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마을을 구하다
무림맹으로 향하는 여정.
천사회에서 찾아온 흑의사내의 협박을 받은 지 하루가 지났다.
쉽지 않을 거라 예상되는 상황.
“하림 형, 조용한데요? 바로 쳐들어올 줄 알았는데.”
“잠깐.”
남하림은 뒤에서 따라오던 이휘연과 시선을 마주쳤다.
끄덕.
반 시진 전부터 미세한 기가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다들 준비해. 아닌 줄 알았는데…… 우릴 따라오는 놈들이 있어.”
“아이고, 내 입이 웬수네.”
팽유도가 자신의 입을 툭툭 쳤다.
“천사회에서 왔다면 지금까지 상대했던 놈들보다 강할지 모르겠네요.”
“궁금했는데 잘됐지.”
후개는 물론, 나머지 네 사람도 두려움 같은 건 없었다.
“부장, 어떻게 할까?”
“멀리 떨어져 있으니 정확하지가 않네.”
남하림은 무모하지 않았다.
상대를 압박할 때와 물러날 때를 아는 것처럼, 시종일관 차분하게 움직였다.
“일단 거리를 유지하면서 놈들 인원부터 파악하자.”
“알겠어.”
휘익!
남하림을 선두로 일행의 움직임에 속도가 나기 시작했다.
* * *
걸협오성의 뒤를 쫓던 무리들.
“단주님. 저놈들이 본단의 미행을 눈치챘습니다. 속도가 빨라지고 있습니다.”
“쫓아라.”
“넵.”
파앗!
걸협오성을 따라잡기 위해 오백의 인원이 계속해서 속도를 올렸다.
하지만 상대의 속도는 걷잡을 수 없이 빨라지더니 이내 무섭게 내달렸다.
‘제기랄. 놓쳤군.’
선두에서 움직이던 정후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곧바로 천사회의 천혈단주 부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놓쳤는가?”
“단주님, 죄송합니다. 적을 놓쳤습니다.”
“소문대로 대단한 놈이군. 우리의 추적을 뿌리치다니.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할 것이다.”
천혈단주 부운이 명령을 내렸다.
“정후대는 다시 그놈들을 찾아라.”
“존명.”
휘익!
앞으로 빠르게 달려가는 일백의 정후대.
그의 뒤로 사백 명의 천혈단이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스르륵.
천혈단이 사라진 장소에, 흑색의 멱리에 면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는 천사회까지…….”
이십 년 동안 조용했던 무림이 점점 깨어나고 있었다.
“구천신품. 혼란의 중심에는 항상 그자가 있다…… 만통자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처럼 중원 무림은 그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아직은 확신할 수 없어.”
스윽.
얼굴 앞을 가린 면사를 옆으로 젖히자, 푸른색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여인은 걸협오성이 사라진 방향을 한동안 바라보았다.
‘정말로 우리가 찾는 인물이라면…….’
* * *
천혈단의 추적이 계속 이어졌지만, 다섯 명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곧장 무림맹으로 향했다.
천혈단 인원 또한 이미 파악을 마친 상태.
이휘연이 힐끗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전체 인원은 대략 오백 명 정도. 그중 앞장서서 우리 앞으로 가려고 하는 놈들이 일백 명 정도야.”
“휘연 형, 괜찮아요. 어차피 그들은 우리보다 빨리 못 움직여요.”
“일단 조금씩 줄이고 나가는 게 좋겠어. 일백 명이라면 서로 각개로 치고 가자.”
“알겠어요.”
휘이익-!
이휘연이 순간 길옆으로 빠지면서 사라졌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다.”
“부장, 알았어.”
타앗!
네 명도 동시에 옆으로 흩어졌다.
슥-
목 뒤에 닿는 차가운 느낌.
‘헉. 언제 뒤를……!’
핏! 핏!
이휘연의 검에 사내가 그 자리에서 목숨이 끊어졌다.
“커억.”
일백 명의 정후대는 비명도 없이 한 명씩 목숨이 사라져 갔다.
차라리 한데 모여 있었다면 걸협오성을 상대하기 편했을 것이다.
팟.
묵흑반도가 가슴을 베고,
스걱.
태극흑검이 목을 스치며,
철썩.
철각반이 허리를 뚫고,
핏핏핏.
독침이 이마에 박혔다.
‘후개!’
정후대주 벽진오는 남하림과 마주치자마자,
따다다닥!
