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1. 비밀을 알다
드르륵
남하림은 일행과 함께 방에 들어섰다.
마지막 열 번째의 구천신품.
침실에 세워져 있는 네 폭의 병풍을 가리켰다.
“이게 마지막 구천신품이다.”
“하림 형, 이게 구천신품이라고?”
팽유도는 혹시나 구천마제의 문양이 보이는지 고개를 갸우뚱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당무독은 네 폭으로 된 병풍에 어지럽게 그러진 붉은 선이 거슬린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음…….’
그러고는 서너 걸음 뒤로 물러난 뒤 붉은 선을 유심히 보았다.
‘그렇군.’
자신의 생각이 맞았다.
“유도야. 구천신품이 맞아.”
“무독 형, 문양이 안 보이는데요?”
“여기 서서 봐. 붉은 선이 만드는 모양이 구천마제의 문양이야.”
“아하…… 저게요?”
팽유도는 뒤로 물러난 뒤 손가락으로 붉은 선들을 보면서 따라 움직여 보았다.
“아, 맞네요.”
열 번째의 구천신품은 다른 아홉 개의 구천신품들과 다른 비밀이 숨겨져 있을 것 같았건만.
당무독은 병풍의 뒷면까지 자세히 살폈다.
‘별다른 장치는 없어.’
남하림이 말한 그대로, 특별히 이상한 부분은 보이지 않았다.
그저 산수화가 그려져 있는 병풍일 뿐.
‘어떻게 연관이 되는지 모르겠군.’
당무독도 병풍까지 합쳐서 열 개의 구천신품을 모두 알고 있었다.
크기와 모양이 달라서 합쳐 사용할 수도 없었다.
공통점이나 연관성을 전혀 찾을 수 없었다.
“부장, 어렵네. 전혀 모르겠어.”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자. 계속 생각하다 보면 풀리겠지.”
“응.”
남하림은 나가기 위해 돌아섰다가,
‘뭐지? 찾았나?’
탈혼마제가 심각한 눈빛으로 병풍을 주시하는 모습을 보았다.
무언가 알아낸 것처럼 의미심장하게.
“이상한 게 있나요?”
“아니.”
“그럼 뭘 보세요? 의미심장한 척하면서.”
“그림을 감상할 때에는 아는 척하면서 보는 것이라고 들었거든.”
뜬금없이 내뱉는 한마디.
피식.
남하림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가끔씩 보면 노인장도 마교와는 안 맞는 것 같습니다.”
“크큭, 나도 종종 그게 힘들었지. 난 내가 예술계에 종사할 사람이라고 생각했도다.”
* * *
남하림을 위한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유시부터 시작된 연회는 술시까지 이어졌다.
털썩!
남하림은 연회가 끝난 뒤 침실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침상에 누운 채 구천신품인 병풍을 비스듬히 쳐다보았다.
“……?”
물끄러미 병풍을 바라보던 남하림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었다.
스윽.
손가락이 붉은 선을 따라 움직였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네 폭의 병풍.
산수화 위에 그려진 붉은색의 선.
벌떡.
‘구천마제의 문양들.’
열 개의 문양.
지금까지는 먼저 구했던 아홉 개의 문양들을 겹쳐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었다.
‘그게 아니었어.’
남하림은 병풍을 침상 위에 눕혀 놓고, 붓을 들었다.
첫 번째. 동경에 새겨져 있던 문양.
슥슥슥.
병풍 위에 구천마제의 문양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음은 홍화병.’
남하림은 다시금 병풍 위에 홍화병에 새겨져 있던 문양을 그렸다.
“다음.”
세 번째 반지의 문양.
네 번째 노리개의 문양.
다섯 번째 등잔의 문양.
여섯 번째 요대의 문양.
일곱 번째 목걸이의 문양.
여덟 번째 검의 문양.
아홉 번째 빗의 문양까지 병풍 위에 모두 그렸다.
‘……끝났다.’
병풍 위에 열 개의 문양이 동시에 그려졌다.
남하림은 병풍을 다시 벽에 기대 세웠다.
어지럽게 그려져 있는 아홉 개의 선들.
그중, 붉은 선 하나가 아홉 개의 선들을 교차해 지나가고 있었다.
