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환 마교관-19화 (19/670)

# 19

귀환 마교관

19화

“연무기행(硏武紀行)?”

학장 주유천이 서류를 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맞은편에 선 사비강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공식 연무기행은 매년 봄에….”

“곧 봄이지 않습니까?”

“그래도 모두가 함께 떠나는 기행일세. 한데 자네는 특목반만 따로 움직이겠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여행 장소 또한 일치하지 않으니….”

“일전에 말씀드렸을 텐데요. 특목반 만큼은 그 이름처럼 특별히 제 임의대로 교육하겠다고 말입니다.”

“물론 그렇지만 연무기행은 관내 최대 행사나 다름없네. 그만큼 신경 쓸 것이 많아. 행여나 사고가 발생하면….”

“그때는 모든 책임을 제가 지겠습니다.”

“책임을 지겠다니….”

“물론, 그럴 일은 없겠지만 말입니다.”

주유천은 입을 다물고는 사비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도대체 저런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확실히 사비강은 성격이 바뀐 듯했다.

불과 며칠 만에.

이러니 상당수의 교관들이 사비강을 의심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유천이 고민하고 있을 때, 사비강이 말을 이어갔다.

“여행 기간이 좀 길긴 하지만 관칙상 위배될 건 없다고 봅니다. 만약 학장님께서 보시기에 관칙에 위배되는 것이 있다면 지적해 주십시오. 수정하겠습니다.”

“크흠.”

주유천은 헛기침을 하고는 서류를 다시 훑어보았다.

확실히 관칙에 명백히 위배될 건 없다. 하지만 제안한 모든 내용들이 파격적이다.

전례가 없는.

사비강이 못을 박았다.

“학장님께서는 관칙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저만의 교육 방식을 인정해 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해서 드리는 제안서입니다.”

결국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끄음. 알겠네. 다만 연무기행 동안에는 각별히 주의해야만 하네. 절대로 사고가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일세. 또한, 자네의 부재 기간 동안 누군가는 임시로 생도부장 직책을 맡을 걸세.”

“명심하겠습니다.”

사비강의 대답을 들은 주유천이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

“예에? 석 달이나요?”

특목반 생도들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는 입을 척 벌렸다.

용천관에서는 해마다 봄이 되면 연무기행을 떠난다.

대게 보름에서 한 달을 기준으로 다녀오는 강호 수련여행 개념이다.

한데 석 달이라니.

지금까지 이렇게 긴 연무기행을 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혹시 우리 특목반만 해당되는 겁니까?”

손을 들고 질문을 꺼낸 사람은 바로 염자량.

지난번 베르타스 절도 사건 이후로 그는 비교적 사비강을 호의적으로 대하고 있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사비강으로 인해 자신의 신체 역량이 발전했다는 것을 깨달은 후부터지만.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특별히 우리 반만 석 달 동안 연무기행을 떠나도록 한다. 그러니 너희들은 행운으로 알아라. 후후.”

“행운은 무슨 행운입니까? 여행 즐거운 것도 하루 이틀이지, 석 달이라뇨? 너무 길다고요!”

곡보옥이 불만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몇몇 생도들이 그의 말을 수긍하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하지만 사비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쨌거나 너희들은 특목반에 소속된 이상 내 결정에 따라야 한다.”

“학관에서 허락해 줄 리가 없습니다.”

“이미 학장님의 승인을 받았다.”

사비강이 도장 찍힌 서류를 들어 보이며 씨익 웃었다.

곡보옥의 표정이 흙이라도 씹은 것처럼 일그러졌다.

‘젠장! 이 교관은 도대체 무슨 꿍꿍이인 거야? 연무기행을 석 달이나 떠난다니? 게다가 아직 날씨도 풀리지 않았는데 보름 후에 출발이라고?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생도들도 갑작스러운 통보에 술렁거리고 있었다.

사비강이 서류를 흔들며 말했다.

“자, 어쨌든 이렇게 결정됐으니 다들 준비 기간 동안 보호자에게 연락하도록. 참가비와 노잣돈을 넉넉히 준비해야 할 테니까 말이야. 흐흐.”

“쳇! 이런 일방적인 통보가 어디 있어!”

곡보옥이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 소리는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큼 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은 생도들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우선 참가비를 거둘 사람은… 어디 보자.”

그의 시선이 염자량에게 머물렀다.

“상단에서 지냈으니 계산은 제법 할 테지? 자량, 네가 맡아라.”

“뭐, 알겠습니다.”

염자량이 시큰둥한 목소리로, 하지만 싫지만은 않은 듯 대답했다.

한편, 여전히 투덜거리는 곡보옥을 향해 연우경이 다가오더니 어깨를 두드렸다.