눈앞에서 번쩍이는 타구봉에 의해 온몸에 타격을 받았다.
“악!”
털썩.
벽진오가 쓰러진 후, 일백 명의 정후대 또한 한 명도 남김없이 죽거나 중상을 당했다.
* * *
잠시 후.
부운의 앞으로 부단주 파준홍이 다가섰다.
“단주님, 정후대가 모두 당했습니다.”
“허어…….”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정후대라 하여도 살천성의 한 가문과 실력이 맞먹거늘. 걸협오성이 그 정도로 강하다고?
“죄송합니다.”
부운은 결정을 내려야 했다.
“단주님,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이대로는 그놈들의 뒤꽁무니만 쫓게 될 터, 내가 직접 그놈들을 잡으러 갈 것이다.”
“단신으로는 위험할 수 있습니다. 단주님, 걸협오성의 무공은 살천성의 두 가문을 멸문시킬 정도입니다.”
“부단주, 살각 독정과 살주세가 안본강을 나와 동급으로 보는 것인가?”
“죄송합니다. 단주님께서 그들보다 강하신 줄 압니다. 하나 만일의 사태에 대비해 천혈십장과 함께 움직이시면 좋을 듯합니다.”
“……알겠다. 천혈십장과 함께 움직이겠다.”
꾸욱.
부운은 허리에 찬 월참도를 잡았다.
‘후개, 얼마나 강한지 보겠다. 기다려라.’
* * *
쏴아아아-
하북 주마점 각산현의 강하촌에 들어선 지 이틀이 지났다.
팽유도는 객잔의 창문에 턱을 힘없이 걸쳤다.
“이 정도면 홍수가 나고도 남겠는데.”
하늘에 구멍이 뚫렸는지 이틀 동안 폭우가 쏟아지면서 움직일 수 없었다.
“비가 너무 많이 오는데 하천가 마을은 괜찮을랑가 모르겠네.”
마을에 들어오면서 하천을 건너왔다.
하천 제방 아래로 꽤 많은 가구들이 모여 있었다.
제법 튼튼해 보였지만 하천에 물이 차서 제방이 넘치거나 무너지기라도 하면, 모든 게 떠내려 갈 것이 뻔했다.
“헤헤헤, 손님들. 그런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몇십 년 동안 하천을 넘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요.”
점소이는 음식을 내려다 놓으면서 팽유도의 말에 대답했다.
“그래? 그럼 다행이네.”
식탁에 따끈한 소면 다섯 그릇이 놓였다.
후루루룩!
“역시 이런 날씨에는 따뜻한 국물이 최고지.”
“맞아. 언제 비가 그칠지도 모르는데 한잔할까?”
창밖을 보니 오늘 내로 그칠 비는 아니었다.
당무독은 술 생각이 났다.
“좋지요. 그렇지 않아도 나도 생각이 났거든. 부장, 한잔 마셔도 돼?”
“그렇게 해.”
“앗싸, 이보게.”
남하림의 허락이 떨어지자 성철각은 주방을 향해 점소이를 불렀다.
점소이가 얼른 고개를 내밀었다.
“술 좀 가져다주게.”
“넵, 알겠습니다.”
점소이가 주방으로 다시 들어갈 때였다.
끼이익-
객잔으로 갈모를 쓴 십여 명의 인물들이 들어왔다.
폭우에 갈모는 소용이 없었는지 얼굴이 온통 젖어 있었다.
부운은 젖은 몸을 털었다.
‘드디어 찾았다.’
창가에 모여 있는 걸협오성을 발견했다.
부운은 즉시 그들의 옆자리로 움직여,
털썩.
자리에 앉고는 넌지시 말을 걸었다.
“비가 너무 오지 않소이까?”
“…….”
“허허, 각박하군. 사람 무안하게. 목소리가 들리면 지나가는 개도 고개를 돌릴 것이외다.”
“대풍이는 그런 것에 신경 안 씁니다.”
“대풍이가 누구요?”
“내가 키웠던 강아지요. 얼마나 무심한지 먹을 것에만 좋다고 꼬리를 치는 놈이지요. 그 외에는 천둥소리가 나도 꿈쩍도 안 하지.”
팽유도는 웃으며 남하림의 말을 대신 받았다.
“형이 자꾸 대풍이 이야기를 하니 정말 만나보고 싶어요.”
“나중에 만날 기회가 있겠지. 지금쯤이면 동네를 주름잡고 있을 거야. 어릴 때 하수오 잔뿌리를 먹였더니 힘만 좋아가지고.”
