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 제갈세가로
무림에서 구천의 역할은 중원 무림의 지배였다.
처음부터 구천, 즉 아홉 개의 세력이 함께 시작한 것은 아니었다.
구천은 서로 다른 이름으로 중원에 나타났다.
아홉 명의 강자들이 한 시대에 모였던 것.
그들은 싸우기보다는 화합을 택했다.
강한 세력을 지닌 이들이 모여 구천이라 명명했고, 그들은 무림을 서로의 분야에서 지배하기로 결정했다.
물론 구천의 화합이 영원할 것이라고는 서로 믿지 않았다.
그 일은 후대의 일이라 여겼다.
염천.
그들은 균천과 함께 정파 중원의 관리자였다.
많은 시간이 흘렸지만 염천 제갈세가는 나름대로 정파 무림을 관리하면서 이어져 내려왔다.
설렁.
백색 봉황선을 흔드는 인물.
제갈령은 중원 각지에서 들어온 전서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았다.
‘누군가 움직이고 있다.’
미세한 움직임이 중원 각지에서 포착되었다.
“어떤 놈들이 움직이고 있는 거지?”
휙휙!
중원에서 날아온 전서들이 살아서 움직이는 듯했다.
그의 손이 전서들을 바쁘게 정리하며 눈은 내용들을 읽어 내려갔다.
뚝.
한 번도 쉬지 않았던 제갈령의 손이 갑자기 멈추었다.
전서의 내용들을 간추리자 하나의 사실이 결과로 나타났다.
‘이런, 젠장…….’
신비 세력들의 움직이는 방향은 호북 융중산.
타악!
제갈령은 탁자를 내리쳤다.
‘어떤 놈들이기에…….’
현 무림의 상황에서 제갈세가를 공격해 올 세력은 어디인가.
‘은하궁은 아니야.’
뜻이 다르다고 하나 은하궁에서 제갈세가를 칠 이유는 아직 없었다.
‘주천도…… 아직은 아니지. 유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필요하다.’
주천도 아니었다.
‘설백진, 유천도 마찬가지. 그들은 은하궁을 상대하기 위해서 우리를 칠 여유가 없어.’
그렇다면.
남은 구천 중 유력한 곳은 하나.
창천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천마성이 무너진 후, 창천의 힘은 중원 무림에서 이십 년 동안 나타나지 않았었다.
‘큰일이다. 그들이 여기로 다가오고 있어. 우릴 가장 먼저 택한 거야.’
제갈령은 구천마제의 힘이 떠올랐다.
구천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던 세력은 없었다.
‘……오가련으로 그들을 막을 수 있을지 모르겠군.’
제갈령은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들이 창천이 맞다면?
염천 혼자 힘으로는 막을 수 없다.
창천의 힘이 옛날과 변함이 없다면 그대로 끝이었다.
제갈령은 동맹을 맺은 주천에게 연락을 띄워보기로 했다.
그들도 유천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염천의 힘이 필요할 테니까.
슥슥슥.
주천주 기성에게 보낼 전서를 빠르게 적어 내려가던 중.
‘……그자가 모르는 척한다면?’
제갈령은 입장을 바꿔 주천이라면 어떻게 움직일지 생각해 보았다.
그도 창천의 무서움을 안다.
전력을 다해 원군을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전력의 힘이 아닌 이상 창천에는 이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붓을 탁 내려놓았다.
결론은 정해져 있다.
원군을 보내주지 않을 것이다.
“차라리 경쟁자가 사라질 기회라 여기겠지. 망할.”
제갈령과 기성의 생각은 거의 비슷했다.
주천에서 원군을 보내지 않을 확률이 훨씬 많았다.
‘주천이 아니면, 은하궁밖에 없다는 것인가?’
미간을 찌푸리던 제갈령은 고개를 다시 좌우로 흔들었다.
은하검인 유극지는 도움을 줄 인물이 아니었다.
긴 시간을 무림맹에서 그와 함께했기에 잘 안다.
그는 창천과 혼자 싸우고자 하는 인물이었다.
‘젠장…… 아무도 없단 말인가?’