“……!”
붉은 선과 병풍에 그려놓은 아홉 개의 선들이 교차한 지점들이 눈에 띄었다.
‘이건…….’
남하림은 붉은 선과 교차하는 부분을 손으로 따라가며 점을 찍었다.
처음에는 무엇인지 몰랐다.
병풍에 점들이 분분히 찍혔다.
남하림은 찍힌 점을 따라 선을 굵게 그었다.
“……!”
병풍에 나타난 두 글자.
공신(工神).
남하림의 손이 허공에서 멈추었다.
“망할…….”
하늘이 무너질 듯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구천신품의 비밀은 글자를 품고 있었다.
남하림은 자리에 굳어 움직이지 못한 채, 병풍을 뚫어지게 보고 있을 뿐이었다.
파앗!
순간, 손에서 뻗어나간 기에 병풍이 산산조각 났다.
푸욱.
다시 침상에 누운 남하림.
‘공신, 이자가…… 중원을 가지고 놀고 있었어.’
손바닥 위에 올라간 중원 무림을 보며 얼마나 비웃었을까?
대혼술법으로 중원을 기만했다.
수많은 세월 동안, 얼마나 많은 기만을 이어왔는지 알 수 없었다.
남천상국과 공신의 인연은 깊었다.
‘……할아버지.’
남천상국에서 처음으로 공신 해정과 인연을 가진 사람은 그의 할아버지, 남진무였다.
* * *
아침 일찍부터 태남전으로 향하는 남하림의 표정은 담담했다.
공신 해정과 남진무의 관계.
중원에서는 고용자와 피고용인의 관계로만 알려져 있었다.
남하림 또한 공신 해정은 남천상국을 위해 값비싼 물건을 만드는 인물이었다고만 알고 있었다.
그거 말고 특별히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없었다.
의문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가 왜 남천상국에서 일을 했을까?’
공신 해정이 창천주가 확실하다면,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숨어 있어야 했다.
그것을 알지 못하고선 그를 찾을 방법이 없다고 확신했다.
어느덧 태남전에 도착한 남하림은 정문 앞에 섰다.
두 명의 호위 중 한 명이 고개를 숙였다.
“삼공자님을 뵙습니다.”
“할아버님께선 계십니까?”
“넵. 안에 연락을 하겠습니다.”
“아니에요. 제가 길을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남하림은 태남전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남하림은 경내를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스윽.
남하림이 들어서자 하인들은 얼른 고개를 숙였다.
그들 중 나이가 많은 하인이 불쑥 커버린 남하림을 알아보았다.
“하림 공자님.”
“순노, 여전히 정정하시네요.”
“고맙습니다. 공자님께서는 정말 늠름하게 자랐습니다.”
“할아버지는 어디에 계세요?”
“제가 공자님을 모시겠습니다.”
순노가 앞장을 서며 남진무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잠시 뒤.
“순노, 수고했어요.”
남하림은 짧게 고개를 숙인 뒤 기척을 냈다
똑똑.
“할아버님, 하림입니다.”
“들어오너라.”
마치 기다렸다는 듯 안에서 곧바로 대답이 들렸다.
남천상국의 전대 국주.
남진무는 모든 업무에서 물러난 뒤 태남전에서 생활하고 있었다.
그가 안으로 들어서는 남하림을 보았다.
“허허헛! 무림 영웅이 무슨 일이기에 꼭두새벽부터 찾아오느냐?”
“손자가 할아버지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겠습니까?”
“허허허, 그러냐?”
남진무는 아닌 줄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다.
“일찍 왔다면 식사는 안 했을 테고. 같이 먹겠느냐?”
“알겠습니다.”
아침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두 조손은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남진무는 신기한 듯 손자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흐뭇하게 미소를 지었다.
“네가 고생이 많았겠지만 이야기는 참 재미있구나.”
“네. 그렇기는 하죠.”
“무림에서 지냈던 이야기는 잘 들었다.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 있을 텐데, 그건 나중에 듣기로 하자. 우선 일찍 찾아온 용건이나 말해보거라.”
남하림을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께 공신이란 분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습니다.”
“공신이라면 해정, 그 친구를 말하는 것이냐?”
“네. 그렇습니다.”
