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화엄호로 떠나다
사흘이 지났다.
남하림은 남천상국에 도착하여 하루만 외출한 뒤 나머지 이틀은 남소정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모두가 남하림이 상국에 왔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조용히 지냈다.
“흠흠.”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오시는군. 예상보다 하루 더 빨리 오셨는데.’
상국주 남후정이 찾아왔다.
“들어오십시오.”
남하림은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켰다.
드륵.
문이 열리며 남후정이 미세하지만 불편한 얼굴로 모습을 드러냈다.
“오셨습니까?”
“쉬고 있었던 모양이군.”
“안에서 이것저것 많은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
남소정에 드나드는 시녀들에게 남하림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남후정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뭔가 할 말이 많은 표정을 지었지만 먼저 말을 꺼내지 않았다.
타악.
그는 의자를 꺼낸 뒤 앉았다.
“앉아라.”
“알겠습니다.”
남하림도 탁자를 사이에 둔 채 의자에 앉았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막 아버지를 찾아뵙고자 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딱 오셨네요.”
“흐음…….”
방금 아들이 한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가 없다.
사실이라기엔 입고 있는 복장이 거의 잠자리에 들기 전 복장과 같았다.
“특호위를 만났다고 들었다.”
“아하, 쥐새끼처럼 몰래 따라 다니더군요.”
‘끄으응.’
그 일에 대해서 말하며 남하림은 기분이 상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난 단지 귀찮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싶어서 호위를 붙여놓은 것이다. 다른 뜻은 없었다.”
“아버지도 참. 여기서 저를 귀찮게 할 사람이 누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제가 누군지 아직도 잘 모르시네요. 신무맹의 맹주 걸황입니다.”
“…….”
“게다가 구천의 조율자 양천의 전인이지요.”
“흐음…… 내가 가끔씩 잊는 것 같다. 내 아들이 걸황이라는 사실을.”
“지금이라도 잊지 않으시면 됩니다.”
나란히 앉은 채 미소를 띤 남하림과 애써 태연한 척하는 남후정.
“소문에 의하면 창천의 근거지가 무너졌다고 하더구나. 완전히 끝난 것이더냐?”
“끝날 리가 있겠습니까? 창천주는 아직 살아 있습니다. 그가 사라지지 않는 한 끝난 게 아니더군요.”
“그렇구나. 그럼 그가 어디로 갔는지 혹시 아느냐?”
“대충은 압니다. 아직 완벽하게 안다고 하지는 못하지만 어느 정도 예상은 할 수 있습니다.”
“허어어, 그게 정말이더냐? 창천주가 어디에 있는지 안다고?”
“후후후.”
남하림은 웃음으로 대신 대답을 하였다.
“조만간 그를 잡으러 갈 겁니다.”
“창천 소속의 무인들을 모두 죽인 그다. 이길 수 있겠느냐?”
“확신할 수 없습니다만 만나 봐야 알지 않겠습니까?”
“그건 그렇겠지.”
남하림의 말처럼 누가 더 강한지 알 수 없었다.
직접 싸워보지 않는 이상 승자는 정할 수 없으니까.
“……한데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혹시 이 일과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글쎄요. 연관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더군요.”
“그게 무슨 말이냐? 창천과 본 상국이 연관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남후정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남천상국의 수장으로서 많은 일들을 겪어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그가 말이다.
“저도 연관이 없었으면 합니다. 그래서 아버지께 물어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
벌떡.
남후정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할 말이 없다.”
“하기 싫다면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강요할 수는 없잖아요.”
“…….”
결국 그는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내가 그냥 나가면 어떻게 할 생각이지?”
“한 단계를 건너뛰는 것이죠. 특별한 건 없습니다.”
남하림을 내려다보는 그의 시선이 따뜻했다.
“넌…… 내 아들이다.”
“알고 있습니다.”
“내가 어떻게 했으면 하느냐?”
