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구천신품을 얻다
풍천분타에 들어온 살천성주 지무린은 마음이 착잡했다.
수하들이 이곳에서 떼죽음을 당했다.
‘신려세가인가.’
분타 정문 밖에 신려세가의 무인들이 모여 있었다.
신명항의 살기가 단번에 흘러나왔다.
“지무린, 내가 찾아가려고 했건만, 네놈을 여기에서 만날 줄은 몰랐군.”
“신…… 가주.”
개방 분타 앞이 아니었다면 신명항은 당장에라도 검을 뽑았을 것이었다.
풍천분타의 분위기는 애매모호하게 변했다.
살천성주 지무린.
신려세가주 신명항.
남하림은 다가온 살천성주를 보았다.
“살천성의 주인이라 들었소. 본인을 직접 만나러 온 이유가 무엇입니까?”
“단독 면담을 했으면 좋겠소.”
“아니. 굳이 단독 면담까지 할 필요가 없을 것 같소. 서로 비밀 이야기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
단칼에 자르는 남하림의 태도에 지무린의 얼굴 근육이 빳빳하게 굳어졌다.
“당신이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군. 살천성에 의해 개방의 형제들이 많이 다쳤소이다. 설마 그 사실을 모르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겠지요?”
“그건…… 미안하게 됐소이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해선 이미 무림에 공표를 하지 않았소이까?”
“무림에 공표? 당사자들은 아무런 사과도 직접 받은 적이 없고, 그에 대한 보상도 받은 적이 없소이다.”
“그게 무슨 뜻이오?”
“이해가 되지 않습니까? 방금 내가 했던 말 그대로인데.”
차가운 남하림의 시선을 마주한 지무린은 당황했다.
“난 말이외다. 은원을 정말로 중요하게 여기는 편입니다. 진심 어린 사과를 하고자 했다면, 그날 이후로 누군가는 직접 이곳에 찾아왔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
주위에 수많은 시선들이 그들을 주목했다.
결국.
살천성 성주인 지무린은 남하림을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후개, 이번 일은 정말로 미안하게 되었소이다.”
‘이거 놀랄 일이군. 머리까지 숙이면서 사과하다니. 지 성주에게 말 못 할 고민이 있군.’
신명항은 두 사람이 어떠한 관계로 엮여 있는지 궁금했으나 내색하진 않았다.
“성주님의 사과를 받아들이지요.”
“고맙소이다. 그럼…… 본 성에 대한 지원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까? 다음 달에 있을 상환은 연기가 되는지?”
‘어라? 이건 뭐야?’
남하림은 지무린의 말에 자신이 모르는 무언가가 있음을 바로 알아차렸다.
‘본 성에 대한 지원이라?’
살천성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해 알고 있었다.
‘표강상국에서 지원하고 있었나? 그러면 외숙에게 가야 하는데? 굳이 날 찾아와 고개를 숙일 이유가 있다면…….’
남하림의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표강상국이 아니라 호북상국이군.’
표강상국에서 자신에게 넘어온 두 개의 사업체 중, 표강표국은 돈과 관련된 사업을 하지 않았다.
‘하, 누군지 모르겠지만 일 처리가 아주 똑바른데.’
호북상국의 주인이 남하림으로 바뀌는 순간.
그리고 살천성이 남하림에게 발톱을 드러낸 순간.
책임자가 살천성과의 거래를 끊겠다고 통보한 것이다.
‘금액이 많다면 충분히 찾아올 만하지.’
피식.
남하림은 기분이 좋아졌다.
앞으로 살천성의 멱살을 잡고 흔들 수 있는 패가 생긴 셈.
“무슨 말씀을 하는 건지 모르겠소이다. 살천성에 지원은 뭐고, 상환금은 뭔지 자세히 말을 해보시지요.”
“호북상국의 주인이 얼마 전에 바뀌었다고 들었소.”
“나도 알고 있소이다.”
“호북상국의 대총관이 주인의 승인 없이는 상환금을 회수해야 할 것이며, 지원 또한 더 이상 없다고 전해왔소이다.”
“대총관이 그렇게 이야기했소이까?”
“그렇소.”
‘대총관이라…… 상당히 상황 판단을 잘하는 인물이군. 일 처리가 능숙한 걸 보니 앞으로 두 곳 모두 일을 맡겨도 되겠구만.’
“주인이 누구라고 하던가요?”