“뭐, 오히려 잘 된 걸지도 몰라.”

“그게 무슨 말이야?”

“석 달간의 기행 참가비를 모두 합하면 얼마나 될까?”

“어마어마하겠지!”

“그 어마어마한 돈을 분실하면?”

“그랬다간 난리나겠…! 혹시?”

연우경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곡보옥이 주변의 눈치를 얼른 살피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런 짓을 했다간 우리도 무사하지….”

“그런 짓? 그런 짓이 무슨 짓인데?”

“참가비를 훔치….”

“아서라. 누가 그런 멍청한 짓을 한 대? 굳이 우리가 직접 하지 않아도 돼.”

“그럼…?”

“세상에 큰돈 싫다는 사람 봤어?”

곡보옥이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저었다.

연우경은 그저 염자량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줄을 잘못 서면 어떻게 되는지 깨닫게 해줘야지. 동기로서.”

**

“우리가 왜 특목반인 거죠?”

미간을 곱게 찡그리며 소리치는 사람은 바로 목단화(睦丹花).

단아한 이마에 오뚝한 콧날, 한 떨기 꽃잎처럼 붉은 입술.

원래 비룡반(飛龍班)이었던 그녀는 이번에 새로 특목반으로 배정받았다.

학관에서 생활하는 동안 관칙 한 번 어기지 않았던 우수 학생.

그런데 그녀를 비롯해서 그녀와 자주 어울리는 민유향(珉柔香), 백미령(白美玲)이 이번에 새로 특목반으로 배정받았다.

세 사람 모두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기에 일각에서는 사비강이 사심을 가지고 생도 욕심을 부린 게 아니냐는 억측마저 나올 정도.

사비강은 탁자 위에 발을 척 올려 둔 상태로 귀를 후비며 대꾸했다.

벌써 그는 며칠 째 같은 태도였다.

“내가 배정했기 때문이라니까. 이래봬도 내가 생도부장이거든.”

“그러니까 왜 하필 우리가 이런 반에 와야 하느냐는 말이에요!”

“이런 반? 이런 반이 어떤 반인데?”

사비강이 이맛살을 슬쩍 구기고 묻자, 목단화가 팔짱을 끼고는 코웃음을 쳤다.

“솔직히 모를 줄 아세요? 여기 모여 있는 애들. 하나같이 불량 생도잖아요? 학관에서조차도 다스리길 꺼리는 아이들. 그도 아니면 부적응자들. 그야말로 구제불능 문제아들!”

“흐음. 그래? 난 잘 모르겠던데.”

쾅!

“시미치 떼지 마세요! 눈이 있고 귀가 있으면 다 안다고요!”

목단화가 탁자를 거칠게 짚으며 소리쳤다.

사비강이 한쪽 눈을 슬쩍 치떴다.

“그럼,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

“뭐라고요?”

“네가 말했잖아. 불량 생도들만 이곳에 배정된다고.”

“그랬죠.”

“그러니 너도 불량 생도여서 이곳으로 배정받았다고 생각하면 될 것 아냐?”

“그게 말이에요? 전 지금껏 관칙을 어긴 적도 없고, 관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도 없는….”

“아아, 어쨌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 이미 결정은 났어. 누가 뭐라고 하든 너는 이제 특목반 생도라고. 이 몸이 그렇게 결정했으니까. 후후.”

“납득할 수 없어요! 전! 절 원래 있던 반으로 배정시켜 주세요!”

“불가.”

“이익! 아버님께 이 사실을 말씀드리면 결코 가만히 계시지 않을 거예요!”

“상담은 언제든 환영한다고 전해 드려라.”

사비강이 툭 던지듯 대꾸하더니 팔짱을 끼고는 눈을 감아 버렸다.

사실 그는 목단화를 비롯해서 민유향과 백미령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섬검목가(閃劍睦家)의 장녀, 목단화.

패검연가와 더불어 검술의 경지에 있어서는 가히 넘볼 수 없는 위치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는 섬검목가.

훗날 목단화 역시 가문의 절기를 이어받아 막강한 검술을 자랑하게 된다.

하지만 손속이 맵고, 못된 성질을 버리지 못해서 많은 이들의 적이 되기도 한다.

비록 학관을 다니는 동안에는 우등생도인 척하지만, 그녀는 관칙을 교묘하게 이용하는가 하면, 우월한 미모로 교관의 약점을 쥐고 흔들기까지 한다.

이번에 특목반에서 그녀가 제외되었던 이유는 바로 그러한 점 때문이다.

여운진조차도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차마 할 수 없었기에.

유독 남에게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그녀는 어디까지나 우등생도의 위치를 잃고 싶어 하지 않기에.