“아버지께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인지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은 누구냐?”
“당연한 걸 묻습니까? 내 가족입니다. 아버지와 두 분의 어머니와 형제들, 그리고 개방에 있는 내 의형제들입니다.”
“그렇군. 한 가지만 더 물어보자.”
“말씀하시지요.”
남후정의 눈빛은 진지했다.
“걸황이란 신분과 가족이 서로 부딪힌다면 둘 중 어느 것을 택하겠느냐?”
“둘 모두 버릴 수 없습니다.”
“그중 하나를 놓을 수밖에 없다면…….”
“만일 그런 상황이 정말로 내 앞에 나타난다면, 가족을 위해 걸황을 버릴 것입니다. 하나 분명한 것은 제 가족은 걸황을 버리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아버지께선 장사꾼의 생명은 정직이라 하셨지요. 정직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옳은 일을 하는 게 아니겠습니까.”
“…….”
십오 년 동안 다른 것은 몰라도 한 가지만은 확실하게 가르쳤다.
장사꾼의 생명은 정직이었다.
남후정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맞다. 진정한 가족이라면 옳은 일을 하는 걸황을 버리게 만들 순 없다.”
남후정은 자리에 앉았다.
가문의 비밀.
모든 것을 털어놓아야 할 때가 왔다.
대대로 가문의 수장에게 전해진 내용.
아직 남경에게조차 알려줄 수 없었던 가문의 극비였다.
“어떻게 확인을 했더냐?”
“십 년 전부터 그곳으로 물건들을 표행한 표국을 알아냈습니다.”
“하루 종일 집에만 있던 녀석이 그것을 어떻게 알아냈느냐?”
“그건 말하면 안 되죠. 제 영업 비밀입니다.”
“표국 출신의 인물이 아니면 힘들 텐데. 언제 여기 와서 그런 인물을 찾았는지 모르겠군.”
“제가 뛰어나지 않습니까? 아, 물론 아버지를 닮아서 똑똑한 것도 있습니다.”
“말이라도 고맙다.”
“상당히 많은 물량들이 움직였더군요. 제가 완성된 사당을 보지 못했잖습니까. 얼마나 큰 사당인지 궁금합니다.”
남하림은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
며칠 동안 조용히 있었던 이유는 확신을 가지기 위해서였을 터.
‘나 때문에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했군.’
홀로 본 상국에 오지 않고, 신무맹을 이끌고서 화엄도에 바로 갔다면 간단히 끝날 일이기도 했다.
그는 주위를 살폈다.
절대로 외부에 알려지면 안 될 극비였다.
“여기에서 우리가 나누는 목소리는 절대로 밖에 나가지 않습니다.”
“허허허.”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한 웃음.
“창천주가 누구인지만 알려주면 네가 궁금했던 모든 것을 단 한 번에 알게 될 게야.”
“…….”
창천주의 정체.
그동안 그에 대해 얼마나 알고 싶어 했던가.
근데 그의 신분을 아버지에게 들을 줄은 꿈에도 생각도 못했다.
“그분의 성함은 네 이름과 같은 남하림이시다.”
“……!”
쿠우웅.
남후정의 말에 무방비 상태로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이름과 같은 분이라면…….’
남하림이란 이름.
남천상국의 전신이었던 남천상회를 처음으로 세우신 분의 이름을 물려받았다고 들었다.
다른 설명은 없었지만, 남하림이라는 이름 하나만으로 모든 의문이 풀렸다.
이제 남하림은 한 가지만이 궁금할 뿐이었다.
“중원에서 일어났던 창천과 관련된 모든 사건에 본 상국은 어떠한 관계였습니까?”
“공신 해정이 그분이라는 사실과 창천의 전인이라는 것은 얼마 전에 알았다.”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죽지 않고 영혼만이 남아 몸을 바꾸는 것을, 아버지는 믿었습니까?”
