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2. 염천을 지켜라
가주전으로 들어선 일행.
오랜만에 보는 얼굴들이었다.
제갈령이 그들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의 손에는 여전히 봉황선이 들려 있었다.
“어서들 오시게나.”
제갈령이 일행을 향해 고개를 짧게 숙였다.
“오랜만에 뵙는군요.”
남하림과 일행은 곧바로 포권을 했다.
‘호오…… 대단하군.’
남하림과 함께한 이들.
사제(四帝)라 했던가.
일황의 남하림은 물론 네 명의 무공도 대단했다.
‘벌써 이 정도까지 커버렸다니…….’
곁에 흐르는 무형기는 고수의 향기로 가득했다.
양천의 전인, 걸황 남하림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 일황사제는 중원 최고의 무인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일황사제와 함께 온 두 사람.
제갈령은 황보궁을 지나 탈혼마제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일행 중 한 명이 마교의 전대고수인 탈혼마제라는 사실을 그도 알고 있었다.
마교 전대 고수이긴 하지만 마교주를 능가할 수 없다고 여겼다.
이 또한 잘못된 생각이었다.
예상 밖의 상황들이 이어졌다.
‘탈혼마제가 이 정도의 인물이었던가?’
걸황 남하림의 곁에 있는 것만으로 변하는 것일까.
탈혼마제는 마교의 천마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상상 이상의 마인이 확실했다.
제갈령이 먼저 인사를 했다.
“처음 뵙겠소이다.”
“됐소. 난 걸황의 객이니 신경 안 써도 되오.”
탈혼마제는 시선을 돌렸다.
남하림과 동행 중이지만 타인의 일에 상관하지 않겠다는 뜻.
‘정말로 무림에 관여하지 않는군.’
시선을 돌린 제갈령은 곧바로 일행을 가주전 안으로 안내했다.
“들어가세나.”
* * *
가주전에 들어선 그들은 각자 자리에 앉았다.
제갈령은 한 번 더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대들이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정말로 기뻤네.”
스윽.
남하림이 손을 들었다.
“련주님, 도움을 주고자 온 건 맞습니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하고 넘어가야 할 게 있지 않겠습니까?”
“…….”
“그 물건을 한 번 봤으면 좋겠군요.”
“무척 급한 모양이군. 만나자마자 보여 달라고 하다니.”
“사실대로 말하면 그것 때문에 온 것입니다. 시작하기 전에 확실히 해두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대의 말이 맞네.”
스윽.
제갈령은 품 안에서 빗을 꺼냈다.
“이것이 구천신품이네.”
“주시지요.”
남하림은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제갈령은 아직 건네줄 생각이 없었다.
“무슨 말인가? 아직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았네.”
“선불입니다.”
“어허, 이게 무슨 장사도 아니고…….”
“장사라는 게 꼭 물건을 사고파는 것만은 아닙니다. 서로 원하는 것을 주고받는다면 그게 장사가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이지만, 선불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거래도 없을 겁니다.”
남하림의 어조는 강했다.
‘쯧, 장사꾼 놈들.’
아쉬운 사람은 제갈령이었다.
이미 갑과 을의 관계가 정해져 있었다.
“걸황, 이 물건만 챙기고 도망가려는 게 아닌지 어떻게 알겠나?”
“그럴 일은 없을 것입니다.”
“본인이 그대를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련주께서 그런 생각이시라면 이번 협상은 결렬입니다. 돌아가겠습니다.”
“…….”
남하림은 주저 없이 그대로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돌아섰다.
“하하하하! 결렬이라…… 그렇다면 구천신품을 얻지 못할 텐데. 그렇지 않은가?”
구천신품을 가지고 분위기를 반전시키려고 했지만.
상대는 남하림.
“당장 얻지는 못하겠지요. 시간이 걸리겠지만, 기다리죠.”
“그게 무슨 뜻인가?”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되었습니다. 이런 말은 하기에 죄송하지만, 창천에 의해 이곳은 멸문하지 않겠습니까? 그때 구천신품을 찾아가도록 하죠.”
“…….”
어이가 없었다.
창천에 의해 죽는 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돌려 말을 하고 있다.
제갈령은 남하림과 시선이 부딪쳤다.
‘정말로 돌아갈 모양이군…… 할 수 없군.’
그는 손에 든 빗을 내밀었다.
“……여기 있네.”
“고맙게 잘 받겠습니다.”
남하림은 제갈령에게서 빗을 받았다.
아홉 번째의 구천신품이 손에 들어왔다.
‘진짜군.’
빗 손잡이 부분에 붉은색 문양이 보였다.
“걸황, 그것은 아주 정교하게 만든 가짜가 아닌 진품이네.”
남하림의 입가에 웃음이 걸렸다.
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으니까.
“가짜를 만들어 나에게 줄 생각을 했다니. 기가 찰 일이었네.”
“그 일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미안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니 다행인가?”
스윽.
제갈령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선 한 가지 일은 일단락 지었다.
그에 따른 나머지 일을 처리할 차례였다.
오가련 사이에 일황사제가 왔다는 소문은 이미 퍼져 나갔을 것이었다.
