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귀환 마교관
5화
생도들 틈에 섞여서 과정을 지켜보던 연우경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렸다.
‘검법 정교관 자리를?’
그 곁에 있던 곡보옥 무리도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떠들었다.
“지금 제정신인가? 검법 정교관 자리라고? 말이 돼?”
“그러게 말이야. 그나저나 저런 실력으로 어떻게 맹 선배를 이긴 거지? 난 비무 과정을 다 보고도 이해가 안 돼.”
술렁거리는 생도들.
단상 위의 교관들도 멍한 표정이 되고 말았다.
창법 교관 자리를 지킨 것만도 다행으로 생각할 줄 알았건만.
검법 교관이라니?
‘그것도 부교관이 아니라, 정교관 자리를 달라고?’
일어나 있던 천세명이 주먹을 쥐고 부르르 떨었다.
“이보게! 사 교관! 자네 지금 제정신으로 하는 소린가?”
“그렇습니다만.”
“허어! 창법 부교관 자리를 놓고 비무에서 이겼다고 너무 기고만장한 것 아닌가? 병과를 옮기는 것도 모자라서 정교관 자리를 원한다고? 나 참, 어이가 없어서!”
이번에는 주유천도 나섰다.
“이 자리는 창법 부교관을 정하는 자리였네. 비록 자네가 비무에서 이겼다고는 하나, 자네 마음대로 그 자리를 넘기고 검법 교관 자리를 요구할 수 없네.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인데?”
“저는 제 의사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창법 부교관 자리를 저자에게 넘겼습니다만, 그 자격을 판단하는 것은 학장님께 맡길 수밖에 없겠지요. 또한 그것과 별개로 저는 검법 정교관이 되길 요청하는 바입니다.”
천세명이 듣다못해 버럭 소리쳤다.
“헛소리도 작작 하시게! 자네가 원하기만 하면 정교관이 덜컥 되는 줄 아는가?”
“뭐, 당연히 그렇진 않겠지요. 다만 관칙에 의하면 교관들에 한해서는 병과를 옮기거나 정교관을 신청하는 것이 자유로운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자격 검증 절차를 거쳐야 하겠지만요.”
“끄음.”
사비강이 희미한 비소를 지으며 맹손덕과 천세명을 번갈아보았다.
“아니면 그 자리도 이미 주인이 있는 겁니까?”
“거 무슨…!”
천세명이 주먹을 쥐고 바들바들 떨었다.
관칙에 의하면 부교관이든 정교관이든 본인이 원한다면 병과를 자유롭게 옮길 수 있다.
또한 정교관이 되는 것 역시 언제든 신청이 가능하다.
다만, 자격이 되는지에 대해서는 시험을 통과해야만 한다.
그 시험 내용은 그때그때 다르다.
지금처럼 비무가 될 수도 있고, 다른 과제가 주어질 수도 있다.
즉 이 자리에서 사비강이 검법 정교관이 되기를 요청한 것은 매우 뜻밖이긴 하지만, 그가 관칙을 어겨 가며 억지를 부리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생도들과 교관들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요청했으니, 무작정 불허할 수도 없게 됐다.
주유천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말했다.
“우선 창법 부교관 자리를 자네가 사양하겠다는 의사는 받아들이겠네. 단, 비무에서 패한 자를 임명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내부 논의가 필요한 일일세. 또한 자네의 검법 정교관 자리 요청도 받아들이겠네. 자격 검증 절차에 대해서는 추후에 자세한 내용을 통보하겠네. 이상일세.”
학장의 말이 끝나자, 교관들의 표정이 굳으며 조용해졌다.
반면, 비무대를 둘러싼 생도들은 더욱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사비강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
창가에 서서 뒷짐을 진 진백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멍청한 녀석, 차라리 오지 말 것이지.’
답답한 마음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혀를 찼다.
그가 사비강을 처음 만난 것은 15년 전이었다.
길을 지나다가 우연히 불에 타는 생가를 보았다.
당시 어린 사비강은 죽어 가고 있었다. 그의 부모는 도적에게 당해서 시체가 되어 있었다.
모른 척할 수가 없어 어린 사비강을 데리고 용천관으로 돌아왔다.
무공에는 별로 소질이 없었기에 창법을 주로 익히게 하여 부교관으로 지낼 수 있도록 힘을 썼다.
강호는 제법 오랜 시간 평화가 지속된 상태였기에 학관에서도 창법 교관쯤이야 아무라도 상관없다는 분위기였다.
문제는 사비강의 성격이었다.
실력은 변변찮은데, 지나치게 정의롭고 원칙주의자였다.
거기에 오지랖까지 넓었다.
처음에는 그를 좋게 보던 교관들도 나중에는 슬슬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그를 멸시하거나 은근히 괴롭히는 자들이 생겨났다.
동료인 교관들마저 그럴 진데 생도들은 오죽하랴.
결국 생도들에게마저 무시받기 일쑤더니, 오늘과 같은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죽어 가는 녀석을 살려 주고 용천관에 발을 붙이도록 해주었더니 어느새 정이 붙었나 보다.