남진무는 남하림이 그에 대해서 물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공신 해정은 이십오 년 전에 죽은 인물이었다.
“갑자기 그를 왜 알고 싶은 것이냐?”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구천신품을 만드신 분이라 해서요.”
“오, 그렇구나. 그동안 구천신품을 모으러 다녔으니 궁금하기도 하겠지. 무엇이 알고 싶으냐?”
“그분을 어떻게 만나셨습니까?”
“음…….”
남진무는 아주 오래전 일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 * *
“뭣들 하느냐?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빨리 가자!”
열 대의 마차.
마차 위로 남천의 표기가 펄럭였다.
두두두두두두-
거친 길을 달리던 남천표국의 짐마차들.
얼마를 달렸을까.
빠지직!
짐마차 바퀴축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꽈아아다아앙!
짐마차가 한쪽으로 무너지면서 굉음을 냈다.
선두에서 달리던 남진무는 표행을 멈추었다.
“어떻게 된 일이냐?”
“짐마차가 부서졌습니다!”
남진무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그렇지 않아도 제때 물건을 납품하려면 시간이 빠듯한데…….’
부서진 짐마차를 두고 갈 수도 없었다.
짐마차 한 대라도 빠진다면 손해가 막심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수리를 할 수 없겠나?”
“저어…… 죄송합니다. 축이 부러져서 목수가 아니면 고칠 수가 없습니다.”
“아…… 이런, 망했군.”
남은 짐마차에 옮겨 실을 자리가 부족했지만, 억지로 싣는다고 해도 무게 때문에 빨리 움직일 수 없을 터.
하지만,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던가.
곤란한 상황을 맞이한 그들에게 한 중년 사내가 다가왔다.
그는 곧바로 무너진 짐마차를 살펴보았다.
“이런, 마차 축이 무너졌구려. 혹시 이걸 고쳐주면 밥 한 끼라도 얻어먹을 수 있소이까?”
번쩍.
남진무는 귀가 뜨였다.
“이보시오, 이걸 고칠 수 있겠소이까?”
“부러진 축을 이을 수 있으면 간단하외다.”
“아아…… 부탁입니다. 도와주신다면 일 년 동안이라도 밥을 사 드리겠소이다!”
“좋소이다.”
중년 사내는 주위를 둘러본 후 한 자 정도 되는 나무를 찾았다.
슥슥슥슥.
그러더니 허리에 가방 안에서 나무를 깎는 칼을 꺼낸 뒤 빠르게 깎아내기 시작했다.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의 솜씨로 축을 연결할 부속이 완성됐다.
“뭣들 하시오. 모두 짐마차를 들어보시오.”
수십 명의 장성들이 한꺼번에 짐마차를 들어 올려 부서진 축의 부속을 빼냈다.
“허허. 조금만 더 힘을 내시오.”
휙휙휙.
그는 부러진 축에 연결된 부위와 바퀴까지 깔끔히 빼낸 뒤, 새롭게 만든 축의 조각을 밀어 넣었다.
데구루루-
한 손으로 바퀴를 돌리자 경쾌한 소리를 내며 빠르게 돌아갔다.
“이제 됐소.”
남진무는 단번에 짐마차를 수리한 그의 손을 덥썩 잡았다.
“하하하! 정말 고맙소이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군!”
“은혜는 무슨. 본인에게 밥 한 끼나 사주면 되겠소이다.”
“지금 우리가 표행을 빨리 가야 하는 처지라…… 그렇지. 바쁜 일이 없다면 함께 가는 게 어떻겠소이까? 오는 길에 푸짐하게 대접을 하겠소이다.”
시간도 없긴 했지만, 다른 마차들도 언제 사고가 날지 몰라 불안했다.
중년 사내가 동행해 준다면 큰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음…… 그러지요.”
“정말 고맙소이다. 은인의 성함은 어떻게 되는지?”
“해정이라 하외다.”
* * *
남진무와 해정의 첫 만남.
남진무는 그와 처음 만났던 그때의 사건 이후, 이야기를 계속 이었다.
“표행을 함께 가면서 그가 뛰어난 능력을 지녔다고 생각했지. 그래서 그에게 제시를 했다. 그도 받아들였어.”
