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7. 독광을 만나다
창천궁으로 한 명의 사내가 들어섰다.
삼십 대 초반의 모습.
구 척 장신에 근육질의 신체는 천계의 신장이라고 하기에 모자라지 않았다.
척.
창천궁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앞을 막아섰다.
“멈추시오.”
“나를 몰라보는가?”
사내의 목소리 또한 굵직했다.
‘이 눈빛은…….’
호위무사가 사내의 눈빛을 보고 흠칫했다.
강렬한 눈빛.
“몰라뵈어서 죄송합니다. 영문자님을 뵙습니다.”
“주군께 연락을 하게.”
“영문자님께서 오신다면 곧바로 들여보내라 하셨습니다.”
“고맙네.
영문자는 창천궁 안으로 들어섰다.
처억!
대전으로 들어서는 긴 복도 사이로 나타난 호위무사들이 일제히 허리를 숙였다.
영문자는 그들 사이를 당당하게 걸으며 복도 끝에 섰다.
“열어라.”
구우우웅-
대전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렸다.
멀리 끝에, 천주좌에 앉아 있는 창천주가 보였다.
영문자는 넓은 보폭으로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섰다.
타악!
강하게 포권을 하며 허리를 숙였다.
“주군, 늦어서 미안하외다.”
창천주는 그를 보며 대소를 터뜨렸다.
“하하하! 걸황에게 완전히 당한 모양이군. 그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완전히는 아니고 요만큼…….”
영문자는 손가락으로 아주 차이가 없다는 듯이 가리켰다.
“소문을 듣자니 두 팔이 거덜 났다고 하던데?”
“팔이야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지 않겠소이까. 그것 말고는 딱히 다른 곳은 이상이 없었소이다.”
“훗. 정색하는 것을 보니 그에게 당해서 심기가 불편했군.”
“주군. 전 그렇게 속이 좋은 놈이 아닙니다. 제 몸으로 직접 싸울 수 있는 상대가 있다는 것만으로 오히려 기분이 더 좋습니다.”
“후후후, 자네가 그렇다고 한다면야…….”
“걸황, 대단한 녀석이더군요.”
영문자는 남하림을 인정했다.
그동안 창천의 인물들이 줄줄이 당한 사실을 알면서도, 한편으론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 많았었다.
“큭, 당해보니 보통이 아니지?”
“특이한 놈이었습니다.”
“전부 얕잡아보다가 당했지.”
“그건 아닙니다. 제가 붙어 보니 걸황을 얕잡아봐서 당한 게 아니더군요.”
“그게 아니라면?”
“걸황과 정당하게 붙어서 실력으로 진 것입니다.”
“하긴…… 얕잡아 본다고 해서 이길 것을 계속 질 수는 없지. 맞아. 그놈의 실력이 높지.”
창천주 또한 인정했다.
용문자의 몸에 들어왔지만, 그는 남하림의 신체에 대해 욕심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고 있었다.
“원래의 몸으로 돌아왔으니 다시 붙어야 하지 않겠는가?”
“당연히 복수를 해야지요.”
“직접 걸황을 만나러 갈 생각인가?”
“당한 것은 갚아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가는 건 좋지만, 무작정 간다고 해서 만나주겠는가? 그놈 주위에 귀찮은 놈들도 많고.”
“걸황이라면 만나주지 않겠습니까?”
“아닐걸?”
“……하긴. 뻔뻔한 놈이었소이다.”
“그놈을 끌어내려면 중요한 곳을 건드려야지 않겠는가.”
“중요한 곳이라면, 어디를 말하시는 건지?”
“개방을 건드리면 당장 나올 것이네. 가는 길에 개방의 분타들이나 치면서 올라가도 더 좋고.”
“호오, 그렇게 하지요. 당장 개방에 다녀오겠소이다.”
“바빠서 좋겠군. 멀리 나가지 않겠네.”
척.
영문자는 포권을 한 뒤 돌아섰다.