평소라면 비무대가 있는 곳으로 가서 부상자를 대비하겠지만, 오늘은 영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비강이 손도 쓰지 못하고 얻어터지는 꼴을 직접 보게 되면 속에서 천불이 날 것 같기에.
해서, 의생들만 몇을 보내 두었다.
‘흐음. 지금쯤이면 결과가 나왔을 텐데.’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사비강의 행방이 묘연하다고 하여 차라리 잘 됐다고 생각했다.
치욕을 당하고 학관에서 쫓겨나느니, 이곳의 은원은 훌훌 털어버리고 제 적성에 맞는 길을 찾아 떠나버리길 바랐다.
한데 갑자기 나타나서는 비무를 시작했다니….
‘답답한 녀석. 쯧쯧.’
보나마나 잔뜩 얻어터졌겠지.
여기저기 찢어진 곳도 있을 터.
이미 준비는 해두었다.
환자가 도착하면 곧바로 응급처치를 할 수 있도록.
“각주님! 각주님!”
마침 문밖에서 의생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왔구나.’
잠시 후,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의생들이 뛰어 들어왔다.
한 녀석이 환자를 들쳐 업었고, 다른 두 녀석이 양쪽에서 지혈을 하며 보조하고 있었다.
의생의 등에 푹 엎어진 채 의식을 잃은 환자를 보고는 진백이 얼른 물었다.
“어서 여기로! 많이 다쳤느냐?”
“대부분은 타박상입니다만, 몇 군데 찢어진 상처가 있습니다. 많이 맞았습니다.”
“제길! 굳이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의생들이 침상에 환자를 엎어 놓았다.
상처가 주로 등과 허리에 있었기 때문이다.
다급히 환자의 몸을 살핀 진백이 어금니를 쿡 씹었다.
타박상이 무척 심했다.
이 정도면 그야말로 개 패듯 두드려 팼다는 것이다.
의생들이 목격담을 늘어놓았다.
“초식이고 뭐고 없었습니다. 그냥 마구 두드려 팼습니다.”
“비무를 하다가 우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나중에는 바짓가랑이를 잡고 매달리면서 손이 발이 되도록 빌었어요.”
진백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져 갔다.
“못난 놈! 결국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왜 나타나서는!”
그때였다.
“끄으윽.”
환자가 의식을 차린 것인지 신음을 토해냈다.
진백이 다급히 몸을 돌려 눕히며 물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드느냐? 이 녀석아, 그러게 왜 굳이 나타나서….”
말을 꺼내던 진백이 흠칫거리곤 물었다.
“… 누구세요?”
**
빛 한 줌 들지 않는 암흑.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그곳에서 허공을 가르는 파공성만 쉴 새 없이 울렸다.
쉭! 쒜엑! 쉬이잇!
암검각(暗劍閣).
창이 없는 건물.
꽤 너른 실내지만 출입문을 닫으면 한 줌의 빛도 허용되지 않는다.
또한 방음 역시 완벽하여 안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밖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눈과 귀로는 절대 알 수 없다.
쒜에에엑!
날카로운 소리가 한 차례 길게 울린 끝에서야 비로소 움직임이 멈췄다.
본래 여기는 일년생 검법 교관들이 자유롭게 드나들며 수련할 수 있는 곳이지만, 현재는 정교관 한 명만이 사용하는 전용 수련각처럼 인식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천천히 검을 거둔 사내가 탁한 목소리를 흘려 냈다.
“들어오시게.”
그러자 문이 비스듬히 열리면서 빛이 스며들었다.
그제야 검을 든 초로의 사내가 어렴풋이 드러났다.
일년생 검법 정교관 암영신검(暗影神劍) 상필지(商弼知).
희끗한 머리카락 사이로 안광이 날카롭게 빛났다.
한편 문을 열고 들어선 자는 다름 아닌 천세명.
상필지는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반 시진이나 기다리게 했군.”
“아닙니다. 오히려 상 선배의 수련에 방해가 된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아예 아니라곤 못하지.”
무심히 던진 말에 천세명이 뜨끔한 표정이 됐다.
“죄, 죄송합니다.”
“나를 찾은 용건은?”
“그것이….”
천세명이 그간에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상필지는 일년생 정교관이었지만 좀처럼 회의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하나, 그의 실력이 워낙 뛰어난데다 생도들을 교육함에 있어서만큼은 철두철미했기에 학관에서도 딱히 그의 잦은 불참을 문제 삼진 않았다.
이야기를 전해들은 상필지가 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사비강이라고 했나?”
“그렇습니다.”
“교관 중에 그런 자가 있었던가?”
그의 무심한 목소리에 천세명은 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필지는 그런 자였다.
수준이 낮은 자들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
천세명이 조심스레 말했다.
“일이 그렇게 되어 검법 정교관이신 상 선배의 고견을 여쭙고자 찾아왔습니다.”
