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3. 걸황
탈혼마제의 마기.
전방을 향해 천천히 걷는 걸음 하나하나에서 마기가 물밀듯이 흘러나왔다.
저벅. 저벅.
그의 앞을 막아선 일천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
단 한 명의 기세이건만.
누가 먼저 나갈까 눈치를 볼 뿐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크하하핫! 겁이 나는가? 검황의 가문. 남궁세가가 완전히 개잡놈의 집안으로 바뀌었군.”
“당신…… 은…… 누구지? 늙은이가 말을…… 함부로…… 하는군.”
남궁양의 목소리가 떨렸다.
“크크큭, 내가 누군지 알려주면 놀랄 텐데…… 괜찮을까?”
“뭣들 하느냐? 창궁검진을 펼쳐라!”
“옙!”
휘이이익-!
타앗!
일백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이 탈혼마제를 포위하며 검진을 펼쳤다.
“크크크큭, 이것이 남궁세가에서 자랑한다는 창궁검진이라는 것인가? 별거 없구먼.”
다른 무인도 아닌 절대고수 탈혼마제의 눈에는 그저 인원들을 뭉쳐놓은 것밖에 보이지 않았다.
“늙은이가 말이 많다!”
검진은 탈혼마제를 중심으로 돌면서 정신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크크크, 애들 장난 하는 것도 아니고…….”
슈우우욱-
흡성대공을 펼치자 양손에 한 명씩 끌려 왔다.
“으으으악!”
탈혼마제의 손에 잡힌 채 비명을 지르는 두 사람.
“창궁발진!”
남궁양의 명에 검진 속에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타아앗!
채애애앵-!
열 개의 검이 탈혼마제의 가슴과 목을 향해 뻗었다.
마동풍광(魔凍風光).
양손을 가슴으로 끌어당겼다가 양옆으로 뻗는다.
마기가 사방으로 퍼져 나갔다.
쏴아아아아아아아-
거센 바람과 함께 차가운 눈보라가 휘몰아치면서, 시야가 확보되지 않을 정도로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커어억!”
“앞이…… 안 보여……!”
마기의 짙은 한기가 단번에 열 명을 덮쳤다.
털썩!
한 번 펼친 공격에 열 명의 무인들이 명을 달리했다.
탈혼마제는 기분이 찢어지는 듯 좋았다.
“크하하하하하핫! 이런 기분은 정말 오랜만이로다!!”
부우우웅-
탈혼마제의 신형이 허공으로 뛰어올라 검진의 뒤에 내려앉았다.
슈우욱-
파아아아아앙-!
또다시 한 손으로는 흡성대공을, 다른 한 손으로는 마동장(魔凍掌)을 휘둘렀다.
퍽! 퍽! 퍽! 퍽!
“아아아아악!! 괴물이다!”
단번에 검진이 깨지면서 남궁세가 무인들이 죽어나가기 시작했다.
‘이리 잔인할 수가…… 마동장이 틀림없다……!’
아수라장 속에서 남궁양은 상대가 펼치는 무공의 정체를 알아챘다.
“마동장이라면…….”
마교의 전대 마인이 확실했다.
‘맙소사…… 탈혼마제……!’
천마에 버금갔다는 마교 최고의 마인.
그 괴물이 맞았다.
“저자가…… 왜? 왜 이들과 같이 움직이지?”
남궁양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콰아아앙!!
이번에는 후방에서 폭음 소리가 터졌다.
걸협오성의 도천걸 팽유도.
스걱-
그와 함께 검을 휘두르는 이휘연의 모습도 보였다.
두 사람뿐만 아니었다.
당무독의 양손에서 수십 개의 비침과 비검기들이 하늘을 가득 메웠다.
차라리 검진을 펼치지 않았다면 도망을 치는 게 더 쉬웠을 것이다.
검진을 펼친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오히려 당무독의 비침과 비검기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아아아악!”
“커어억.”
시간이 지날수록 수하들의 비명은 점점 커져갔다.
‘망할……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믿기지 않는 상황을 직접 보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론 악몽을 꾸는 것 같았다.
