽈아아앙!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지축이 뒤흔들렸다.
마을 쪽에서 환한 불기둥이 솟아오르면서 언덕 위가 대낮처럼 밝아졌다.
어마어마한 화력.
그 후끈한 열기를 여기서도 느낄 정도였다.
깜짝 놀란 매설란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게 도대체 무슨…!”
사비강을 돌아보던 그녀가 멈칫거렸다.
없다.
“이 남자…, 어딜 간 거야?”
황급히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비강의 흔적은 찾을 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