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귀환 마교관
20화
흐느적 흐느적.
염자량은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붕 뜬 걸음.
태어나서 그토록 아름다운 여자는 처음 봤다.
청초한 얼굴에 터질 듯 부푼 가슴과 새하얀 허벅지.
살포시 미소 짓는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다리에 힘이 풀릴 지경이었다.
거기에 착하기까지!
혹시 선녀가 강림한 건 아닐까?
넋을 놓고 걷는데, 마침 저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곡보옥 패거리가 정문 인근에서 웃고 떠들었다.
‘아, 회비!’
그제야 자신이 회비를 걷으러 다니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고는 얼른 품을 뒤졌다.
묵직.
다행히 회비는 품안에 잘 보관되어 있다.
은자로 채워진 회비는 꽤나 묵직했다.
다행히 상당수의 생도들이 무리 없이 회비를 납부했다.
아직까지 회비를 납부하지 않은 생도들은 담임 교관에 대해 반발심이 크거나, 정말 돈을 마련하기 힘든 자들이었다.
그 중에는 바로 곡보옥 패거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염자량이 사비강에게 우호적으로 돌아선 후로 조금 쌀쌀하게 대하고 있었다.
때문에 염자량은 잠시 망설였지만 곧 그들에게 다가갔다.
마침 곡보옥이 염자량을 보고는 인사를 건네 왔다.
“오, 염 형 아니오? 회비는 많이 걷혔소?”
“다행히 다수의 생도들이 회비를 납부했소.”
염자량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해서 말인데… 곡 형과 다른 분들도 어서 회비를 내주면 좋겠소.”
“아, 물론 회비를 내야지. 모두 함께 떠나는 연무기행인데 우리만 안 낼 수야 없지 않소? 그렇잖아도 염 형을 만나면 주려고 했소.”
의외로 곡보옥이 순순히 회비를 납부했다.
그러자 다른 생도들 역시 기다렸다는 듯이 염자량에게 회비를 건네주었다.
‘내가 괜히 신경 썼나 보군.’
염자량은 내심 안도의 숨을 내쉬고는 회비를 확인했다.
모두 정해진 회비를 정확하게 납부했다.
염자량이 포권을 취했다.
“이렇게 협조해 줘서 고맙소.”
“별 말을. 같은 생도끼리 서로 돕지도 못하면서 이 정도는 기본 아니오?”
“그런데… 혹시 연우경 생도를 보지 못했소?”
“아, 연 형.”
곡보옥이 손뼉을 짝 마주치며 잊고 있었다는 듯 말했다.
“마침 잘 됐소. 우리가 지금 연 형을 만나러 가는 길이었소. 같이 갑시다.”
“아, 그럼 다행이오.”
염자량이 아무 생각 없이 걸음을 옮기다가 멈칫거렸다.
생도들이 정문을 나가려는 것이 아닌가?
곡보옥이 돌아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 왜 그러시오?”
“어디로 가는 거요?”
“아랫마을에 내려가는 거요. 연 형이 지금 마을 다루(茶樓)에서 기다리고 있거든. 자, 갑시다.”
“음….”
염자량이 자못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마을의 다루까지 내려가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만, 품에 보관하고 있는 회비가 너무 많았다.
자칫 학관 밖으로 나갔다가 회비를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닐 터.
결국 염자량이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오. 아무래도 연 형에게는 다음에 받아야겠소.”
“음? 왜 그러시오? 혹시 우리와 함께 어울리기 싫은 거요?”
곡보옥이 노골적으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염자량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그런 건 아니오. 다만 회비를 보관하고 있는 중이라….”
“하하! 그런 거라면 무슨 걱정이오? 어차피 우리가 함께 가지 않소?”
“하지만 자칫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뭐요? 설마 우리가 그 회비를 어떻게 할까 봐 그러는 거요?”
“아, 그런 뜻은 절대 아니오.”
“그럼 결국 우리와 어울리는 게 싫다는 것 아니오?”
“그건 아니라고 하지 않았소.”
“그럼, 뭐가 문제요? 조금만 염 형이 주의를 기울이면 되는 것을. 자, 그러지 말고 갑시다. 그렇잖아도 연 형이 염 형과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을 했었소.”
“그게… 정말이오?”
“그럼, 정말이고말고. 연 형은 염 형의 기개를 높이 사고 있소.”
염자량은 잠시 갈등했다.
‘차라리 회비를 숙소에 두고…. 아냐, 그게 오히려 더 위험하다. 차라리 몸에 지니고 있는 게 제일 안전해.’
결국 그는 곡보옥을 따라나서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잠시 마을에 다녀오는 동안 무슨 일이야 있겠는가?
“알겠소. 다녀옵시다.”
“하하. 잘 생각했소. 염 형. 어차피 우리도 함께 있는데 뭐가 걱정이겠소?”
**
낭패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염자량은 주춤주춤 물러서며 복면인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세 명.