“그대들은 이곳에서 쉬고 있으면 되네. 급한 볼일을 본 뒤 오지.”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볼일 보시지요. 돌아왔을 때 혹시 안 보이면 도망간 줄 아시면 됩니다.”
“…….”
능구렁이도 이런 능구렁이가 없다.
“도망을 가든지 말든지 알아서 하게. 그때는 다른 일은 모두 제쳐 두고 네놈만 따라가야겠지.”
“재미있겠군요.”
제갈령은 고개를 흔들며 내전에서 나왔다.
곧바로 수하들을 보내 오가련의 비상회의를 알렸다.
잠시 뒤.
오가련 소속의 세 문파 수장들이 모여들었다.
특히 모용세가 출신 모용동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제갈령은 창천이 접근한다는 사실과 그들의 힘이 예전 구천마성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염천의 힘 또한 강하지만, 이번 한 번이 아니라 계속해서 창천에서 공격해 온다면, 오가련은 버티지 못할 것이오. 결국 창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일황사제와 손을 잡고자 하는 바이오.”
모용동은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련주, 그들은 우리의 적이지 않소이까? 어떻게 함께할 수 있습니까?”
“…….”
제갈령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상관세가와 하후세가의 뜻은 어떠한지 물었다.
“모용 군장과 같은 뜻을 지닌 분은 없소이까?”
모용동과 달리 상관세가와 하후세가에서는 크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제갈령에 의해 구천의 존재를 알았다.
구천마제 또한 창천의 인물이라 했다.
중원 무림을 손에 넣었던 구천마성이었다.
오래전, 은하검인 유극지에 의해 무너졌다고 하지만.
창천이 존재하는 한 제이, 제삼의 구천마성이 나올 가능성이 많았다.
남궁세가의 멸문으로 오가련의 전력은 이미 반 이상이 줄어든 상황임을 모르지 않았다.
일황사제가 함께한다면 잃었던 사기에 좋은 영향을 줄 것이 확실했다.
거대한 적을 상대하기 위해 일시적이지만 동맹을 맺는 일도 많았다.
“당분간이라면 련주의 뜻에 따르겠소이다.”
“저 또한 같은 생각이외다.”
상관민과 하후양은 제갈령의 뜻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모용동은 여전히 기분이 불쾌했다.
하나 제갈세가까지 포함한 세 가문에서 찬성한 부분을 혼자서 반대할 순 없었다.
“모용 군장, 어떻게 하시겠소이까?”
“……련주, 이번만이외다.”
“알겠소이다. 이번 일만 끝나면 그들과 함께 지낼 일은 없소이다.”
모용동까지 의견을 모았다.
이제 남은 것은 융중산으로 다가오는 적을 맞이하는 것이었다.
* * *
호북성 양양 초입 마을에 일천 명의 무인들이 모여들었다.
‘후후후, 전부 모였군.’
단저는 수하들을 내려다보았다.
한 명 한 명, 수하들이 내뿜는 기세는 강인했다.
수십 년 세월 동안 중원 무림에 나오기 위해 수련한 이들이다.
‘염천 정도는 이들 반만 있어도 밀어붙일 수 있다.’
단저는 자신했다.
창천의 힘은 중원 최강이다.
아주 오래된 계획.
구천마제와 구천마성은 중원에 숨어 있는 구천의 힘을 끌어내기 위한 창천의 사전 움직임이었다.
계획대로 창천에 대항하는 세력들이 하나둘씩 중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든 것이 창천주님의 계획대로 흐르고 있다.’
구천제거계획.
구천 중에서 가장 먼저 사라질 곳은 염천, 제갈세가였다.
‘이 정도의 힘이라면…….’
수하들은 오로지 수련만을 해왔다.
단저도 마찬가지.
극강의 무공을 익혔다.
누구와 싸워도 이길 수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거침없이 당당하게 밀고 들어가, 단번에 염천을 정리할 것이다.
두우웅!
북소리가 울렸다.
두우웅!
단저는 선두에서 오가련의 총진영을 향해 움직였다.
파드드득!
창천군이 움직이는 순간.
한강 유역의 하늘 위로 수십 마리의 전서구들이 날아올랐다.
* * *
‘오는군.’
적의 수는 일천 명.
생각보다 많은 인원이었다.
오직 싸우기 위해 만들어진 일천의 창천군은 분명 강할 것이다.
창천과 비교하면, 구천마성의 힘조차 부족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오가련만으로 버틸 수 없다.’
창천 무인들보다 두 배의 인원이지만 그들을 막아내기엔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오가련이 무너진다면 곧장 융중산의 산문까지 밀릴 수밖에 없었다.
남은 염천의 힘으로 창천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
제갈령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창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염천의 무인들이 나올 수밖에 없다.’
다만 문제는 지금 쳐들어오는 창천의 무인들이 본진이 아니라는 것.
창천은 오만 무인으로 이루어진 구천 최고의 세력이었다.
이들을 잡는다고 해도 창천에서는 끊임없이 보낼 것이었다.
염천만으로는 계속해서 막아낼 수 없다.
이것이 오가련이 필요한 이유였다.