“대대로 내려오시면서 그 능력을 직접 보여줬으니 믿을 수밖에. 하지만 그분께서는 아들이신 선조님께도 대혼술법이라고 알려진 능력을 전수하지 않으셨다. 그분께서 무슨 일을 하시는지 선조들께서는 전혀 몰랐다. 할아버지도, 그리고 나도…….
이 일은 대대로 가문을 이어받을 후손에게만 비밀로 계승되고 있었다.”
“…….”
“그분은 내게 화엄도에서 지낼 집이 필요하시다고만 하셨다. 그 외는 부탁도 없었다. 이건 양 총관도 모르는 일이다.”
절대로 믿을 수 없는 이야기.
하지만 남하림은 거짓말 같은 그의 이야기를 믿었다.
창천주는 오래전부터 화엄도에서 긴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다.
“왜 제 이름을 그를 따라 지었습니까?”
“천괴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나는 후손에게는 동명으로 이름을 지으라는 말씀이 있으셨다.”
“그도…… 천괴성이군요.”
마지막 의문까지 풀리자 기운이 빠졌다.
한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아버지께서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습니까?”
“이미 결정을 내린 것으로 안다만…… 아니더냐?”
남하림의 얼굴은 평소처럼 평온해 보였다.
“맞습니다. 결심을 했습니다. 비록 그가 선조이시기는 하지만 제 가족은 아닙니다.”
“조심해라. 내가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없다.”
“걱정 마세요. 이번 일은 결국 그와 제가 담판을 지어야 할 문제입니다.”
남하림은 내일 그곳으로 떠나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덜컹.
객실의 문을 열고 빠르게 들어섰다.
“안 표사! 안…… 표사!”
여인의 목소리에 안적이 벌떡 일어났다.
영화령이 들뜬 얼굴로 다급하게 안적을 불렀다.
“안 표사. 어서 일어나.”
“영 소저, 무슨 일이신지……?”
“밖에…… 걸황님이 찾아오셨어요!”
안적은 일어나면서 미소를 지었다.
어제 걸황께서 내일 아침에 찾아오겠다고 하셨었다.
‘약속을 지키셨다.’
안적은 옷을 빠르게 걸쳐 입고 나갔다.
남하림이 두 팔을 벌리며 반갑게 맞이하여 주었다.
“아하하! 안 형.”
탁탁.
남하림은 그를 끌어당긴 뒤 한 손으로 등을 두드렸다.
두 사람의 모습을 본 상명상단의 인물들은 어떻게 된 일인가 싶어 어리둥절했다.
어떤 사이인지 궁금증이 가득한 얼굴로 가만히 보기만 할 뿐이었다.
남하림은 그와 떨어진 후 일행에게 돌아섰다.
“혹시 어느 분이 책임자이신지?”
“걸황님, 제가 상단의 책임자입니다. 영구용이라 합니다.”
영구용이 앞으로 나섰다.
“영 형이시군요. 이것 받으세요.”
남하림은 그에게 서류를 내밀었다.
“이건…….”
“그렇지 않아도 광동성에 좋은 거래처가 없을까 찾던 중이었지요. 정확한 거래 계약은 따로 만나서 정리하는 걸로 하고, 천하상국에서 줄 수 있는 계약을 적어 놓았으니 돌아가서 상단주와 의논한 뒤 연락을 하세요.”
“아아…… 이런 일을…… 감사합니다……!”
“감사라고 하기에는 약소한 것이지요. 여기 안 형이 고생을 많이 했거든요.”
“아…… 네에…….”
영구용은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지만, 안적과 관련이 있다고 하자 기분이 좋았다.
“내가 급하게 볼일이 있어 갈 곳이 있소이다. 다음에 안 형을 만날 때 보시죠.”
“알겠습니다. 걸황님께서 오신다면 최선을 다해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툭툭.
남하림은 안적의 어깨를 두드렸다.
“안 형, 그만 갑니다.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살펴 가십시오.”
