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귀환 마교관
30화
창밖으로 풍경들이 유유히 흘러갔다.
연무기행을 떠난 지 아흐레.
불과 며칠 차이인데, 이제는 봄 내음이 물씬 풍겼다.
매설란이 창문을 닫고는 빙그레 웃었다.
“오늘 저녁쯤이면 안강에 도착하겠어요.”
“그렇겠소.”
사비강도 마주 웃으며 매설란의 잔에 술을 채웠다.
“어머, 이렇게 자꾸 낮술을 주시면 저 취해 버려요.”
“후후. 좀 취하면 어떻소? 어차피 마차를 타고 가니 푹 쉬면 될 것을.”
“하긴, 교관님이 같은 공간에 함께 계시니 너무 든든하네요.”
“그렇소. 나만 믿으시오. 나만.”
사비강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술잔을 들었다.
매설란이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술잔을 들이켰다.
그때.
덜컹.
마차가 흔들리면서 매설란이 균형을 잃고 사비강 쪽으로 쓰러졌다.
“이런, 괜찮소?”
사비강이 얼른 그녀의 몸을 부축했다.
부드러운 감촉.
이 얼마만이던가!
매설란이 나른한 표정을 지으며 사비강 어깨에 슬쩍 기댔다.
“아이참, 죄송해요. 제가 좀 취했나 봐요. 어지러워라.”
“후후. 그 맛에 술을 마시는 것 아니겠소? 무인이라고 취기를 매번 체외로 배출하면 무슨 낙으로 살겠소?”
“이해해 주셔서 고마워요. 사실 가끔은 흐트러지고 싶을 때도 있잖아요.”
“아무렴! 그렇고말고. 나만 믿고 맘껏 흐트러지시오.”
“교관님도 차암.”
매설란이 웃음을 흘리며 몸을 꼬았다.
그 바람에 살짝 벌어진 옷깃 사이로 부드럽고 풍만한 가슴골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거기에 다리를 꼬자 백옥 같은 피부가 허벅지 안쪽까지 드러났다.
사비강의 욕망이 꿈틀거렸다.
‘과연 명불허전이로구나.’
과거, 그는 매설란에 대한 이야기를 귀가 따갑도록 들었다.
‘만고절색’이라는 미녀.
하지만 직접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녀는 마계의 침공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으니까.
그녀의 매혼섭공이 마계 녀석들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던 탓이다.
결국 놈들의 노리개로 전락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었던 여자였지.’
그런데 그 매설란이 지금 자신에게 몸을 기대고 있다니.
세상일이란 참 알 수 없다.
“매 소저….”
사비강이 그녀를 그윽하게 보았다.
하지만 곧 매설란이 슬며시 몸을 빼내며 자세를 바로잡았다.
“죄송해요. 잠깐 추태를….”
“추태라니. 당치도 않소.”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고마워요.”
매설란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내심 조소를 짓고 있었다.
‘호호. 거의 다 넘어왔구나.’
줄 듯 말 듯.
애간장을 녹이며 상대를 지치게 만드는 방법.
‘조금만 기다려요. 오늘 밤 당신의 내기를 아낌없이 빨아먹어 드릴 테니까.’
그녀가 혀로 입술을 핥았다.
사비강의 아랫도리에 힘이 들어갔다.
열매가 익어 간다.
하지만 조바심을 내서는 안 된다.
설익은 열매가 떫은 법.
조금만 더 익을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오늘 밤이야. 그때까지만 기다려요. 내가 익은 열매를 따먹어 줄 테니까요.’
생각보다 쉬웠다.
무엇보다 사비강이 여색을 멀리하지 않는다는 게 가장 편한 점이었다.
열흘 만의 성과.
조금은 싱겁다는 생각도 들었다.
매설란이 매혹적인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안강에 도착하면 어디로 가실 건가요? 이왕이면 쉴 새 없이 이동한 생도들에게도 휴식을 주고 싶어요.”
“안강백가로 가볼 생각이오. 그곳 장원이 너르다 하니, 가능하다면 거기서 생도들과 함께 묵을까 싶소.”
물론,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다.
안강백가에 반드시 들러야 할 이유는 따로 있다.
‘바로 아칸 포션을 포함해서 꽤 중요한 물건들을 취하기 위해서지.’
매설란이 얼굴을 살짝 붉히고는 시선을 내려 깔았다.
“그러시군요. 혹시 방이 모자란다면 저는… 교관님과 함께라도… 괜찮아요.”