중원 무림의 문파들은 대부분 신무맹의 뜻을 따를 것이 분명했다.
염천을 도와줄 세력은 없었다.
기운이 빠지려는 순간.
한 사람의 얼굴이 생각났다.
‘걸황…… 양천의 전인.’
남하림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하림은 은하궁에 있다고 했다.
하지만 남하림은 남궁세가는 물론, 최근에 모용세가와도 부딪쳤다.
그와는 이미 벌어진 사이가 아니었나.
원군을 요청하면 과연 도와주러 올 것인가, 하는 고민을 할 필요도 없다.
“오지 않겠지.”
제갈령은 확신했다.
하지만.
남하림의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하나 있었다.
그는 품에서 손에 쥐어지는 작은 빗을 꺼냈다.
‘이것을 원한다면…… 오겠지.’
제갈령의 손에 들린 빗.
아홉 번째 구천신품이었다.
얼마 전에 알게 된 사실.
남하림에게서 받은 구천신품이 전부 가짜였다.
얼마나 당황했는지.
겨우 약관의 나이밖에 안 되는 인물에게 군사까지 지냈던 자신이 완벽하게 속았다.
‘하지만 이건 진짜다. 내가 직접 가지고 온 물건이니.’
남하림이 가짜를 만들어 주었다는 의미는, 그동안 모았던 진짜들은 그가 가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약은 놈. 능구렁이인 줄은 알았지만 이건 완전히 만 년 먹은 대왕 능구렁이다. 쯧.’
제갈령이 지니고 있는 구천신품은 결국 하나밖에 없었다.
“하아…… 걸황에게 도움을 청하면 오가련에서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군.”
남하림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방법이 없을 터.
적의 적은 아군이란 말이 있듯, 결국 그들은 걸황을 받아들일 것이었다.
슥슥.
제갈령의 손이 다시금 바빠졌다.
* * *
은하궁을 나선 지 이틀이 지났다.
중얼중얼.
입안에서 염불을 하듯 소리가 밖으로 나오지 않고 맴돌았다.
팽유도는 뒤를 돌아보았다.
‘대단하시군.’
하루도 빠짐없이 만마심공을 외우며 보행 수행을 계속했다.
무공의 열정은 나이와는 상관이 없었다.
배울 만한 행동이었다.
탈혼마제의 눈동자는 이미 탈마의 경지를 넘어선 지 오래.
그렇다고 해서 마기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순수한 마기가 더욱더 높아져 갔다.
성철각이 궁금한 듯 입을 열었다.
“부장, 이 정도의 내력을 지닌 마노라면 마교주와 붙어도 이기지 않을까?”
“마교주 천마도 탈마의 경지를 넘어섰어. 그와 끝까지 싸워보지 않았으니 확실한 것은 모르지. 뭐어…… 그렇다고 노인장의 무공이 약하다는 뜻은 아니야.”
“대단한 거구나.”
성철각이 달라진 시선으로 탈혼마제를 바라보았다.
“크하하핫! 천마와 나를 비교했느냐? 걸황, 어떻게 생각하느냐?”
“뭘요?”
탈혼마제는 눈에 힘을 주며 남하림을 노려보았다.
“천마와 내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 것 같은지 묻는 것이다.”
남하림은 여기서 천마와 싸워본 적이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정확한 대답을 듣고 싶습니까?”
“그렇다.”
“실망하지 않을 거죠?”
“…….”
“안 듣는 게 좋지 않을까요? 괜히 마음 상해서 울적할 수도 있을 텐데…… 요.”
남하림의 표정과 말투에 탈혼마제는 이미 주눅이 든 듯했다.
남하림은 그를 보면서 씨익 웃었다.
“진짜로 말해줄까요?”
탈혼마제는 왠지 듣고 싶지 않아졌지만, 이왕 내뱉은 말 듣지 않을 수 없었다.
“말해봐.”
“노인장이 원한다고 하니 말해주겠어요. 두 사람이 싸운다면……!”
남하림은 잠시 말을 멈추고는.
긴장한 탈혼마제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천마가…….”
“허…… 천마가 이길 것이라고?”