“와아, 대풍이는 좋겠네. 사람도 잘 못 먹는 하수오를…….”
“여하튼 동네 개들 사이에서 대장이야.”
부운은 어느새 자기들끼리 개 이야기를 주고받는 남하림과 팽유도를 어이없는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누가 거지 아니랄까 봐.’
한창 떠들던 남하림은 고개를 돌려 부운과 눈을 마주쳤다.
날카로운 눈빛.
“근데 어디서 왔소이까? 하남성 말투는 아닌 것 같은데.”
“…….”
“비밀이오? 대충 들어보니 안휘성 말투인 것 같고.”
차르르르-
그사이 팽유도가 무림대사전을 꺼내 종이를 넘겼다.
“안휘성, 안휘성이라…….”
척.
무림대사전 지역장, 안휘성편.
“사파의 기가 흐르니까, 정파는 아니고…….”
‘이놈이…….’
내기를 숨겼건만.
단번에 자신의 기를 알아보았다.
팽유도의 손가락이 사파의 장에서 한 줄씩 쭈욱 내려오다,
멈칫.
한 문파에서 멈추었다.
“사파 연합체 ‘천사회’. 사파지존 혈사천주가 수장으로 복장은…… 검붉은 무의, 허리에는 홍화대를 차고 있다.”
팽유도는 씩 웃으며 부운의 허리에 둘린 붉은 띠, 홍화대를 향해 찡긋 눈짓했다.
“어라, 천사회에서 온 것 같은데요?”
“…….”
“얼마 전에 시커먼 놈이 와서 우리보고 조심하라고 했잖아요. 보아하니 이들 같네요.”
채애애앵!
부운은 뒤로 물러나면서 월참도를 뽑았다.
“걸협오성. 살고 싶다면 그 물건을 내놓아라!”
웅성웅성.
조용했던 객잔 안은 순간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다들 창가에 앉아 있던 다섯 명을 보면서 혹시나 했었다.
“봐. 내 말이 맞지? 그분들이 맞잖아.”
“그럼…… 저자들은 누구지?”
“방금 천사회라고 한 것 같은데?”
“와아, 이번에는 천사회와 붙는다구? 역시 걸협오성은 대단하구나. 무림맹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사파의 지존도 상대하다니……!”
객잔의 손님들은 숨을 죽이며 상황을 지켜보았다.
타앗!
찰지게 탁자를 내려치는 소리.
“유도야. 비 오는 날에 진짜 먼지가 날까?”
“글쎄요. 한 번도 보지를 않아서요.”
“그래? 그럼 오늘 볼 수 있을 거야.”
“아항.”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갈까?”
* * *
콰아아아아아-
무섭게 쏟아지는 폭우에, 밖으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벌써 온몸이 젖었다.
“시원한데…… 재미있게 합시다.”
남하림은 타구봉을 뽑았다.
“후개, 우린 살천성과 다를 것이다.”
“잘됐군. 그들은 별로였거든. 당신들은 좀 더 강했으면 좋겠소.”
번쩍!
월참도에서 빛이 쏟아지는 순간,
부운이 남하림을 향해 내달렸다.
그와 동시에 천혈십장의 무인들이 다른 네 명에게 달려들었다.
콰아아앙-!
하늘에서 천둥이 떨어지는 소리인지, 거대한 두 진영의 기세가 부딪히는 소리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티이이이잉!
거센 폭우의 빗방울을 튕겨내며 남하림의 머리 위로 월참도가 떨어졌다.
‘멋진걸!’
폭우를 가르며 다가오는 월참도의 도기.
파파팍!
남하림이 바닥을 내리치자 땅에 고인 빗방울이 솟구쳤다.
투투투투투투투.
‘이놈, 겨우 빗방울로……!’
하지만,
터어어엉!
묵직하게 월참도와 맞부딪힌 빗방울들.
도를 때린 순간, 산산히 부서지면서 흩어진 작은 빗방울들이 부운의 눈앞으로 무수히 쏟아졌다.
‘이런!’
부운은 얼른 월참도를 당겨 눈앞을 막았다.
팅팅팅팅!
뒤로 밀려난 두 사람이 바닥에서 미끄러졌다.
철퍽철퍽.
시간이 지나자 빗물이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하지만 두 진영의 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타앗!
남하림은 발로 물을 차면서 수막을 만들었다.