콰아아아앙!!
강룡십팔장이 사방으로 떨어졌다.
‘미친…….’
그냥 미쳤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후개 남하림의 무위는 남궁세가에서 상대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끝났다.
남궁세가의 명예를 위해 이들을 죽인 후, 새로운 세가를 재건하고자 했던 계획인 허황된 꿈임을 이제야 알았다.
스윽-
남하림은 서늘하게 웃으며 남궁양의 앞에 내려섰다.
“제삿날은 우리가 아니라 남궁세가가 되겠군요.”
“…….”
“난 정파라고 해서 봐주는 거 없소이다.”
슈우우욱-
만 근의 힘이 담긴 남하림의 일장이 남궁양의 얼굴에 쏟아졌다.
쿠우우웅!
남하림은 정말로 인정을 베풀지 않았다.
송양지인(宋襄之仁).
남하림은 그 고사성어를 가장 싫어했다.
성격상 뒤가 찝찝한 것이 싫었다.
한 번 뻗은 일장에 남양궁은 머리가 터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아아아악!!”
비명이 터져 나오며 목숨이 끊어졌다.
남궁세가 일장로 남궁양의 죽음을 시작으로, 남궁세가는 점점 멸문의 문턱에 가까워졌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아니었다.
남궁세가.
수백 년 동안 중원 무림의 제일검가였던 그들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질 위기였다.
‘차라리 가만히 있었다면 멸문은 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남궁세가의 장로들은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
최선을 다해 싸우는 것만이 그들 스스로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남궁세가의 제자들이여. 오늘이 마지막이다. 죽어서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마음껏 싸워라.”
“와아아아아아-!”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마지막까지 기운을 뿜어냈다.
“하하…… 여전히 자존심을 버리지 않는군요. 남궁세가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목숨은 중요하지 않는 듯했다.
부우우웅-
남하림은 허공을 뛰어오르며 양손에 양천의 무단을 끌어당겼다.
그러자 두 개의 공간이 울렁거렸다.
두 갈래로 나뉜 원형 황금 기.
하늘에서 태양이 떨어지는 듯했다.
우우우우우우웅-
세상이란 공간.
그 안에서 공명음이 울부짖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앙!!
퍼어어어어어어엉!!
남궁세가의 진영에 떨어진 두 번의 굉음.
그리고…….
남궁세가는 완전히 전멸했다.
중원에서 사라진 남궁세가.
그들이 무림에 새롭게 나오기까지 무려 백오십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야 했다.
* * *
십천주는 머리가 아팠다.
구천마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정말 주군이 맞는가.’
의심이 들 수밖에 없는 상황.
구천마제임을 알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만나보면 알 것이었다.
그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어둠이 짙었다.
호지곡.
‘여기에 주군이…….’
누구도 알지 못하는 장소.
구천마제와 십천주가 처음 마주했던 곳이다.
만나기로 한 자시(子時)가 되었다.
‘올 때가 되었거늘…….’
휘이이잉-
잔잔했던 주변에 갑자기 한 줄기 바람이 불었다.
‘헉.’
십천주는 뒷목덜미가 뻣뻣해졌다.
뒤를 잡힐 때까지 전혀 인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돌아보려고 했지만 본능적인 두려움이 밀려왔다.
“수종, 언제부터 겁이 많아졌지?”
‘수종……!’
십천주의 아명.
어린 시절의 이름은 오직 한 사람에게만 가르쳐 준 것이다.
‘내 이름을 안다는 것은 주군, 구천마제가 틀림없다.’
십천주는 천천히 돌아섰다.
‘허어어억.’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
사내가 누구인지, 십천주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당…… 신은……!”
“허허, 당신이라니…… 수종, 미쳤군. 내게 당신이라고 했나?”
털썩!
십천주는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한 번은 넘어가지. 뜻밖의 얼굴이라 믿을 수 없었을 테니.”
“…….”
십천주는 조용히 그에게 물었다.
“주군, 송구하지만 한 가지 여쭙도록 하겠습니다. 창천지한(蒼天之恨)이 무엇인지요?”