‘확실히 변하셨군. 예전의 주군이라면 편하게 넘어가지는 않았을 텐데.’
* * *
영문자가 창천궁 밖으로 나오자 순중이 얼른 곁으로 다가왔다.
무당파 공격이 실패한 후 영문자가 창천주를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밖에서 기다리는 동안, 그는 제발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랐다.
물론 순중이 창천주와 영문자의 관계에 대해서 알았다면 걱정을 하지 않았을 것이지만.
“영문자님, 어떻게 되셨습니까?”
“무슨 말이냐?”
“창천주님께…… 꾸중을…….”
“겨우 그 정도 일로? 걱정 안 해도 괜찮다. 살다 보면 이런 일도, 저런 일도 있는 법이지.”
영문자는 돌아서며 걸었다.
타앗!
그의 뒤를 순중이 바로 따랐다.
“한 달 정도면 푹 쉬지 않았나?”
“그렇습니다.”
“그럼 준비해. 개봉으로 간다.”
“개봉이라시면…… 설마…… 개방을!”
순중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필이면 개방을?’
중원의 많은 문파들 중, 개방은 현재 무림 최고의 문파였다.
“개방이 두렵나?”
“아닙니다.”
“하긴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개방이라면 선뜻 내키지 않겠지. 걱정 마라. 내가 원하는 건 개방이 아니라 걸황, 그 녀석이니까.”
순중은 바로 이해하였다.
걸황과 다시 상대하여 결전을 보려는 것이다.
“언제 출발하면 되겠습니까?”
“가능하면 빠를수록 좋지. 그놈을 한시라도 빨리 만나고 싶거든. 올라가는 김에 개방 총타나 분타도 서너 군데 들러 놀아보자고. 길을 잘 알아보도록.”
“최대한 빨리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이미 앞을 향해 걸어가는 영문자의 뒷모습을 보며 순중은 고개를 숙였다.
* * *
남양성으로 한 중년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곧바로 마을로 들어간 뒤, 천천히 구경하듯 주위를 돌았다.
툭툭.
중년 사내가 걷는 걸음마다 백색 가루를 뿌리자 바람을 타고 흰 연무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 정도면 죽지는 않을 게다.’
반 시진 후.
마을은 순식간에 비명과 의원을 찾는 다급한 소리들로 가득했다.
* * *
두두두두두두-
열 명의 인물이 신무맹의 정문을 빠르게 달려 나왔다.
당무독은 신무맹의 인근 마을에서 들려온 소식에 눈살을 찌푸렸다.
마을 주민들의 온몸ㄴ에 푸른색 반점이 올라오고, 호흡이 가빠져 곧바로 넘어갈 것 같다는 소식이 속속 들어왔다.
‘분명 독이야.’
다행히 독에 의한 사망자는 없었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독인지 확인하지 않는 이상, 이후 사망자가 나올지 아직 모르는 일이었다.
‘흐음…….’
마을 초입에 도착한 당무독은 사뿐히 말에서 내렸다.
그리고 가방 안에서 황색 가루가 든 병을 꺼내어,
휘익!
앞으로 뿌렸다.
잠시 후.
바닥으로 떨어지는 가루의 색이 자줏빛으로 변했다.
주위에 독의 기운이 미세하게 남아 있었다.
“독이 맞군.”
당무독은 손을 뻗어 바람의 세기를 확인했다.
마을 전체에 제독(除毒)을 해야 했다.
“여러분들은 마을을 다니면서 이 가루들을 골고루 뿌리시오.”
“알겠습니다.”
그들은 당무독이 나누어주는 제독 가루를 받았다.
“혹시나 수상한 자가 있을지 모르니 조심하시고.”
아홉 명의 사내들은 곧바로 마을로 들어가 두 명씩 조를 나눈 뒤 흩어졌다.
마을 사방 곳곳에서 신음 소리와 울음소리들이 들렸다.
‘우선…… 감염자를 만나 봐야겠어.’
후다닥!