슈우우욱!
부운이 앞을 가로막은 수막을 베었지만.
‘사라졌다?’
“이봐, 여기야!”
파아아앗!
부우우웅-
물속에서 솟구친 남하림이 타구봉을 올려쳤다.
월참도를 끌어당겨 막으려고 했지만 한발 늦었다.
퍼억!
타구봉의 끝에 부운의 턱이 닿았다.
“커억!”
부운은 다리를 휘청대며 뒤로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사이 네 사람에게 밀린 천혈십장도 부운의 곁으로 모여들었다.
그때,
와르르-
그들의 싸움을 구경하던 주민들이 혼비백산해 소리쳤다.
“제방이 무너졌다!”
“위로 피해라!”
하천을 흐르던 물이 무너진 제방을 뚫고 마을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콰르르르-
위에서 소름 끼치는 물살 소리가 들려왔다.
“하림 형, 제방이 무너졌어! 빨리 위로 피해야 해!”
“…….”
남하림은 앞을 보았다.
부운과 천혈십장 뒤편에 있는 둑.
[모두 잘 들어. 저놈들 뒤에 있는 제방을 단숨에 무너뜨린다.]
[아…… 알았어.]
우우우웅-
우우우웅-
남하림의 전음에 네 사람이 내력을 끌어 올렸다.
타아아앗! 슈우우욱-
그리고 동시에, 한 곳을 향해 내기를 쏟아냈다.
쿠아아아아앙!
다섯 사람이 한꺼번에 쏟아낸 내기는 부운을 스쳐 뒤로 날아갔다.
‘멍청하게……!’
동시에 걸협오성이 위로 도망쳤다.
“저놈들이…… 왜?”
그때,
콰르르르-
하천의 물이 기어코 제방을 넘어서 해일처럼 밀려왔다.
“뒤로! 둑에 올라서라!”
휘이익!
부운과 천혈십장은 의심 없이 위로 올라섰고,
두둑.
둑에 내려앉자마자 바닥이 완전히 꺼져 내렸다.
신법을 펼치려고 했지만, 모래성처럼 무너진 발판에 몸이 휘청거리며 중심을 잡을 수 없었다.
삽시간에 무너진 흙더미에 발이 잠겨들었다.
콰르르르르-
하천의 모든 물이 무너진 둑을 향해 덮쳐들었다.
부운과 천혈십장은 순식간에 논으로 쓸려 나갔다.
“와…… 사라졌네요.”
팽유도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눈을 끔벅였다.
“잘됐네. 그럼 우리도 가자.”
남하림이 객잔으로 돌아가는 순간, 많은 사람들이 환호를 질렀다.
둑을 무너뜨리면서 일부가 물에 쓸려 나갔지만, 마을 전체를 뒤덮는 수해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후개님 만세!”
“걸협오성 만세!!”
[엥? 우리가 뭘 했지?]
[우리가 무너뜨린 둑 사이로 물이 빠지나 본데?]
스윽.
남하림은 손을 번쩍 들었다.
“와아! 후개님 만세!”
또 한 번의 환호가 울렸다.
* * *
끝이 없을 것 같던 폭우는 새벽에 그쳤다.
날이 밝자 마을 사람들이 객잔으로 우르르 밀려왔다.
사람들은 마을을 구해준 무림인들의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기 위해서였다.
덜컹!
그때, 객잔의 문이 열렸다.
척척척척.
병사들과 함께 갑옷을 입은 포두가 객잔으로 들어섰다.
“어느 분이 후개시오?”
스윽.
“난데요?”
“어젯밤에 둑을 무너뜨렸다고 들었습니다.”
“맞습니다만.”
“죄송하지만 타인의 재물을 손괴한 죄목으로 각산현에 접수되었습니다. 그래서 현령께서 후개님을 조사하기 위해…… 헉!”
스걱.
이휘연의 태극흑검이 무장의 목에 닿았다.
“죽고 싶은가? 누굴 조사한다고?”
스윽.
남하림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에이, 휘연 형, 괜찮아요. 상관의 명을 받아서 하는 일이잖아요. 현령에게 가서 자초지종을 이야기해 보죠.”
남하림은 덜덜 떨고 있는 포두의 어깨를 툭 쳤다.
“겁먹지 마세요. 우린 무작정 사람을 죽이지 않아요. 앞장서세요.”
“아…… 예…… 고맙습니다. 그럼 소인이 모시겠습니다.”
포두는 공손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