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 수군
장강수로채 총채주 비진독은 이빨을 갈았다.
유유히 떠나가는 한 척의 배.
‘후개. 내가 이대로 포기할 줄 아느냐?’
그들이 가는 방향에 아직 십여 척의 배가 남아 있었다.
“빈 당주, 서량채와 후영채에 전서를 띄워라. 무조건 그놈들이 타고 있는 배에 붙지 말고 화포로 공격해서 폭파시키도록 전해라.”
“…….”
빈구삼은 대답을 하지 않고 비진독을 유심히 보았다.
‘후개가 이놈은 이제 내력이 없다고 했지?’
후개가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다.
정말로 총채주가 내력이 없다면?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원한을 풀 수 있다!
씨익.
빈구삼의 입가에 싸늘한 웃음이 지어졌다.
싸한 기운이 다가왔다.
비진독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 자식이…… 왜 이런 웃음을?’
알 수 없는 미소에 기분이 나빴다.
비진독이 빈구삼을 향해 노기를 드러냈다.
“빈 당주, 내 말이 들리지 않는 모양이지?”
“잘 들려.”
단번에 반말이 나왔다.
“뭣이…… 이놈이 어디서!! 죽고 싶은가?”
“크크크, 내력도 없는 놈이 나를 죽인다고?”
빈구삼은 손을 뻗어 그의 가슴을 쳤다.
툭.
가볍게 친 것이지만 빈구삼의 주먹에는 내력이 실려 있었다.
‘어억!’
비진독은 가슴에 닿은 충격에 몸이 휘청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크크크큭, 이제 아무것도 아닌 놈이…….”
“……!”
비진독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내력이 없다고 해도 너무 쉽게 쓰러졌다.
비진독은 다시 벌떡 일어나면서 주위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뭣들 하느냐?! 이놈을 죽이지 않고!”
하지만.
비진독이 계속해서 소리를 질러도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명을 따르는 수하들은 한 명도 없었다.
“크하하핫! 나에게 이런 일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비진독은 개인의 영달을 위해 수하들은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는 자였다.
“이 모든 게 당신이 스스로 좌초한 일이다!”
“네놈이 나를 죽이려고…….”
“크, 당연하지 않겠소? 오늘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거늘. 하늘의 뜻이외다!”
스르르릉-
빈구삼은 도를 뽑았다.
“총채주, 그만 떠나시구려.”
털썩!
비진독은 무릎을 꿇었다.
내력이 없는 지금, 빈구삼을 이길 방도는 없다.
그렇다면 구차하더라도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
“빈 당주…… 한 번만…… 목숨을……!”
“이야, 방금까지 당당했던 모습은 어디로 갔소이까?”
하나 빈구삼은 비진독을 살려둘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휘이이익!
양손으로 검 손잡이를 잡은 그가 비진삼의 목을 향해 내리쳤다.
스걱-
깨끗하게 잘려 나간 비진삼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크크크큭, 뭣들 하느냐? 이놈을 강물에 던져라!”
풍덩.
빈구삼의 명에 따라 비진독의 목과 몸뚱이가 장강에 던져졌다.
“망할 놈…….”
강물에 떠내려가는 목 없는 시신.
휙!
빈구삼은 뒤로 돌아섰다.
“본인의 행동에 불만이 있는 놈은 나와라.”
“없습니다. 저희들은 당주님을 따를 것입니다.”
“고맙군. 이 시간 이후 본 수채는 비상시국에 들어간다. 장강수로채 소속 이십사 채의 모든 채주들에게 연락을 돌린 뒤, 새롭게 총채주를 뽑을 것이다.”
빈구삼은 장강수로채 소속의 채주들에게 전서를 보내기로 결정했다.
‘음…… 이번 기회에 그의 잔존 세력을 치우는 게 좋겠지?’
분명 채주들 사이에서도 비진독과 친분이 깊은 인물이 있었다.
그들 중에서도 서량채와 후영채가 그와 가까운 사이였다.
‘이들은 차라리 없는 게 좋겠지.’
빈구삼은 두 채주들에게 따로 서신을 보냈다.
#NAME?