“후개, 그대가 호북상국의 주인이지 않소이까.”
“하하하! 맞습니다. 내가 이번에 호북상국을 인수한 본인이지요.”
‘뭣이? 후개가 호북상국의 주인이라고?’
신명항은 흠칫했다.
호북상국은 호북성에서 표강상국을 넘어설 만큼 영향력이 점점 커지고 있는 상국.
대부분의 무림세가들은 그 지역의 상국과 친밀한 관계를 맺기 위해 노력한다.
세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의 존재도 무시할 수 없으니까.
그렇기에 대문파의 경우 상단과 표국을 직접 운영하는 편이지만, 사실 전문성이 늘 부족할 수밖에 없었다.
“살천성의 신용이 좋지 않은 모양이군요? 원금까지 회수하여 받으려고 하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후개! 지금까지 본 성은 단 한 번도 약속 날짜를 미루어본 적이 없소이다. 한 번 알아보면 될 게 아니오!”
“그럼 대총관이 왜 그렇게 일을 처리했을까요. 제때 이자까지 갚는 우량고객이라면.”
“…….”
지무린은 네놈 때문이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애써 참았다.
“그건…… 본인도 잘 모르겠소이다.”
“성주는 정말 모른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지요? 난 알 것 같은데?”
‘이 새끼가…… 나를 가지고 놀고 있어!’
지무린이 부들거리는 사이, 신명항은 살천성 성주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남하림의 모습에 감탄했다.
남하림의 목소리가 근엄하게 변했다.
“난 공과 사는 구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바이외다.”
“…….”
“그렇지 않습니까?”
“맞…… 습니다.”
“호북상국에 연락해서 살천성과 어떠한 조건으로 거래했는지 상세하게 알아보도록 하죠.”
“그건…….”
“부당한 게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겠다고 한 말이외다. 정당하면 예전처럼 거래를 하겠소이다.”
“……고맙소이다.”
“아직 확정은 아니오.”
확정은 아니라지만, 아무래도 최악의 상황은 벗어난 듯했다.
“그만 돌아가도 좋습니다. 상환금 날짜가 언젠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따로 연락할 때까지는 유보시켜 주겠소.”
“후개, 고맙소이다.”
개방에 찾아오는 동안, 수많은 회한과 생각이 머릿속에 회오리쳤었다.
지무린은 진심으로 포권하고는 안도의 표정을 지었다.
‘휴우…… 일단 되었다. 생각보다 나쁜 놈은 아니군.’
그렇게 지무린 풍천분타 밖으로 나서는 순간,
“잠깐 멈추지?”
뒤에서 따라 나오는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신 가주.”
“이대로 가면 안 되지. 후개와 만나는 일만 볼일인가?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났으면 했는데 잘됐어.”
“미안하게 됐네. 난 그분의 뜻을 따랐을 뿐이다.”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그대는 내 딸을 죽이려고 했어.”
“그 아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네. 목적은 물건이었으니.”
“흥, 사과와 변명이라. 옛날의 지무린이 아니군.”
“신 가주, 그건 서로 마찬가지 아닌가? 부모형제도 버릴 수 있었던 그대가 자식을 위해 죽음을 걸고 그분의 뜻을 거절하지 않았나.”
“……허, 우리 둘 다 변했군. 만나게 되면 둘 중 한 명이 죽을 때까지 싸우려고 했건만.”
“신 가주, 그분께선 그 물건을 찾기 전까지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모든 원인은 구천신품인가.”
“물건을 넘길지, 그분과 싸워야 할지 결정해야 할 걸세.”
지무린은 수하와 함께 고개를 숙인 채 떠나갔다.
* * *
일각 후.
신려세가도 떠날 시간이 되었다.
신소소는 걸협오성과 헤어지기 싫었다.
“진짜 따라가면 안 돼요?”
“안 돼.”
“다들 저 좋아하잖아요…….”
신소소는 남하림 옆으로 선 네 사람을 번갈아보며 측은한 표정을 지었다.
“그냥 아버지 따라 집에 가라.”
“후개 오빠…….”
“급하니까 오빠라고 하네. 조용할 때 시간 나면 놀러 갈 테니 가출하지 말고. 알겠지?”
“진짜죠? 꼭 올 거죠?”
“그래. 말썽부리지 말고 잘 지내고 있어. 지나가다가 한번 들를 테니까.”
스윽.