사비강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역시 생도들을 배려하는 매 소저의 마음은 참으로 아름답소. 내가 꼭 안강백가에 도착하는 대로 우리가 묵을 최고의 방을 안내 받도록 하겠소.”
그가 히죽 웃었다.
‘요, 암캐가 몸이 달아올랐구나!’
‘이, 수캐가 꿈도 야무지구나!’
비슷하지만 다른 생각을 품은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미소 지었다.
**
“콰앙!”
“아이고, 깜짝이야!”
“허허, 이 사람. 뭘 그리 놀라나?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폭음이 들리더니 건물이 통째로 날아가더라니까.”
주루에서 낮술을 들이켜는 사람들이 손짓발짓을 해가며 떠들어댔다.
비단 그들뿐만이 아니었다.
삼삼오오 모여 앉은 사람들 모두 같은 주제로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후로 비명이 이어졌지. 처절하고 잔인한 비명이.”
“글쎄, 누가 알았겠는가? 안강백가가 그렇게 하루아침에 멸문지화를 당할 줄이야.”
“그런데 어쩌다가 그렇게 큰 폭발이 일어났을까?”
“그게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야. 분명히 누군가 저지른 짓 아니겠어?”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누가 그렇게 큰 폭발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거야? 그건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폭발력이 아니었어.”
“뭐, 혹시 모르지. 사파 무리가 사이한 사술을 부려서 그랬을 지도.”
“하긴, 요즘 슬슬 사파 무인들이 움직인다는 소문도 있던데.”
“허어, 참 안타까운 일이야. 덕망 높은 안가가 그런 일을 당했으니.”
쾅!
돌연 식탁을 내려친 남자.
그 바람에 떠들어대던 사람들이 움찔 떨고는 그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죽립을 푹 덮어썼다.
그러고는 식탁 옆에 세워 둔 커다란 활을 등에 메고, 묵직한 짐을 어깨에 둘렀다.
그제야 사람들이 그를 알아보고는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쉿. 말조심해. 혈수궁(血手弓) 단구기(端邱忌)야.”
“엇, 진짜다. 단 대협은 백가와 친분이 깊었으니 상심이 크시겠군.”
“백가뿐이겠나? 안강의 사대 문파 장문인들과는 모두 호형호제 할 만큼 친분이 두터운 걸.”
“자자, 괜히 백가 이야기를 더 꺼내서 단 대협의 심기를 어지럽히지 말자고.”
하지만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최대한 주의하며 나누는 대화가 이미 단구기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가고 있다는 것을.
단구기는 주먹을 꽉 말아 쥐고는 부르르 떨더니, 휙 돌아서서는 걸어 나갔다.
객잔에서 나온 그는 안강백가의 장원으로 향했다.
휘이이잉!
바람이 불면서 타고 남은 재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한때 안강백가 가문이 굳건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던 곳.
하지만 지금은 기둥 하나 서 있지 않았다.
온통 시커먼 재만 가득했다.
그야말로 죽음의 터.
단 한 구의 시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화마는 모든 것을 태워 삼켰다.
단구기는 잿더미가 된 터의 한쪽 구석을 가만히 응시했다.
그곳에서 이따금씩 백 가주를 비롯한 안강의 사대 문파 장문인들과 함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안강의 사람들이 자네를 그리워하더군.”
단구기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네보고 덕망이 높다고 하더군.”
주먹을 꾹 말아 쥔 단구기.
잠시 후, 그의 손에서 힘이 풀리는가 싶더니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우는 것일까?
그런데 죽립 아래 그의 표정은….
“크크크.”
입매를 귀신처럼 찢으며 웃고 있었다.
“자네보고 말이야. 덕망이 높다고 하더란 말이지. 크크크.”
나직이 웃음을 흘린 그가 곧 정색을 하더니 스산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다리게. 곧 자네 곁으로 나머지 녀석들도 보내줄 테니.”
단구기는 걸음을 옮겼다.
인적 드문 숲을 찾은 단구기.
그는 산을 오르다가 수풀 따위로 입구가 가려진 동혈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둘러맨 짐을 풀어 뭔가를 꺼냈다.
투명하고 작은 병.
옥빛 액체가 담겨 있었다.
그가 심호흡을 하고는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크읍!”
화끈한 감각이 심장 근처에서 찌릿하게 울렸다.
가슴이 뻐근하게 아파 왔다.