“천하멸문(天下滅門).”
쿵!
바닥에 십천주의 머리가 닿았다.
“주군을 뵙습니다.”
“이제야 나를 믿는군.”
“죄송합니다. 은하궁주께서 주군이라고 하시는데 어찌 단번에 믿을 수 있겠습니까?”
“하하하하! 그건 자네 말이 맞아. 하지만 수십 년 동안 본인 곁에 있었던 자네가 못 알아보다니 섭섭할 뿐이군.”
“만약 다른 인물이었다면 쉽게 믿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한때 무림맹주이자 은하궁주의 신분이지 않습니까. 지금도 믿기지 않습니다.”
“믿기지 않겠지. 이해한다.”
“…….”
십천주는 궁금했다.
두 사람만의 암호를 대답했지만, 더욱더 명확한 믿음이 필요했다.
“대혼술법이십니까?”
창천의 전인에게는 한 가지 특이한 재능이 있었다.
대혼술법.
상대와 영혼을 바꿀 수 있는 술법을 펼칠 수 있었다.
청천의 전인은 수백 년 동안 대혼술법을 펼치며 끊임없이 후대로 내려왔다.
십천주에게 그의 겉모습은 중요하지 않았다.
창천의 전인이라는 사실만이 중요했다.
“주군. 어떻게 된 일이었습니까?”
“후후, 그날이었다.”
유극지의 입가에 차가운 웃음이 흘렀다.
이십 년 전.
마지막 결전의 승패를 짓기 위해 두 사람이 만났다.
구천마제는 육체가 훨씬 우월한 유극지를 차지할 계획을 곧바로 세웠다.
“주군. 그날…… 유극지와…… 죄송하옵니다. 아직 습관이 되지 않아서입니다.”
“이해한다. 나도 가끔씩 동경을 보면 놀라곤 하니까.”
십천주의 시선은 단 한 번도 유극지, 구천마제의 얼굴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술법이 성공했습니까?”
“성공했지. 대혼술법은 한 번 걸린 이상 빠져나갈 수 없다. 하지만……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다.”
‘실패를 했다는 말인가?’
“유극지, 그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일단 영혼을 바꾸는 것에 성공하는 듯했지. 하나 그가 계속해서 저항했다.”
“아…….”
두 영혼이 부딪히는 과정에 대해 십천주 또한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성공했다. 완벽히 그를 제압했기에 자네를 부른 것이다.”
“감축드립니다. 이번에는 너무나 대단한 인물이 되신 걸 축하드립니다.”
“후후, 축하까지야.”
“주군께서는 유극지의 기억을 지니고 계십니다. 그가 곧 주군이시면 이미 천하는 주군의 손에 들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아직 멀었다. 진정한 천하가 내 것이 되기에는 구천이 남아 있으니. 그놈들을 모두 사라지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하라고 말할 수 없다.”
‘주군의 말씀이 맞다. 항상 구천의 전인들을 죽이고자 하신 분이시니.’
그에 대한 티끌만 한 의심까지 사라졌다.
십천주는 완전한 믿음을 가졌다.
‘이제야 믿는군. 내가 유극지가 아닌 구천마제임을…….’
유극지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이십 년 전.
구천마성이 무너지던 날.
유극지는 구천마제와 마주쳤다.
둘 중 한 명은 죽어야 하는 상황.
서로 무공으로 승패를 겨루었다면 유극지가 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구천마제는 다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창천의 전인.
유극지는 수백 년 동안 불멸의 존재였던 창천의 비밀을 알고 있었다.
‘난…… 구천마제가 대혼술법을 준비하며 기다리고 있을 줄 알았다.’
대혼술법에 한 번 걸리면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다.
그리하여 유극지는 그의 술법에 대한 대비책을 완벽하게 익혔다.
구천마제가 눈치를 채지 못하도록 대혼술법에 걸리는 것처럼 연기하여 그를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의 혼이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 곧바로 가두었다.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려고 했지만, 상대는 전 무림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던 창천의 영혼.
구천마제의 혼 역시 강했다.