신소소는 붉은 노리개를 꺼냈다.
신려세가 부녀는 떠나기 전, 구천신품에 거취에 대해 결정을 내렸다.
“이거 받아요.”
“……이게 뭔지 알잖아.”
“알아요. 이 쓸데없는 거 때문에 죽을 뻔했는데 모르겠어요?”
“이걸 왜 나한테 주는데? 나도 죽기 싫거든.”
“그냥 가지세요. 앞으로 천하제일인이 될 후개가 아니면 이걸 누가 가지겠어요?”
“너…… 내가 집에 보낸다고 복수하는 건 아니겠지?”
“아, 진짜…… 아, 돌아가면서 소문 하나만 내면 안 될까요?”
“뭘?”
“제가 지니고 있던 구천신품은 후개한테 줬다고요.”
“…….”
“괜찮죠?”
“안 될 건 없지만…… 한동안 열심히 도망 다녀야겠네.”
“천하의 걸협오성인데 뭐. 몰려오는 즉시 한 방에 보내면 되잖아요.”
“우릴 너무 과대평가하는 것 같다.”
신명항은 옆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흐뭇하게 보았다.
신소소는 나란히 선 다섯 명 앞으로 다가섰다.
“휘연 오빠. 그동안 고마웠어요.”
“조심해라.”
스윽.
마지막으로 팽유도와 인사를 마친 신소소는 휙휙 손을 흔들며 풍천분타를 떠나갔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표가 난다고 했다.
팽유도는 뭔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있다가 없으니깐 심심하네.”
“그러게. 같이 다녀도 좋았겠는데…….”
휘잉휘잉.
남하림은 손가락에 노리개를 끼운 채 빙빙 돌렸다.
“요걸 어떻게 할까?”
“하림 형, 하던 대로 하면 안 되나?”
“그럴까? 그럼 전결 아저씨를 만나러 가야겠네.”
남하림은 노리개를 계속 빙빙 돌리며 주위의 시선을 끌었다.
* * *
신려세가가 풍천분타를 떠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시점.
구천신품에 대한 새로운 소문이 중원 전체로 퍼져 나갔다.
#NAME?
또각또각.
천사회의 혈군사가 바둑돌을 손에 쥐고 문질렀다.
구천신품을 찾기 위해 살천성을 보냈지만 절반의 힘만 잃은 뒤 물러났다.
천사기령 또한 두 번이나 보냈건만 신려세가에 의해 무시당했다.
“신명항, 많이 컸군. 분명히 구천신품을 넘기라고 했건만. 본인의 말을 간단하게 무시해 버리다니.”
“군사님, 신려세가를 가만히 두어서는 안 될 것 같습니다. 이번 기회에 천사회의 힘을 보여줘야 합니다.”
“불가. 백리세가를 친 무림맹에게는 구천신품을 찾는다는 명분이 있었지만 우리에게는 없다. 약은 놈들.”
“군사님의 명을 거역하지 않았습니까?”
“그것만으로 치기에는 무리가 있지. 명확히 따지면 신려세가는 천사회 아래 세력이 아니니까.”
“명분이 없다면 치지 못하는 것입니까?”
“때를 기다려야지. 천주님께서 가장 신뢰하는 이다. 천천히 기다리다 상대가 악수를 둘 때, 그때 지금 받은 수모를 갚아주면 되지 않겠는가. 우선 자네가 할 일은 걸협오성을 만나는 걸세. 구천신품이 원래 우리 물건이라는 것을 보여줘야지.”
“알겠습니다.”
* * *
풍천분타에서 나온 걸협오성은 무림맹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들의 행적은 무림인들 사이에서 큰 관심거리였다.
하지만 하루가 지난 뒤.
걸협오성은 갑자기 모습을 감췄다.
중원 무림인들이 그들을 찾고자 애를 썼지만, 어디에서도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보름 후.
걸협오성은 그제서야 중원에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무림인들은 그들이 어디로 움직이는지 항상 예의 주시하기 시작했다.
“유명인이라는 게 이리도 피곤한 일인 줄 몰랐어요. 이러다 사생활조차 없어지는 거 아닌지.”
“너무 쳐다보니깐 밥도 제대로 못 먹겠더라. 한 사람만 빼고 말이지.”
당무독의 말에 일제히 남하림에게 시선이 모아졌다.