얼른 가부좌를 틀고 독문심법인 소하진기(溯河眞氣)로 운기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서야 단구기는 눈을 떴다.
그의 눈동자에 새파란 기운이 맺혔다가 곧 사라졌다.
이마에는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후우우우.”
길게 숨을 내쉬자 몸이 편안해지면서 전신이 가벼워졌다.
그는 다시 짐 속에서 투명한 돌을 꺼냈다.
크기는 엄지만 했다.
그 안에는 붉은 빛의 영롱한 기운이 쉴 새 없이 너울거렸다.
처음 이것들을 발견했을 때만해도 당최 무엇에 쓰는 물건들인지 알지 못했다.
특히 붉은 기운을 품은 이 돌.
하지만 정말 우연히 알게 됐다.
이 영롱한 돌을 화살에 매어 날리면 밤중에 꽤나 예쁘겠구나 싶었다.
그래서 산 정상에 올라 하늘을 향해 쏘았다.
행여나 하늘에 닿을까 하는 마음으로.
그런데….
믿을 수 없게도 화살이 떨어진 곳에 어마어마한 폭발이 일어났다.
땅은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떨렸다.
반경 삼십 여장이 초토화됐다.
그때 생각했다.
‘이거라면… 놈들을 없앨 수 있다!’
단구기가 다시 입매를 찢으며 웃었다.
“크크크크! 역시 이건 대단한 물건이었어. 이게 있다면 그놈들에게 천벌을 내릴 수 있다! 씨도 남기지 않고 모조리! 네놈들 집안에 있는 거라면 개새끼 한 마리도 남기지 않으리라! 크하하하!”
**
서산으로 해가 걸쳤다.
산을 내려온 단구기가 관도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길 때였다.
마침 저만치 마차 두 대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그 주변으로 무복을 갖춰 입은 젊은이들이 묵묵히 걷고 있었다.
행색이나 표정으로 보아서는 꽤 먼 길을 걸어온 듯했다.
마차에 꽂혀 있는 기를 확인한 단구기는 곧 그들이 누구인지 짐작했다.
‘용천관의 연무기행인가?’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인원이 적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저 화려한 마차란….
단구기가 차갑게 조소를 날렸다.
‘썩었다, 썩었다, 말은 많이 들었지만 정말 제대로 썩었군. 하긴 이 땅에 아직 정도가 남아 있기나 한가?’
그가 냉랭한 표정으로 앞서 걷는데, 사두마차 한 대가 빠르게 달려오더니 바로 뒤에서 멈췄다.
단구기가 죽립을 슬쩍 들어 올리며 돌아보았다.
마부석에 앉은 앳된 청년이 뒤통수를 긁적이며 질문했다.
“저어, 선배님, 죄송합니다만 길 좀 여쭙겠습니다. 저희는 용천관 생도인데, 현재 교관님 인솔 하에 연무기행 중입니다. 혹시 선배님께서는 안강백가의 가장으로 가는 길을 알고 계신지요?”
‘안강백가’라는 말에 단구기가 흠칫거리고는 청년을 보았다.
하지만 아주 짧은 순간이었기에 마부석에 앉은 청년, 단리정은 그 반응을 미처 눈치 채지 못했다.
“마을 어귀를 지나 오른쪽으로 접어들게. 커다란 참나무를 지나면 높은 건물이 보일 걸세. 그곳이 안강백가의 가장이라네.”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단리정이 포권을 취하며 깍듯하게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높은 건물을 보진 못할 것이다. 그곳엔 죽음밖에 남아 있지 않으니. 후후.’
단구기는 속생각을 삼키며 마주 예를 차렸다.
“별 말씀을.”
**
생도들은 물론, 매설란마저 눈을 크게 뜨고는 시커먼 잿더미를 바라보았다.
염자량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여기가… 정말 안강백가라고?”
“재밖에 없잖아? 어떻게 된 거야?”
“아까 이곳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얼핏 들었어. 불과 어제 일어난 일이래.”
“설마 멸문지화를 당했다는 거야?”
“맙소사. 믿을 수가 없어.”
생도들이 술렁거렸다.
매설란 역시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설마하니 오늘 밤 묵을 장소가 이런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곤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
다만, 일행들 중 유일하게 당황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사비강.
그는 딱딱하게 굳은 표정이었지만, 당혹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제길. 한 발 늦었군. 폭렬궁(爆裂弓)이 이미 다녀갔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