‘오가련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휘릭!
제갈령은 전서를 부관에게 전했다.
“염천이 움직일 것이다. 세가의 대광장에 모이도록 하라.”
“존명.”
부관이 곧바로 사라지고.
제갈령은 내전으로 향했다.
믿을 수 있는 희망은 그들뿐.
‘일황사제만이 염천이 살 길이라니.’
끼이익-
내전으로 들어서는 문이 열렸다.
제갈령은 순간 멈칫하며 밖으로 나오는 일행을 보았다.
‘걸황…….’
걸황의 명성에 맞는 황금빛의 걸복을 입은 남하림.
“때가 된 모양이네요.”
“맞네. 창천의 무인들이 일천 명이나 결집한 뒤 한강 유역으로 움직였다는 연락을 받았지.”
“그곳으로 가야 하는군요. 우리는 준비가 끝이 났습니다.”
“부탁하겠네. 염천도 함께할 것이네.”
“염천까지…….”
염천까지 나설 정도면 모든 힘을 보여준다는 뜻이었다.
“창천이 대단하긴 하네요. 일천 명을 상대하는데 염천의 힘까지 나와야 하는군요.”
“자네는 몰라. 창천의 힘은 지금까지 상대했던 것과 다르다.”
“정말 기대가 되는군요. 얼마나 강한지 빨리 만나보고 싶을 정도입니다.”
남하림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네 사람 모두 두려움보다는 강한 상대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더한 기대를 가지는 듯했다.
‘허어, 정말 싸움꾼들이군.’
일황사제에 대한 무림의 소문.
절대로 싸움을 피하지 않는 투신들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하림 형, 일천 명이라면 정말 재미있겠어요.”
“그러게 말이다. 빨리 창천 놈들을 만났으면 좋겠는데. 요즘 꽤 좋은 독을 많이 만들어 놓았거든.”
“무독아, 독은 웬만하면 안 뿌리면 안 될까? 괜히 신경이 쓰인다고.”
“괜찮아. 이미 모두 해독제를 먹었잖아.”
“언제? 우린 먹은 적이 없는데?”
“엥? 아, 그게 식사할 때 물에 타놓았거든. 말을 한다는 게 잊었다.”
“…….”
“야, 함부로 먹는 거에 독 뿌리지 마.”
* * *
융중산에서 내려온 일행은 한강 유역으로 빠르게 움직였다.
제갈령이 이끈 염천의 무인들과 함께였다.
한강 유역에 도착한 다음 날.
창천의 무인들도 도착을 했다.
단저는 한강 유역에 진영을 펼친 적을 주시했다.
오가련 소속의 무인들과, 그 뒤로는 염천의 무인들이 정렬을 했다.
‘피곤한 것들을 만들어놓았군.’
단번에 공격 명령을 내려야 했지만, 무작정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그들 앞에는 진법이 펼쳐져 있었으니까.
스으윽.
단저의 곁으로 삼십 대 초반의 청년이 다가왔다.
그가 전방에 펼쳐진 진법을 보며 괴이한 웃음을 지었다.
“크크크크. 별게 없습니다.”
“저것들을 파훼할 수 있겠는가?”
“총단주께서는 본인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군요. 제갈세가, 염천이 아무리 똑똑하다고 해도 창천뇌가에 감히 비교할 수 없습니다. 저들은 달빛 아래 반딧불입니다.”
“후후후, 심지독. 너무 자신감이 강한 게 아닌가?”
“킥, 총단주님, 자신감이 강한 게 아니라 사실을 말했을 뿐입니다.”
“좋아. 얼마나 자신이 있는지 보겠다. 파훼해라.”
진법으로 향하는 심지독의 팔자걸음에는 자신감이 넘쳐흘러 일견 건방지기까지 했다.
하지만 진법을 단번에 알아본 실력만큼은 진실.
‘팔괘(八卦)에 팔괘(八卦). 총육십사괘의 변화를 일으키는 진법이군.’
팔괘진조차 파훼하기 어려운 진법인건만.
제갈령은 육십사괘진법을 펼쳐 보였다.
자만하거나 무턱대고 들어선다면 절대로 빠져나갈 수 없는 절대사진.
‘크큭, 물론 복잡하게 만들수록 벗어나기 어렵지. 하지만 의외로 간단하게 파훼할 방법이 있지.’
진법 앞에 선 심지독은 주변을 살폈다.
팔괘의 건태이진손감간곤.
여덟 방향을 이어 걸어 놓은 선은 곧 괘다.
‘이 괘를 찾아 끊게 되면 파훼가 되는 법이지.’
어려운 것은 팔방이 시간이 변하면서 바뀐다는 것이었다.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방향을 읽어야 했다.
‘……찾았다.’
심지독은 팔방을 하나씩 찾아내며 창천의 무인들에게 명령했다.
“나무를 베라!”
건과 태를 잇는 괘를 없애야 했다.
쿠우우웅-
퍼어어엉!
“바위를 치워라!”
나무에 이어 두 번째는 바위.
창천의 무인들이 바위를 밀어냈다.
드르르르-
괘가 하나씩 끊어지며, 진법이 파훼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