휘익.
그들 앞에서 남하림의 신형이 사라졌다.
영화령은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서 미칠 지경이었다.
“안 표사님.”
평소와 다르게 그녀가 부르는 목소리가 부드럽게 변했다.
“아…… 네. 영 소저.”
“두 분, 어떤 사이세요?”
“그냥…… 걸황님이 저에게 편하게 부탁을 할 사이 정도…… 입니다.”
“아…… 그렇구나! 아 참, 아침 식사는 아직 안 하셨죠? 저도 안 했는데 같이해요.”
“아, 알겠습니다.”
덥석.
옆에서 영구용이 어깨를 감쌌다.
“어떻게 된 거냐?”
“아직은…… 나중에 이야기해 드리겠습니다.”
“그래? 나중에 꼭 말해주는 거다. 알겠지?”
* * *
남하림은 남천상국에서 나온 후 곧장 형산으로 방향을 돌렸다.
“여기가 포화촌이군.”
형산으로 들어서기 전 가장 가까운 마을.
펄럭!
마을 초입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물이 보였다.
형산객잔.
‘이곳이군.’
먼저 이곳에 보냈던 장사분타주 구문상에게서 연락이 왔다.
객잔 앞에 도착했지만, 남하림은 객잔으로 들어가지 않고 건물 뒤를 돌았다.
아래로 내려가는 작은 길이 나타났다.
휘익.
아래로 내려가자 위에서는 보이지 않는 동굴이 나타났다.
“걸황님, 오셨습니까?”
구문상과 십여 명의 개방도들이 모여 있었다.
“좋은 장소에서 지내고 있네요.”
“우연히 찾았습니다.”
“앉죠.”
덥석.
남하림은 그들과 함께 앉았다.
“어떻게 되었습니까?”
“걸황님의 말씀처럼 화엄호 일대를 살펴보았지만 대공사를 했던 흔적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사당도 바뀌지 않았던가요?”
“그렇지 않아도 사당에 가보려고 했지만 이상한 기운에 접근을 할 수 없었습니다. 걸황님께서 무리하지 말라고 하셔서…….”
“잘했습니다. 아마도 그곳을 지키는 힘이 있는 모양이군요.”
“저희들이 여기 일대 주위를 다니면서 어디서 작업을 했는지 물었지만 화엄호 근처에는 인근 마을 주민들이 접근도 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분명 화엄호에서 대공사를 했던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수고했어요.”
“저희들이 똑바로 걸황님의 명을 처리하지 못한 듯합니다…….”
“그건 아닙니다. 이것만으로도 확실하게 알았습니다. 그곳에 내가 찾는 게 있다는 사실을요.”
“…….”
화엄호의 비밀에 대해서 구문상도 궁금했다.
하지만 더 이상 알고자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느낌으로 알았다.
세상에는 알아야 할 일과 숨겨야 할 일이 있다.
“분타주께서는 그만 돌아가셔도 됩니다.”
“알겠습니다.”
“나중에 돌아가서 이번 일에 대해 고마움을 전하겠습니다.”
“아닙니다. 당연히 개방도라면 걸황님의 명을 이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고맙습니다.”
남하림은 한 번 더 감사의 말을 한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동굴 밖으로 나가려다 잠시 멈췄다.
“혹시나 내가 당분간 나타나지 않아 찾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걱정 안 해도 된다고 말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휘익!
남하림의 신형이 그들 앞에서 사라졌다.
구명상은 사라진 그의 뒤를 멍하게 보있다.
“……우린 할 일을 다 했으니 돌아가자.”
“저어…… 분타주님. 걸황님을 도와드리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걸황님께서 도움을 원하셨다면 말씀을 하셨겠지. 우린 가서 그분이 돌아오시는 것을 기다리면 될 뿐이다.”
“아…… 네에…….”
그들은 동굴 밖을 연신 바라보며, 며칠 동안 지냈던 자리를 정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