천마란 단어가 나오자 아쉬운 표정이 바로 나왔다.
“이기지 못하죠.”
“……어엉?”
탈혼마제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방금 뭐라고 했느냐?”
“난 한 번 했던 말은 두 번 안 합니다아-”
“이 자식이…….”
황보궁이 얼른 나섰다.
“대형의 말씀으로는 마노께서 이길 거라고 하시네요.”
“맞지? 꼬맹이 너도 그렇게 들었지?”
“네.”
불끈.
탈혼마제는 손을 꽉 쥐었다.
“마노, 축하합니다. 열심히 하시더니 성과가 나오네요!”
“오우, 전 마노께서 이길 줄 알았습니다. 이젠 마도제일의 고수시겠는데요?”
팽유도와 당무독은 물론, 다른 사람도 한마디씩 던졌다.
휘익!
탈혼마제는 먼저 걸어가는 남하림을 향해 소리쳤다.
“정말이냐?”
스윽.
남하림은 손을 들어 올렸다.
천마와 싸워 이길 수 있다는 뜻.
탈혼마제는 눈물이 글썽거렸다.
이유? 그건 그도 몰랐다.
오랜 세월 동안 마음 한구석에 서러움이 있었는가 보다.
가슴이 시원하게 뚫린 듯했다.
“걸황, 고맙다.”
밉상이어도 그에게는 은인과도 같은 존재였다.
“말로만 하지 마세요.”
“저 자식이!”
* * *
휘이익.
일행 앞에 갑자기 걸비가 모습을 드러냈다.
“걸황님을 뵙습니다.”
“무슨 일인가요?”
걸비가 나타날 때마다 무림에 늘 큰일이 생겼다.
‘이번에는 무슨 일일까…….’
심심하던 찰나에 궁금했다.
“제갈세가에서 온 전서입니다.”
‘제갈세가라면…… 제갈 군사가 왜?’
전혀 예상치 못한 곳.
그가 전서를 보낼 리가 없었다.
최근에는 오가련 소속의 모용세가와도 껄끄러운 사이였다.
“한번 보죠.”
남하림은 전서를 받았다.
걸비가 제갈령의 서신을 받아왔다는 것은 중요한 사항임에 틀림없었다.
“이걸 어떻게 받아왔나요?”
“오가련 련주 제갈령이 직접 친서를 보내면서 걸황이 가장 좋아할 내용이 적혀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군요. 수고했어요.”
남하림은 서신 봉투에서 서신을 꺼냈다.
내용은 길지 않았다.
간단하게 적힌 글.
남하림에게 중요한 내용은…….
‘……찾았다. 구천신품이 그자에게 있었어.’
결국은 구천신품 전부의 행방을 알게 되었다.
남하림은 옆에 선 이휘연에게 서신을 보여 주었다.
그다음 차례대로 전달했다.
서신의 제안은 거부할 수 없는 것이었다.
“부장, 갈 수밖에 없을 것 같군.”
“그러게요. 이런 것으로 제갈 련주가 거짓말을 할 사람은 아니잖아요.”
창천의 전인을 찾기 위한 방법은 이제 구천신품밖에 없었다.
팽유도는 당연하게 손을 내미는 탈혼마제를 말끄러미 보다 서신을 건네주었다.
“우리들에게 오가련을 도와달라고 하는 것을 보니 급하긴 급한 모양인가 봐요.”
“제갈세가인 염천을 도와줄 세력이 없다는 뜻이겠지.”
당무독은 단번에 상황을 파악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우리한테 연락을 했겠어? 안 그래?”
“무독의 말이 맞아. 제갈 련주가 할 수 없이 구천신품으로 최후의 방법을 쓴 이유지.”
“흐응, 부장은 이미 결정을 했구나?”
“내키지는 않지만 구천신품을 찾아야 하지 않겠어?”
“비밀리에 움직이는 세력들이 창천일 거라고 하는데. 설마 창천의 전인이 나타난 것은 아니겠죠?”
“숨어서 사는 인물이라 밖으로 나오지 않을 거야.”
“부장, 우리 계획은?”