작업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남진무가 부담한 뒤, 그가 만든 물건을 판매한 금액은 육 대 사로 나누기로 했다.
“그분이 상국을 떠나 구천마성에 간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워낙 뛰어난 장인이라고 소문이 난 것 때문이었다. 구천마성에서 공문이 날아왔거든. 그를 보내는 게 좋지 않겠냐는 서신이었지만…… 완전 협박이나 마찬가지였단다.”
“당시엔 어쩔 수 없었겠네요. 구천마성의 공문이라면.”
“그렇지. 워낙 강한 세력이라 그때 고민을 많이 했지. 근데 그 친구가 고민할 필요 없다면서 구천마성으로 가겠다고 하더군. 이곳에는 그의 제자들이 있으니, 사업에는 지장이 없을 것이라면서 말한 뒤 떠났다. 그게 마지막이었고.”
그날 이후.
남진무는 다시는 공신 해정을 보지 못했다.
그리고 구천마성이 무너지기 일 년 전.
그가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공신 해정과 남진무의 만남.
첫 만남이 정말로 우연이었는지, 아니면 해정이 일부러 접근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일부러 만나고자 했다면 분명 목적이 있었을 터.
하지만 오히려 도움을 주고 떠났을 뿐이 아닌가.
남진무와 공신 해정의 관계는 이것으로 끝이 났다.
“하림아. 그런데…… 그에 대해 다른 뜻이 있는 건 아니냐?”
“아닙니다. 구천신품을 만드신 분을 자세히 알고 싶었을 뿐이에요.”
“그러냐? 그가 살아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남진무는 그에 대한 그리움이 드는지 아쉬워했다.
한 시진 후.
남하림은 태남전을 나섰다.
공신 해정.
그 당시 그는 이미 창천주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목적 없이 남진무에게 접근할 이유가 없었다.
‘그가 접근했던 이유가 있을 거야.’
* * *
끼이익.
끼이익.
남하림은 눈을 감은 채 흔들의자에 몸을 맡겼다.
귀빈각에 들어선 후, 반 시진 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을 뿐.
타타탁!
그때, 귀빈각으로 빠르게 들어오는 발소리가 울렸다.
“안녕! 다들 뭐 하세요?”
신소소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소리쳤다.
“소소, 왔어?”
“네, 하림 오빠는요?”
그녀는 주위를 살피다가 정원에 있는 남하림을 보았다.
“유도 오빠, 저기서 뭐 한대요?”
“글쎄. 나도 몰라. 일찍 들어오더니 그때부터 계속 저러고 있어.”
“가봐도 되나요?”
“난 모르겠다. 한 번 가보든지.”
“네!”
신소소는 반대편 문으로 뛰어나갔다.
털썩.
그녀는 곧장 남하림의 옆에 붙어 앉았다.
“……지금 뭐 하는 거냐?”
남하림은 눈을 뜨며 옆을 보았다.
“뭐 하긴요. 같이 앉아 있잖아요.”
“어라, 자신감이 붙었는데?”
“에헤헤.”
신소소는 한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당연하잖아요. 어머니께서 인정하셨거든요.”
“어머니가? 뭐라고 하셨는데?”
“둘째라고 하셨거든요! 헤헷.”
“……흐미…… 신이 났군.”
“헤헤헤.”
신소소는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휙!
덥석.
그러더니 남하림의 팔을 껴안으며 붙었다.
“걱정이 있어요?”
“그래.”
“무슨 걱정인데요?”
꾸욱.
남하림은 반대편 손가락으로 신소소의 이마를 누르며 밀었다.
“니가 걱정이다.”
“뭐예요, 진짜. 내가 도울 수도 있잖아요.”
“후후후, 말이라도 고맙다. 도움이 필요하면 말할 테니 그때 도와주면 돼. 이번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쳇, 알겠어요. 그땐 꼭 이야기하세요.”
타앗!
남하림은 바닥을 차며 흔들의자를 밀었다.
휘이이익!
두 사람이 탄 흔들의자가 하늘 높이 솟구쳤다.
“우아아아아아! 재미있어요!!”
한편, 휴객실에서 그들을 보는 시선들은-
“두 사람, 참 잘 노네.”
“그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