당무독을 향해 세 사람이 달려왔다.
신무맹 소속의 무인과 의원, 그리고 마을 촌장이었다.
“독제님……!”
당무독은 앞에 멈춘 세 사람을 보며 물었다.
“언제부터 이런 일이 일어났소?”
“그건…… 소인들도…… 갑자기 사람들이 쓰러졌습니다.”
“독제님, 소인이 여기 마을의 촌장이옵니다. 제가 알기로는 거의 반시진 만에 마을 전체에 독이 퍼졌습니다.”
“환자들은 어디에 있소이까?”
“마을 공동 회관에 모두 모아놓았습니다. 소인이 앞장을 서겠습니다.”
촌장은 얼른 앞장을 서며 마을공동 회관으로 빠르게 달렸다.
“아이고…… 아이고…….”
“으아아아앙!”
가까이 다가서자 회관 안에는 흐느끼는 소리들과 신음 소리들만이 가득했다.
‘흐음…….’
거의 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중독 상태로 누워 있었다.
척.
당무독은 일단 가장 가까운 환자의 곁에 앉았다.
은침을 꺼낸 뒤 중독된 부위를 긁어내고 은으로 만든 받침대에 올려놓았다.
그러고는 가방 안에서 투명한 액체가 든 옥병을 꺼냈다.
푸시시-
붉은색 연기가 올라왔다.
“다행이군.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당무독은 곧바로 의원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 제독을 위한 약초들을 불러 준 뒤. 환자들에게 복용시키면 된다고 알려주었다.
일을 마무리한 당무독이 공동회관 밖으로 나오자, 뒤따라 나온 촌장이 연신 고개를 숙였다.
“독제님, 고맙습니다.”
“맹독은 아니니 걱정 안 해도 되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촌장의 눈엔 당무독은 성인이나 다름이 없었다.
‘자 그럼, 대체 어떤 놈이지?’
반 시진 만에 한 마을을, 그것도 백 명 정도의 인원을 중독시킬 정도의 독을 뿌리는 놈이었다.
더구나 생명에는 지장이 전혀 없는 독이다.
사천당문에서도 이와 같은 실력을 가진 인물은 없었다.
‘이건…… 나에게 원하는 것이 있는 모양인데.’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 제독하지 못한 사람들의 신음 소리만 들려올 뿐.
‘조용한 곳으로 가보면 알겠지.’
당무독은 공동회관 뒤로 곧장 돌아섰다.
인기척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지만.
스으윽-
예상이 맞았다.
고목 아래로 중년 사내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처음 보는 인물.
하지만 그의 기운은 익숙했다.
‘창천에서 왔군.’
스으으으으-
그의 주위로 안개가 피어올랐다.
푸른색의 고목 잎이 단번에 검게 변했다.
“독무(毒霧)…….”
사람이 이 정도의 독무를 뿜어낼 수가 있었구나.
‘대체…… 누구지?’
당무독의 표정에 경외감이 스며 들 정도였다.
스멀스멀거리며 다가오는 독무.
당무독은 가방 안에서 옥병을 꺼낸 뒤 앞으로 뿌렸다.
휘이이익!
백연이 피어오르며 독무를 막아섰다.
치이이이이-
독무가 녹기 시작했다.
“……오호, 독제라고 하더니 대단하군.”
중년 사내, 신문자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그의 독무를 간단히 제독한 인물은 오랜 세월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누구십니까?”
“후후후. 한번 알아맞혀 보게. 내가 누구인지?”
슈우우욱-
신문자의 전신에서 붉은빛의 독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건……!’
상대의 독공을 보자, 당무독은 대번에 그가 누구인지 알았다.
슈우우욱-
당무독이 양손을 뻗으며 독장을 펼쳤다.
백무독장(白霧毒掌)이 강한 결계를 만들어내며 붉은빛의 독광이 다가오지 못하도록 녹이기 시작했다.
푸시시시-
“어허, 사천당문에 그런 독공이 있었단 말인가?”