“다들 뭘 그리 부담스러워해. 잘났으면 잘난 체하면 되잖아. 안 그래?”
“하림 형 말처럼 쉽게 되면 좋겠어요.”
“자연스럽게 해봐. 우선 남들을 의식하면 안 돼. 그게 가장 먼저야.”
“휴우, 노력할게요.”
뚝.
그때.
앞서가던 이휘연의 걸음이 멈췄다.
“부장, 누가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군.”
흑의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파 쪽 인물이야.”
완벽하게 내력을 숨기지 않는 이상 상대의 기 정도는 쉽게 구별할 수 있었다.
팽유도는 저자가 구천신품 때문에 온 것이라 확신했다.
“소문이 장난 아니게 퍼져 나가서 앞으로 곤란하겠어요. 빨리 무림맹에 가는 수밖에.”
“나름 재밌는 시간이 될 것 같지 않아?”
당무독은 새롭게 만든 독을 사용할 생각에 즐거웠다.
팽유도가 물었다.
“누구요? 우리에게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일단 신분이나 압시다.”
“천사회에서 나왔다.”
“……!”
스르르릉-
팽유도는 등 뒤에서 묵흑반도를 천천히 뽑았다.
흑의사내가 바로 소리쳤다.
“도광걸! 무슨 짓인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반말하는 것은 싸우자는 뜻이라고 배웠거든.”
번쩍!
가볍게 내리친 묵흑반도에서 도기가 퍼져 나갔다.
세 방향에서 달려드는 삼도광(三刀光).
슈우욱-!
흑의사내는 호신강기를 일으키며 장막(掌膜)을 만들었다.
콰아아앙!
팽유도의 삼도광이 장막을 가볍게 무너뜨렸다.
휘청.
흑의사내는 충격에 뒤로 물러났다.
‘헉.’
그는 순간 깜짝 놀라며 눈이 커졌다.
‘충분히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늘!’
위력이 보통이 아닌 것을 깨달은 사내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잠깐, 그만해라!”
“그만은 무슨!”
빙글.
회전하며 묵흑반도를 수평으로 긋는다.
취리리리-
쌔애애애앵!
월극(月戟)의 도기가 흑의사내의 허리를 단번에 잘라낼 듯했다.
슈우우우웅.
순간, 한층 더 두꺼운 장막을 만들어낸 흑의사내.
차아아아앙-
콰아아아앙!
거대한 두 기가 부딪히면서 기의 파장이 퍼져 나갔다.
휘이이잉-!
강력한 파동풍이 주변을 휩쓸었다.
‘강하다. 제대로 붙어도 이길 수 있을지……!’
뒤로 밀려 나간 흑의사내가 인상을 찡그렸다.
팽유도는 왼손을 바닥에 짚은 채, 묵흑반도를 잡은 오른손을 어깨 너머로 쭉 폈다.
“철각 형, 나 어때? 마지막 동작이 자연스럽지?”
“멋있어. 완벽한 자세야.”
“하림 형 말처럼 남들 신경 안 쓰고, 종종 멋있는 자세를 많이 만들어봐야 겠어.”
“나도 앞으로 유도처럼 해볼게.”
흑의사내는 기가 찰 노릇.
‘이건 무슨 개소리야.’
당장에라도 다시 달려들고 싶었지만, 오늘은 싸우고자 온 건 아니었다.
“후개, 그대에게 볼일이 있어 왔, 왔소이다.”
반말을 내뱉다가 급하게 바꾸었다.
“무슨 볼일이오?”
“천사회의 혈군사님께서 후개에게 전하는 말씀이 계셨소.”
“그래, 그대의 군사가 뭐라고 했소이까?”
“혈군사님께선 신려세가에서 받은 구천신품은 사파의 물건이니 돌려주었으면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농담이죠?”
“……!”
“구천신품이 사파의 물건이라면 무림맹에 있는 것도 달라고 하면 되겠군요.”
흑의사내는 대답을 못 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똑바로 전하세요.”
“……지금 농담하는 것이 아니다. 신려세가에서 받은 구천신품을 내놓지 않는다면, 네놈은 천사회의 공적이 될 것이다!”
“마음대로 하세요. 공적이든 말든.”
“내가 떠나는 시간부터 후회하게 될 텐데도?”
“과연 그럴까요?”
히죽.
남하림은 그를 향해 비웃는 듯 다시 말했다.
“과연 누가 후회를 할지, 내기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