즉 연우경과 비슷한 과이면서도 보다 섬세하고, 여자라는 신분을 십분 활용하는 영악한 아이다.

민유향과 백미령은 섬검목가에 조력하는 가문과 문파의 자녀로, 역시 목단화의 조력자쯤으로 보면 된다.

이 문제아들을 굳이 특목반에 배정한 이유는….

‘애석하게도 이 녀석들이 나름 쓸 만한 재목이란 말이지. 잘만 키우면.’

사비강은 눈을 지그시 감은 채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서 좀 쓸 만한 인재는 과거가 하나같이 이 모양일까?

“얘기 다 했으면 가라.”

사비강이 마치 파리라도 쫓듯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목단화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두고 보자, 이 교관 자식!’

결국 목단화는 더 따지지 못한 채 몸을 홱 돌려 밖으로 나와 버렸다.

“단화야, 괜찮아?”

“정말 뭐 저런 교관이 다 있니?”

민유향과 백미령이 얼른 목단화의 뒤를 쫓으며 험담을 쏟아 부었다.

하지만 목단화의 귀에는 어떤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수료할 때까지 우등생도의 지위를 잃지 않겠다는 그녀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기분이 성할 리가 없었다.

마침 그녀가 모퉁이를 막 돌아서는데.

툭!

“아얏!”

누군가와 부딪친 목단화가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나다가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화야!”

“어멋!”

뒤따르던 민유향과 백미령의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한편 목단화는 입술을 꾹 씹고는 고개를 들었다.

감히 자신을 엉덩방아 찧게 한 자가 누구인지 똑똑히 봐주겠다는 듯이.

그런데….

‘생도?’

자신에게 다가오며 손을 내미는 자가 생도 복장을 하고 있는 게 아닌가?

적어도 교관일 줄 알았는데.

여자라고는 하지만 검술과 공력의 경지가 또래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그런데 나를 넘어뜨려?’

마침 그녀와 부딪쳤던 염자량이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저어… 괜찮소?”

“흥!”

목단화가 얼른 염자량의 손을 쳐내며 벌떡 일어났다.

‘교관이나 생도나 하나 같이 마음에 안 들어!’

목단화가 입술을 꾹 씹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리자, 염자량도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쳇, 기껏 사과했더니. 하여튼 집안 좋은 것들은 죄다 싸가지가 없다니까.”

염자량이 중얼거리며 돌아서다가 문득 멈춰 섰다.

‘아, 회비 받아야 하는데.’

그가 다시 몸을 돌려 막 모퉁이를 돌아가려는 순간이었다.

물컹!

‘음?’

또다시 갑작스러운 이 느낌.

하지만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정신을 차린 순간.

“아야야….”

한 여인이 엉덩방아를 찧은 채 눈살을 곱게 찌푸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염자량은 두 눈을 찢어질 듯 부릅떴다.

경국지색(傾國之色), 화용월태(花容月態), 만고절색(萬古絶色)…!

이 세상의 어떤 단어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오롯이 표현할 수 있을까?

목단화가 피지 않은 꽃봉오리의 풋풋함을 안겨 준다면, 눈앞의 여인은 그야말로 활짝 만개한 꽃이었다.

거기에 가슴의 아찔한 계곡이 엿보이고, 눈처럼 하얀 허벅지가 훤히 드러나는 경장 차림은 정신을 차리지 못할 만큼 매혹적이었다.

“미안하구나. 괜찮니?”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오히려 사과를 해왔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염자량이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물, 물론입니다. 죄송합니다!”

“아냐. 제대로 보지 못한 내 잘못이지. 그런데 나 좀 일으켜 줄래?”

“아, 네! 넵!”

염자량이 얼른 손을 잡았다.

맙소사. 손이 어쩌면 이렇게도 여리여리… 부들부들….

여인이 생긋 웃었다.

“고마워라. 그런데 넌…?”

“아… 저, 저는 트, 특목반 생, 생도 염자량이라고 합니다!”

“호호호. 반가워. 너 특목반이었구나. 내 이름은 매.설.란(梅雪蘭).”

“아아… 네….”

이름조차 아름답다.

“그런데 어딜 가는 길이니?”

“아… 저… 아! 회비를 받으려고… 제가 연무기행 회비 담당입니다!”

“풋. 그렇구나. 혹시 학장님이 계신 곳이 어딘지 알아?”

“네? 아, 넵! 저곳으로 쭈욱 올라가시면 됩니다!”

“고마워. 앞으로 잘 부탁해.”

“네, 넵! 잘 부탁드립니다!”

염자량이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에? 그런데… 앞으로 잘 부탁한다고? 그게 무슨 뜻…?’

하지만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여인이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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