만일 그대들이 걸협오성을 잡을 수만 있다면 천사회의 천주님께 큰 후사를 받을 것이오.
빈구삼은 서신 내용에 후개와 걸협오성이 타고 있다는 내용을 강조했다.
‘후후후. 이번 일만 잘 된다면 장강수로채는 내 것이 될 것이다.’
빈구삼은 웃음이 지워지지 않았다.
후개를 잡든지, 아니면 두 채주가 죽든지.
그에게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장강을 지나고, 어느덧 안휘성으로 들어섰다.
급변한 소문들이 하루에도 서너 번 중원 무림에 퍼져 나갔다.
무극검신공을 두고 강소성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일차 공격에서는 천사기용대만을 보냈던 천사회였다.
하나 동문상국의 대상 부대에 완패를 당한 뒤, 천사회는 공식적으로 동문상국에 선전포고를 했다.
#NAME?
천사회의 선전포고가 미치는 여파는 강했다.
선전포고 직후, 동문상국은 인근한 무림 문파와 세가에 원군을 요청했다.
하지만 강소성 주위 문파의 대부분은 오가련과 연관되어 있는 문파와 세가들이었다.
“허, 본 상국에게 도움을 줄 곳이 없단 말이오?”
“국주님, 송구하옵니다. 본 상국과 연관된 무림의 문파들은 오가련의 지부들이거나 연관된 세가들이 많습니다.”
“흐으음.”
상국주 손장의 표정이 굳어졌다.
용병왕 역위천이 있으니 더 이상 큰일은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천사회가 본격적으로 선전포고를 할 줄은……. 내가 잘못 생각한 모양이군.’
무극검신공을 가지고 있으면 언젠가는 이를 익힐 수 있는 인물이 상국 안에서 나올 거라 여겼다.
하지만 상국주는 무림의 생리에 대해 착각했다.
손해를 최소한으로 하는 상국과 달리, 무림 세력은 명분을 더 중요시한다는 사실을 간과한 것.
괜한 욕심을 부린 듯했다.
욕심과 탐욕의 차이는 종이 한 장의 두께라고 할까.
기약 없는 욕심에 많은 사람들을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손장은 지금껏 동문상국을 이끌면서 순탄한 운영을 해왔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모두 얻을 수 있었다.
하나 무림은 아니었다.
내 것이 아닌 것에 욕심을 가지는 것이 바로 탐욕이었다.
동문상국의 적은 천사회뿐만이 아니었다.
오가련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남궁세가의 남궁요가 죽자, 남궁세가는 전력을 다해 역위천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남궁세가 가주 남궁강은 동문상국을 향해 출사표를 던졌다.
그와 동시에, 오가련의 련주 제갈령 또한 공식적으로 공표했다.
무극검신공은 동문상국에게 더 이상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생존이 달린 문제가 바로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 * *
남하림은 걸비로부터 동문상국 주위로 일어나는 소식들을 계속해서 전해 들었다.
“동문상국을 도울 수 있는 곳이 어디 있을까?”
“대형, 우리 황보세가가 있습니다.”
“고마워. 생존이 달린 일이라 강요할 수는 없겠지만. 연락은 해볼게.”
“네, 대형.”
팽유도는 무림대사전을 펼치면서 여러 문파들을 찾기 시작했다.
“하림 형, 산동악가에도 연락을 해보는 게 좋지 않을까?”
“음…… 연락은 해봐.”
“응. 그리고 환영각에는 철각 형이 미리 연락했어요.”
사전에 연락을 한 곳은 개방 안휘성 총타와 강소성 총타, 그리고 환영각이었다.
“황보세가와 산동악가에서 도움을 준다면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 같아.”
당무독은 이들이 오면 천사회와 오가련을 막기에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우리 부장이 가고 있잖아. 그것부터 끝난 거야. 하하하!”
당무독은 자랑스럽게 웃었다.
“맞아요. 헤헤. 하림 형이 가는 길 앞엔 항상 승리밖에 없지.”
“당연하지. 부장이 누구인데. 천하제일, 우주제일인이잖아.”
성철각에 이어 작은 성철각인 황보궁도 한마디 했다.