그들의 눈은 웃고 있었다.
“순순히 가진 걸 내놓으라니까.”
검을 들고 있는 자가 목뼈를 이리저리 꺾으며 탁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양쪽에서는 완만하게 굽은 환도를 든 두 사람이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고 있었다.
염자량은 침을 꿀꺽 삼켰다.
‘칫, 곡 형은 아직인가?’
곡보옥을 따라서 마을 어귀까지 다다랐을 때였다.
느닷없이 복면을 쓴 세 사람이 나타났다.
녀석들은 다짜고짜 생도들을 습격했다.
혼비백산한 생도들이 흩어져서 도망갔다.
그나마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곡보옥은 연우경을 불러오겠다며 어디론가 달려가 버렸다.
여기서는 마을이 훨씬 가까웠으니 학관으로 돌아가는 건 무리였다.
한데 떠난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계획?
그러지 않길 바라면서도, 사비강에게 비협조적인 연우경과 곡보옥 무리라면 가능성이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어디에도 증거는 없다.
심증만 있을 뿐.
염자량이 복면인들을 둘러보며 싸늘하게 말했다.
“나는 생도일 뿐이오. 가진 게 없소.”
“크크크. 그거야 털어 보면 알 일이지.”
“뭐, 털어 보기 전에 내놓으면 더 좋지만 말이야. 크크.”
복면인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염자량은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등 뒤에는 커다란 나무 기둥이 버티고 있어 더 이상 물러날 곳도 없다.
“정말 내어 줄 게 없소.”
“그럼, 한 번 털어 보지!”
결국 환도를 든 복면인 둘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찰나.
스스스슷!
염자량이 묘도보법을 시전하면서 자신을 향해 쇄도하는 칼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는 허리춤에 패용했던 단검을 뽑아 들고는 대각선으로 그어 올렸다.
슈아아악!
“크아악!”
복면인 하나가 허벅지를 부여 쥐고는 쓰러졌다.
염자량은 몸을 회전하며 낮게 자세를 잡았다.
복면인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뭐야? 이놈. 생각보다 무공이 세잖아?’
아직 어려서 얕잡아 봤다간 이쪽에서 큰 코 다칠 수 있다.
쇄망했네 어쩌네 하지만, 그래도 용천관의 생도라는 건가?
한편, 염자량 역시 자신의 반응 속도에 스스로가 놀랐다.
놈들의 칼날이 마지막까지 똑똑히 보였다.
체내의 공력 또한 좀 더 자유자재로 움직였다.
차가운 물속에서 극기 훈련을 한 보람이 있는 것일까?
아니면 사비강이 자신의 몸에 손을 썼다는 것 때문에?
어쨌거나 몸이 가볍다.
어쩌면 해 볼 만 하다는 생각까지 든다.
하지만 품에 넣어 둔 회비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다.
자칫 격한 움직임에 회비를 떨어뜨리기라도 하면 낭패다.
그때.
“까불지 마라!”
환도를 든 복면인이 사나운 기세로 달려들었다.
‘보여! 확실히!’
염자량은 물 흐르듯 걸음을 옮기며 몸을 빙글 회전했다.
상대의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뒷목을 스치며 지나갔다.
염자량은 회전력을 이용해서 그대로 상대의 손등을 내찔렀다.
푹!
“끄아아악!”
챙그랑!
복면인이 환도를 놓치고는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후우, 후우.”
염자량은 심호흡을 했다.
움직임이 많진 않았으나 잔뜩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호흡이 가빠졌다.
‘확실히 실전이라는 건 공력 소모부터 다르구나.’
그때였다.
“멍청한 놈들.”
검을 쥔 자가 차갑게 내뱉더니 저벅저벅 다가왔다.
스르르릉.
그가 천천히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 한 번 잔재주를 더 부려봐라. 재롱 좀 보자.”
염자량은 순간 숨을 멈추고 말았다.
다르다.
이 사람은 뭔가 달라.
단지 검을 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자체가 다르다.
등골이 오싹해졌다.
복면인이 피식 웃었다.
“그럼, 내가 먼저 가줄까?”
팟!
다음 순간 복면인이 튀어 나갔다.
**
“글쎄, 이미 결정 난 사항이라고 하지 않소!”
등부형이 사비강을 막아서며 언성을 높였다.
하지만 사비강은 막무가내였다.
“비켜요! 나는 받아들이지 못하겠으니까!”
“글쎄, 사 교관이 받아들이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라니깐.”
“어쨌든 특목반은 내가 전담하는 거요! 내 임의대로 교육하겠다고 이미 말씀드리지 않았소?”
“그러니까 그건 그렇게 하시라고. 하지만 이건 전혀 다른 문제요!”
거의 등부형을 밀어내다시피 걷던 사비강이 걸음을 우뚝 멈췄다.
그가 씨근거리며 등부형을 쏘아보았다.