“조만간 생길 겁니다.”
“그게…… 무슨 뜻인가?”
“나중에 당문에 전수하겠다는 말이죠.”
“……!”
당무독이 새롭게 창안한 무공.
무공이 뛰어나다고 해도, 새롭게 무공을 창안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내력과 무공의 초식이 완벽하게 맞지 않는다면 상승무공일수록 주화입마에 들어서기 쉽기 때문이다.
타아아앗!
곧이어 신문자가 허리에 찬 주머니에서 폭지뢰를 꺼내며 터뜨렸다.
콰아아앙!!
바닥에 떨어진 폭지뢰가 터지면서 수천 개의 독침이 당무독을 향해 쏟아져 나갔다.
파아아앗!
빠르게 뒤로 물러난 당무독이 소매에서 빠져나온 천뢰비침을 다가오는 독침들을 향해 쏟아냈다.
휘리리리릭!
당무독의 손이 움직이자 천뢰비침이 날아가면서 커다랗게 회전했다.
타아아아앗!
천뢰비침에게 저지당한 폭지뢰는 전부 중간에서 걸려 바닥에 떨어졌다.
세 번의 공격을 간단히 막아낸 당무독을 노려보았다.
“독광이었습니까?”
“예전에 그 이름으로 불린 적이 있었지.”
“뭐라고 말을 할지 모르겠군요. 존경하던 분이 창천의 인물일 줄은 몰랐습니다.”
“실망인가?”
“굳이 실망까지는 아니지만. 오히려 더 좋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 이유가 뭔가?”
“독공을 익힌 뒤부터 독광의 전설을 동경했습니다. 독공에 대해 적수가 없어 고민하던 찰나에 나타나주셨으니 좋지 않겠습니까?”
“하하하하! 자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고 확신하는군.”
“무림인이란 확실함이 없어도 마음속에 의지가 강하다면 이길 수 있다고 하더군요.”
“누가 그런 멍청한 말을 하던가? 의지가 실력을 끌어 올려 주는 것은 아니네.”
“부장이라고 있소이다.”
“부장?”
신문자는 부장이란 이름에 대해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 몰랐다.
“이런, 부장이라고 하면 모르겠군요. 무림에서는 그를 걸황, 또는 맹주라고 부르지요.”
“아, 후훗. 그 걸황이 틀릴 때가 있군.”
“글쎄요. 부장의 말이 맞을지 틀릴지는 싸우기 전에 알 수 없지 않습니까?”
타아앗!
독광은 팔천독광무(八天毒光霧)을 펼쳤다.
상대를 포위한 채 여덟 방위에서 떨어지는 독무.
당무독은 계속해서 상대의 공격을 방어하다가는 밀릴 것임을 잘 알았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다.’
가방 안에서 꺼낸 옥병을 발 아래로 던졌다.
퍼어어엉!
단번에 백무가 피어오르면서 당무독을 가렸다.
신문자는 눈을 똑바로 뜨며 백무를 뚫어지도록 살폈다.
‘이놈이 어디에 갔지?’
팔천독광무는 이미 백무 안으로 쏟아졌다.
피시식-
백무 안에서 녹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그때였다.
퍼어어엉!
신문자의 머리 위로 옥병이 터지면서 붉은 가루가 흩날렸다.
광사혈독(狂蛇血毒)이 분명했다.
‘이런 미친…….’
신문자는 어이가 없었다.
광사혈독을 만든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다.
신문자가 백무 뒤로 모습을 드러낸 당무독을 향해 소리쳤다.
“이놈! 독광심독서를 보았구나!”
“우연히 봤지요. 현천옥이라고, 일반 사람들이 아는 그 황궁무고에 가니 있더군요.”
“큭, 크크크큭! 장난삼아 만든 독서를 보고 독을 만들 줄은 몰랐군. 네가 진짜 독에 미친놈이구나!”
“흐흐흐…… 독광에게 칭찬을 받다니 뿌듯합니다.”
당무독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