거대한 싸움터에 무작정 갈 수 없었다.
대략적인 큰 그림은 남하림이 정해주어야 했다.
“일단 제갈 련주를 만나야지. 일의 대가는 선불로.”
“나중에 끝나고 준다고 하면?”
“결렬. 우린 협상을 한다는 전제하에 만나는 거야. 구천신품이 누구에게 있는지 안 것만 해도 수확이지.”
“알겠어.”
“그는 창천의 공격을 막아달라고 할 거야. 이번 기회에 창천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보는 것도 좋을 것 같고.”
남하림이 계획의 틀을 잡았다.
그다음은 당무독의 차례.
남하림의 전체적인 계획에서 세부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일은 늘 당무독이 맡았다.
일행은 남양성으로 가던 발길을 돌려 융중산으로 방향을 틀었다.
* * *
중원 무림에서 가장 머리가 뛰어난 세가는 단연코 제갈세가였다.
그래서인지 중원인들은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같은 십대세가에 비해 무공이 약한 편이라 생각하는 것.
하지만 제갈세가의 무공은 절대로 약하지 않았다.
중원 무림에서 제갈세가의 무력을 제대로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을 만큼.
만약 그들의 진정한 힘을 보았다면 중원 무림은 그들을 남궁세가의 이름보다 위에 올려놨을 것이었다.
무공뿐만 아니었다.
뛰어난 머리로 어떠한 진법도 완벽히 펼칠 수 있었다.
침입자들은 진법을 뚫지 않는 이상 융중산에 오를 수 없었다.
“저놈들은……?”
오가련 묵천군 소속의 무인.
상관세가 출신의 상관중이 한강 유역으로 들어선 일행을 노려보았다.
일황사제라 불리는 개방의 다섯 인물과 두 명을 합한 일곱 명의 일행이었다.
“간이 부은 놈들이군.”
대단한 명성을 지닌 일행이었지만 상관중은 저들이 못마땅할 뿐이었다.
하지만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그들의 기세가 엄청났다.
오가련 묵천군의 수하들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물러나고 있었다.
“멈춰라!”
상관중은 내력을 끌어 올리며 일행을 향해 소리쳤다.
“그대가 이들의 수장이오?”
상관중을 향해 다가선 인물.
그의 등에 묵흑반도가 보였다.
‘도제…….’
상관중 또한 도법을 익힌 무인.
도제 팽유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은 묵천군의 수장 상관중이라 한다. 그대가 도제인가?”
“맞소이다. 상관세가의 천명도(千鳴島)가 무림의 일절이라 들었소만.”
상관중은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가 바로 사라졌다.
“그대들은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가?”
“오가련의 련주께서 걸황을 뵙고자 했소.”
‘련주께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왜 미리 이야기를 하지 않았지?’
제갈령은 한강 유역에 진을 치고 있는 수하들에게 일부러 걸황을 만나고자 한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만약 그들에게 언질했다면 반대하는 자들이 사전에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다.
팽유도는 그에게 다시 말했다.
“제갈 련주께 우리의 말이 맞는지 확인하시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오. 련주께서 그대들을 불렀다면 맞겠지요. 세가로 본인이 안내를 하겠소이다.”
“고맙습니다.”
상관중은 남하림 일행이 제갈세가로 올라가는 동안, 오가련 소속의 다른 인물들과 시비가 붙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호위했다.
융중산 산문 입구에 제갈세가의 정문이 세워져 있었다.
정문 위사들이 앞에서 다가온 상관중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군장님, 오셨습니까?”
“고생이 많군. 안으로 들어가서 소식을 전하게. 일황사제가 정문에 기다린다고.”
“알겠습니다!”
정문 위사 하나가 다급히 뛰어나갔다.
‘일황사제가 왔다……!’
적이지만 한 번쯤 꼭 보고 싶었던 인물들.
안으로 연락을 넣었던 정문 위사는 일각 정도 지난 후 정문으로 되돌아왔다.
“련주님께서 곧바로 만나겠다고 하셨습니다.”
“잘됐군요. 가시죠.”
일행은 가주전이라 적힌 건물로 들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