결계를 치며 유극지의 혼과 대등하게 싸우면서 함께 공존했다.
결국 구천마제의 혼이 사라지지 않았고, 이십 년간 한 몸에 두 개의 혼이 존재하게 되었다.
가끔씩 며칠 동안 구천마제의 혼이 문득 깨어날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빠르게 유극지의 혼으로 제압했지만, 앞으로 상황이 어떻게 변화할지는 그로서도 알 수 없었다.
유극지는 만일을 위해 창천만큼은 직접 자신의 손으로 지우고 싶었다.
구천이 전부 무림에 나온 이상, 이제 움직일 시기였다.
“십천주, 이제는 은하궁을 쳐야 하지 않겠는가?”
“주군, 굳이 먼저 은하궁을 칠 이유가 있겠사옵니까?”
“만일을 위해서다. 아직 머릿속에 유극지의 혼이 남아 있으니.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
“아…… 알겠습니다. 주군의 명을 받들겠습니다.”
십천주는 대답을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그런 일은 예전부터 창천에서 해왔던 일이었다.
“십천주,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군.”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창천에서 하던 일이니 오히려 화를 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십천주. 아직도 상황을 판단하지 못하는군. 창천에게 내 정체를 밝히지 않았다. 그곳에도 구천의 인물이 숨어 있으니까. 그놈들에게 내 정체를 밝혀야 한다고 보는가?”
“송구하옵니다. 소인이 그런 것까지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분간 창천에게 비밀로 할 것이다. 최소한 은하궁 정도를 지워야 창천에게 밝힐 수 있지 않겠는가.”
“주군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은하궁에 대해 알려주겠다.”
스윽-
유극지는 한 장의 종이를 십천주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은하궁의 본진이 그려져 있는 지도.
“이곳이 은하궁이자 균천의 진정한 본진이다. 여길 치면 정주에 있는 은하궁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다.”
단 한 번도 알려지지 않았던 균천지.
십천주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나타났다.
“주군, 이것이라면…… 단번에 균천지를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큭, 내가 없어도 되겠지? 공격 날짜는 다가오는 초하룻날로 정하도록.”
“존명, 주군께 승리의 서신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고개를 숙인 십천주.
그리고 그를 내려다보는 유극지의 입가에 미소가 나타났다.
* * *
남궁세가의 멸문.
걸협오성을 죽이려고 했던 이천 명의 남궁세가 무인들이 모조리 전멸당했다.
이젠 어디에서도 걸협오성은 물론, 개방을 건드리지 못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원 무림은 다른 사실에 놀랐다.
중원에 새로운 무림맹이 나타난 것.
신무맹.
곤륜파를 제외한 구파일방과, 중원세가에서 하북팽가, 사천당문, 황보세가, 산동악가, 검문, 환영각이 가입했다.
신무맹은 진정한 무림 문파의 연합이라 할 수 있었다.
신무맹이 새롭게 세워진 장소는 하남의 남양성.
중원은 신무맹이 세워짐에 따라 한 가지 궁금증으로 시끌시끌했다.
과연 신무맹의 맹주는 누가 맡을 것인가?
하지만.
아직 누구라고 확정 지어진 것은 아니어도, 중원 무림인들 또한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신무맹을 만든 이들이 누구인지 알게 되었으니까.
“걸협오성이 무림맹이 와해될 줄 알고 중원 무림을 위해 미리 신무맹 계획을 세웠다고 하더군.”
“오호…… 그게 사실인가?”
“그렇다는군. 남양성에 이미 걸황께서 당신의 자금으로 신무맹을 짓고 계셨다고 하더라구.”
“역시…… 걸황이시구만. 그분이 신무맹을 만드셨다면 당연히 맹주가 되셔야지 않겠나?”
“아직…… 나이가 어리시긴 한데…….”
“허어. 이 사람이.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걸황께서는 나이와는 무관한 분이시거늘. 그리고 내가 들어 보니 신무맹의 정책에 대한 결정은 다른 방법이라고 하더구만.”
후개 남하림.
중원 무림인들은 어느새 그를 가리켜 걸황이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