“대형이 입김만 불어도 그들은 쓰러질 겁니다.”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두 사람, 탈혼마제와 유미령은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항상 느끼는 것이지만 저놈들은 참 잘 만났군. 저렇게 만나기도 힘들 텐데.”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저들만 있으면 질 것 같지는 않아요.”
“그게 더 웃기다는 것이 아니냐. 저놈들 말이 사실이라는 게. 장난삼아 말하는 게 사실이니.”
“그렇기도 합니다.”
슈우우우우-
배는 장강을 따라 빠르게 내려갔다.
수로가 확실히 빨랐다.
육로로 움직였다면 여전히 호북을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이 밝아오면서 물안개가 자욱하게 장강 수면 위를 가렸다.
‘으으음.’
전방에 시커먼 물체가 보이는 듯했다.
태진천은 눈을 크게 뜨며 전방을 노려보았다.
조금씩 안개가 스러지며 전방에 있는 물체의 정체가 희미하게 보였다.
‘배…… 배다!’
서량채와 유영채의 영역에 들어서기까지는 아직 거리가 남아 있었다.
‘이곳에는 수채가 없는데……?’
펄럭!
안갯속에서 바람에 흔들거리는 깃발.
수군기(水軍旗)!
‘망할…… 나라의 군선이다.’
장강수로채에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오직 군선밖에 없었다.
하지만 돌아갈 수도 없다.
이미 군선에 의해 발각된 상황.
두우우웅!
군선에서 북소리가 울렸다.
‘어떻게 하지?’
스윽-
남하림이 선실에서 나와 태진천의 옆에 섰다.
“저 배는 뭡니까?”
“구, 군선입니다. 명화포에 있어야 하는데…… 이 시간대에 여기까지 올라오는 경우가 없었습니다.”
“그렇군요. 보아하니 우리들을 본 모양인데.”
물안개가 서서히 걷혔다.
삼십여 척의 군선이 장강 위에 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대수군단 사이에서도, 황금수군기가 펄럭이는 군선.
수십 척의 군선들이 옆으로 지나가며 그들을 포위했다.
척! 척! 척!
갑판 위로는 수백 명의 궁수들이 화살을 겨누었다.
“수적 놈들은 무기를 버리고 당장 무릎을 꿇어라!”
궁수들 사이에서 한 사내의 우렁찬 목소리가 울렸다.
척!
남하림을 허리에 찬 개방의 신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목소리에 무단의 힘을 실어 신분을 밝혔다.
“본인은 천하제일대개방의 후개다. 우린 수적이 아니오. 나라의 군사가 무슨 이유로 본인의 앞길을 막는지 모르겠으니, 신분을 밝히시오.”
남하림의 목소리는 당당했다.
전혀 두려움이 보이지 않았다.
수명장군 이자오는 선수 끝까지 걸어 나와 남하림을 내려다보았다.
‘후개! 저자가…….’
이제 중원에서 후개가 누구인지 모르는 무인은 없었다.
이는 군대의 무인 또한 마찬가지.
수군의 장군이라 하나 그 또한 무공을 익힌 무인이다.
무림의 영웅이라 불리는 인물에겐 함부로 하대를 할 수 없었다.
“그대가 개방의 후개임이 진정 맞소이까?”
“맞소이다. 당신이 이들의 수장이오?”
남하림의 신형이 천천히 떠올랐다.
스르르륵-
무공을 익힌 무인이라면 신법은 누구나 펼칠 수 있다.
하지만 남하림이 보여준 신법은 무공의 극의에 도달하지 않으면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움직임.
타악!
남하림은 이자오의 앞으로 가볍게 내려섰다.
‘이토록 젊다니.’
이십 대의 젊은 거지.
화려하면서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단으로 만든 복장.
생김새에도 놀랐지만, 그가 보여준 무위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신위였다.
‘소문이 사실이군. 천마와 싸워서도 밀리지 않았다고 하더니.’
“후개, 그대가 왜…… 수적들과 함께 있소이까?”
“누가 수적이란 말인지요? 아, 혹시 배 때문에 그런 것이오? 혹시 성함이?”