“뭐, 어차피 일년생 검법 정교관은 나밖에 없으니, 한 명 더 뽑아도 상관없는 일이지. 후후.”
뜻밖의 대답에 천세명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상필지가 비릿한 웃음을 머금으며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검증은 필요할 터. 주제도 모르고 설치는 미꾸라지는 물을 흐리기 전에 잡아 죽여야지.”
그제야 천세명의 입가에도 비소가 떠올랐다.
“그럼, 역시 비무를 하실….”
“설마 나보고 그 애송이와 검을 섞으라는 말을 하려는 건가?”
상필지의 싸늘한 표정을 확인한 천세명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실언을.”
“이렇게 하도록 하지.”
상필지가 천세명에게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천세명은 이내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그 방법이 좋겠습니다.”
“클클. 그렇게 한다면 굳이 우리가 손을 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정리되지 않겠는가?”
“옳은 말씀입니다.”
천세명이 기분 좋은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
검법과 창법은 다룸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는 만큼 사비강 역시 기본적인 병과 시험은 응시해야만 했다.
물론, 그는 마계에서 중원의 다양한 검법을 익혔고, 실제로 검을 주로 사용했었기에 기본 시험은 무난하게 통과할 수 있었다.
다만, 현재 일년생 정교관 중에서 업적이 없는 사람은 없다.
모두가 세간에서 인정받을 만한 업적을 남겼다.
가령 악랄한 마두를 죽였거나, 사악한 도적 무리를 섬멸했거나….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사비강에게 내려진 임무는 꽤나 적절한 것이었다.
귀야채(鬼夜寨) 토벌.
귀야채는 최근 용천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고성산(古聖山)에 터를 잡은 도적 떼다.
대략 구성원이 서른 명 전후로 알려져 있으며, 채주는 ‘악구검(惡口劍)’이라는 별호로 알려진 무인이었다.
악랄하고 잔혹하기로 유명한 자였다.
그 역시 검을 사용하기에 검법 교관의 자질을 검증할 상대로는 제격이었다.
그렇잖아도 용천관에서 멀지 않은 곳이기에 교관 몇 명과 생도들로 구성된 토벌대를 파견할 참이었다.
기간은 대략 한 달 정도로 예상했다.
하지만 사비강에게 내려진 임무 기한은 겨우 보름.
그 안에 귀야채를 토벌해야만 한다.
물론, 절대 불가능한 시간이다.
토벌은커녕 제 한 목숨 유지하면 그나마 다행이리라.
오늘로 사비강이 떠난 지 열흘.
‘후후후. 이렇게 된 건 모두 네놈 때문이다.’
천세명은 창가에 앉아서 여유롭게 찻잔을 들었다.
‘감히 내게 치욕을 안겨 주려 했겠다?’
그날의 일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신이 직접 추천한 맹손덕이 손 한 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얻어맞았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부정한 방법으로 맹손덕을 추천했다는 게 만천하에 공개될 뻔하지 않았던가?
뭐 어쨌거나 이젠 됐다.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약해 빠진 주제에 늘 바른 소리만 입에 달고 살면서 사사건건 딴지를 걸고 늘어지던 녀석.
부신각주의 체면을 봐서 지금껏 봐주었더니.
‘제 무덤을 제가 판 거지. 흐흐.’
이제 닷새다.
닷새만 지나면 눈엣가시 같은 그 녀석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
만에 하나 살아 돌아온다고 해도 귀야채가 멀쩡한 이상 그가 있을 자리는 없다.
맹손덕이 창법 부교관이 되진 못했지만, 사비강은 스스로 그 자리를 걷어찼다.
“오늘따라 차 맛이 좋군.”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천세명이 눈을 지그시 감고 차향을 음미하는데, 문득 창밖이 소란스러웠다.
몇몇 사람들이 정문을 향해 달려가는 모습도 보였다.
마침 문이 벌컥 열리더니 방으로 여운진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오? 여 교관.”
“그, 그, 그놈이 돌아왔답니다!”
“누구 말이오?”
“그놈 말입니다! 사비강!”
“사비강이?”
천세명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제 겨우 열흘 지났다.
혹시 임무를 포기하고 돌아온 건가?
“아무튼 빨리 나와 보십시오!”
천세명이 여운진의 손에 이끌리다시피 달렸다.
정문이 보이는 앞마당에는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었다.
여러 교관들과 생도들.
천세명은 여운진을 따라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갔다.
마침내 사비강의 모습이 보였다.
피 범벅이 된 사비강.
그가 히죽 웃더니 천세명을 향해 시커먼 뭔가를 휙 던졌다.
툭, 데굴데굴.
“헉!”
흉측한 두상을 확인한 천세명이 저도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났다.
사비강이 목을 한 차례 우두둑 꺾고는 말했다.
“귀야채주, 악구검이오.”
바닥을 구르는 것은 바로 귀야채주 악구검의 머리였다.
사비강이 이를 하얗게 드러내고 웃었다.
“후후후. 자, 그럼 이제 나를 검법 정교관으로 인정해 주시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