“뭐가 다른 문제요? 부담임이 생기면 아무래도 내 교육 방식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는 거고….”
“아니, 절대 거기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는다고 했다니까! 그러니 그만 돌아가십시다.”
“아뇨. 못 돌아가겠소. 나는 절대로 부담임을 받아들이지 않을 거요!”
“허어 참. 말이 통하지 않는구먼.”
“그러게 왜 제게 보고도 없이 그런 일을 하시랍니까?”
“보고라니? 뭔가 착각하는 모양인데 교관의 임용에 대한 권한은 학장님에게 있는 거요! 사 교관에게 보고를 하고 말고 할 문제가 아니란 말이오!”
“어쨌든 난 받아들일 수 없소! 특목반 담임은 나 하나로 충분하오!”
마침내 두 사람은 학장 집무실 앞까지 다다랐다.
등부형이 기를 쓰며 막아섰다.
“잠깐! 이게 따진다고 될 일이 아니오. 침착하시오, 사 교관.”
“비켜요! 난 납득할 수 없다니까!”
“어허, 이 사람!”
참다못한 등부형이 손을 뻗으며 사비강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사비강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마치 암벽에 손을 뻗은 기분.
‘뭔 몸이 이렇게…!’
내심 놀란 등부형이 은근히 공력을 실었다.
그럼에도 사비강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등부형을 쳐다보았다.
“비키시오. 이러다 다치겠소.”
순간 등골이 오싹해진 등부형이 저도 모르게 움찔 거리고는 손을 뗐다.
머쓱해진 그가 한숨을 내쉬며 툴툴거렸다.
“거참, 그게 따진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니깐….”
그러거나 말거나 사비강이 막 문을 열어젖히려는 순간이었다.
끼이이익.
먼저 문이 열리면서 마침 주유천이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주유천은 사비강을 알아보고는 말을 건넸다.
“음? 사 교관. 마침 잘 됐군. 그렇잖아도 자네에게 소개시켜 줄 사람이 있었네.”
“알고 있습니다. 부교관이겠지요?”
주유천이 슬쩍 돌아보자, 등부형이 고개를 잠깐 조아렸다.
대략의 상황을 짐작한 주유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네. 드디어 창법 부교관을 맡아 줄 사람을 찾았다네.”
사실 창법 부교관이라는 자리는 이름 좀 알린 강호인이라면 거들떠도 보지 않는 직책이다.
특히 요즘 들어 창법은 인정받기 힘든 병과인데다, 정교관도 아닌 부교관이기에 기피 현상은 더욱 심했다.
주유천이 말을 이었다.
“물론 이 분의 주 무공이 창술은 아니지만, 흔쾌히 창법 부교관으로 부임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네. 물론 창술을 가르침에 있어서도 충분할 정도의 기량이니 본관으로서는 무척 고마울 따름이지.”
“그자를 특목반 부담임으로 배정하시겠다고요?”
“그렇다네. 창법 부교관으로 고용하기에는 아까울 정도의 인재일세.”
“인재든 둔재든 필요 없습니다. 애초에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특목반에 한해서만큼은 제 임의대로 교육하겠다고 말입니다.”
“흐음…. 그럼 부담임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얘긴가?”
“그렇습니다. 모든 반에 반드시 부담임을 배정해야 한다는 관칙은 없지 않습니까?”
“물론, 그렇긴 하네만. 이미 말을 해두었던지라….”
“저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허어. 이거 그녀에게 좀 곤란하게 됐군. 이쪽 입장이 영….”
“어쩔 수 없습니다. 곤란하시더라도 그녀… 음? 그럼 그 부교관이라는 자가 여자….”
그때였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사뿐사뿐 걸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어머? 누구….”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목소리.
그 위에 학장의 목소리가 덮였다.
“아, 이쪽은 아까 말한 특목반의 사비강 교관이오.”
“어머, 안녕하세요.”
여인이 살며시 미소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
사비강은 입을 다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엄청나게 ‘섹시’하다.
그렇다. 마계에서는 저런 여자를 두고 그렇게 표현했다.
섹시하다고.
그야말로 경국섹시!
다른 표현이 떠오르지 않는다.
부드럽게 솟아오른 가슴과 눈처럼 하얗게 뻗은 다리.
굴곡 있는 몸매를 따라 시선을 올려다보면 청초하기 그지없는 얼굴.
반칙이다.
저런 얼굴에 저런 몸매는!
“이 분이 새로 부임한 창법 부교관일세.”
사비강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는 사이 주유천이 헛기침을 하고는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커험! 매 소저. 죄송하게 됐소만 아무래도 특목반 부담임으로 배정되는 건 취소될….”
“안녕하시오!”
갑자기 버럭 소리치며 다가온 사람은 다름 아닌 사비강.
그가 매설란의 손을 덥석 잡으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특목반 담임! 사비강이오! 격하게 환영하오! 매 소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