“삼수군장 이자오라고 하오.”
“이 장군님이시군요. 혹시 소문을 들어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동문상국에 일이 있어 수로를 이용해 장강으로 가던 도중 수적들을 만났소이다. 그래서 빼앗은 뒤 가는 중이지요. 수적선이 빠르다고 해서.”
빠른 배가 필요해서 수적선을 타고 간다는 뜻이었다.
다른 사람이면 거짓말하지 말라 소리쳤겠지만.
후개라면.
“아하…… 그래서 서량채와 후영채가 모여 있었군.”
“그게 무슨 말입니까?”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외다. 장강 아래 두 수채가 갑자기 집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려왔소이다.”
“그 사실은 몰랐군요. 알려주어 고맙습니다.”
“그 정도야. 무림의 영웅인 그대를 만나서 반가웠소이다.”
“그럼 여기를 지나가도 되겠습니까?”
“수적들이 아래에 기다리고 있소이다. 배 한 척으로는 위험하지 않겠소이까?”
“상관없습니다.”
이자오는 한 척의 배로 십여 척의 수적을 상대하겠다는 남하림을 보았다.
“그들을 이길 수 있소이까?”
“동정호에서도 장강수로채 열세 척을 뚫고 왔습니다.”
“하, 총채주의 목을 벤 인물이…… 후개, 그대였습니까?”
‘총채주가 죽었다고? 목이 베어진 채?’
“목을 베지는 않았습니다만…….”
누군가 내력이 없는 비진독을 죽인 모양이었다.
‘쯧. 불쌍하게 죽었군.’
“후개, 잠시만 본인과 함께 도독을 알현해도 되겠소이까?”
“그렇게 하지요.”
* * *
이자오는 얼른 대장선을 향해 배를 옮겼다.
척척.
남하림은 그를 따라 뒤에 있던 대장선으로 넘어갔다.
도독 응순.
수군의 대장군으로 장강에서 사십 년 이상 배를 탄 명장.
응순은 이자오와 함께 들어선 젊은 거지를 보았다.
척.
이자오는 인사를 한 뒤 곧바로 남하림을 소개했다.
“도독님, 함께한 이는 무림대영웅이신 개방의 후개입니다.”
“이 젊은이가…… 후개란 말인가?”
“그렇습니다.”
스윽.
남하림은 응 도독에게 포권을 했다.
“도독께 인사드립니다.”
간단한 동작만으로도 남하림의 성취를 알아보았다.
“무림의 젊은 영웅을 한번 만나보고 싶었지.”
“실망을 드렸는지 모르겠습니다.”
“허허, 소문보다 훨씬 대단한 젊은이로군.”
“감사합니다.”
응순은 가만히 서 있는 남하림의 모습에서 신기를 읽을 수 있었다.
“이 장군, 어떻게 된 일인가? 수적이라 하여 준비했거늘.”
“죄송합니다. 후개에게 많은 사정이 있었던 모양입니다.”
이자오는 응 도독에게 짧게 설명을 했다.
끄덕끄덕.
십 년 동안 잡고자 했던 총채주 비진독이 죽었다고 한다.
“허어, 그놈이 죽었다니 잘된 일이군. 후개, 여하튼 고맙네.”
“아닙니다. 제가 죽인 것도 아닙니다.”
“누가 죽였든지 원인은 그대가 있었기 때문이지. 그래, 강소성으로 간다고 했는가?”
“네. 맞습니다.”
“두 수채에서 자네를 죽이기 위해 기다린다고 하는데도 가려는 것이 맞는가?”
“두렵지 않습니다. 충분히 싸워 이길 수 있습니다.”
“허허허, 대단하군. 사내라면 그 정도의 기개는 있어야 하는 법이지.”
응순은 이자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이 장군. 혹시 우리들이 도와줄 수 있지 않겠는가? 그놈들을 잡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인 것 같군.”
“소신도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후개의 뒤를 따라 갔다가 그놈들이 모습을 드러내면 할 계획입니다.”
“좋은 계책이네. 이 장군이 맡아서 처리하게.”
“명을 받들겠습니다.”
장강의 여정은 점점 끝을 향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