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신명항 찾아오다
휘릭.
풍천분타로 향하는 신려세가 앞으로 내려선 인영.
신명항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또…….’
벌써 두 번째였다.
‘급했군. 천사기를 보내다니.’
처음과 달리 그들이 나타난 이유는 명확했다.
신명항은 수하들을 멈췄다.
풍천분타에서 들려오는 소문을 그 또한 알고 있었다.
살주세가가 대패했다.
거기다 개방에 항복이나 다름없는 선언까지 했으니, 살천성은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휙.!
신명항이 말에서 내려와 부복했다.
“천사기령을 뵙습니다.”
“신려세가의 가주에게 군사님의 명을 전하겠다.”
“하명하시지요.”
“신려세가 가주 신명항은 들어라. 다른 말은 하지 않겠다. 구천신품을 즉시 회수한 후 본 회에 넘기도록 하라. 만일 넘기지 않을 시에는 천사회에서 퇴출당할 것이며, 사파의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개소리하고 있군.’
신명항의 표정만으로도 군사의 뜻을 따르지 않을 게 분명했다.
“본 가에 구천신품을 있다는 것을 군사가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합니다.”
“군사님은 세상에서 모르는 게 없는 분이시다. 가주 신명항은 의심치 말라.”
“그 물건이 제 여식에게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군요.”
“알고 있다.”
‘군사가 범인이었어. 구천신품 때문에 소소를 죽이려고 한 것이 맞군.’
“제 여식을 만나는 대로 물건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어쩌면 후개에게 빼앗겼을 수도 있습니다.”
“알겠다. 부디 그대가 군사님의 노여움을 받지 않길 바라지.”
휙!
천사기령이 사라졌다.
신명항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쳇, 군사의 노여움이 아니라 탐욕이겠지.”
천사회를 세운 혈사천의 주인 혈사천주.
십 년 전, 그는 무공의 수련을 위해 폐관에 들어섰다.
혈사천주가 없는 동안, 천사회의 운영은 혈군사가 맡고 있었다.
‘혈군사, 갈수록 욕심이 늘고 있다.’
천사회를 세운 목적은 사파의 권위를 위함이건만.
그는 지배와 군림을 위해, 점점 독재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천주님께서 나오시지 않는 한 그를 막을 방법이 없다.’
척.
신명항은 말 위에 올라탔다.
‘최대한 버텨보는 수밖에.’
그는 수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가자!”
“옙.”
두두두두-
상당한 거리였던 풍천분타까지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신려세가의 무리가 풍천분타를 향해 빠른 속도로 내달렸다.
* * *
살왕 지무린은 술병을 통째로 들이켰다.
벌컥! 벌컥!
술독째 마셔도 정신이 취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 여러 지부에서 수많은 상소들이 올라왔다.
“개…… 새끼.”
호북상국에서 받던 지원은 하나씩 끊어졌다.
처음에는 그까짓 거 다른 곳에서 받으면 되지 않을까 싶었다.
하지만 상가의 세계는 무림과 달랐다.
이익이 있는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상계의 길.
오직 돈에 의해 움직이는 세상에서, 오늘의 동지는 눈 깜박할 새 내일의 적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상계였다.
현재 살천성으로 이어지는 길은 이익이 아니라 손해의 길.
세상 어디에서도 그들을 도와줄 상국은 없었다.
“성주님, 그만 드심이…….”
“크큭, 젠장, 취하고 싶어도 정신만 더 말짱해지는군.”
“주군…….”
“이봐, 시종세. 살왕인 내가 가야 모든 게 풀릴 것이라고?”
“송구하옵니다. 호북상국 상부에서 허가 없이는 더 이상의 지원이 없을 거라 전했습니다…….”
“상부의 허가라는 게, 결국 후개의 허락이란 뜻이로군.”
“…….”
시종세는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살천성이 살기 위해서는 가야 하겠지? 사실대로 말을 해보게.”
“……네. 그렇습니다. 후개에게 부탁을 해야 함이…….”
타악!
지무린은 상을 내리쳤다.
상은 그대로 두 동강이 났다.
“좋다, 가자. 그 방법밖에 없다면 후개를 만나야겠지.”
“소신의 능력이 부족해서 이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자네들하고는 상관이 없는 문제다.”
벌떡!
지무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수하들과 함께 풍천분타로 향했다.
* * *
남하림은 눈을 떴다.
끼이익-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새벽 공기의 차가움이 상쾌했다.
‘날씨가 참 좋군.’
남하림은 굳었던 근육들을 풀기 위해 팔을 뻗었다.
얍, 얍.
연무장에서 수련하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이 시간에 수련을?”
다른 문파도 아닌 개방에서?
보통 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남하림은 발길을 돌려 연무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수련을 지켜보던 분타주 정전국은 다가오는 남하림을 보고는,
‘후개님께서……!’
후다닥!
서너 걸음 빠르게 달려가 고개부터 푹 숙였다.
“후개님, 기침을 하셨습니까?”
“모두 일찍 수련하는군요.”
“하하하, 그러게 말입니다.”
정전국은 멋쩍은 듯 말했다.
“얍. 얍!”
살천성과 일전을 겪은 뒤부터, 분타의 개방도들은 다들 정신없이 수련에 푹 빠져버렸다.
“와, 다들 열심히 하는군요.”
“후개님께서 많은 깨우침을 주셨습니다. 저놈들이 무공을 수련하는 게 재미있다면서 일찍부터 나오지들 뭡니까. 곧 해가 서쪽에서 뜰 겁니다.”
“좋은 현상이네요. 그럼, 나도 같이 수련을 해보죠.”
남하림은 타구봉을 들고 그들 앞으로 나섰다.
“타구십팔초를 시작하겠소이다.”
“넵, 후개님!”
착!
“공구난마(空拘亂魔).”
파앗!
남하림은 오른발을 들어 땅을 찢듯 강하게 내디뎠다.
쉬이이익-!
쉭.
그와 동시에 타구봉을 내리친 후.
왼쪽으로 몸을 회전하면서 다시 타구봉을 휘둘렀다.
타구봉의 끝에서부터 칼날에 바람이 베어지는 듯한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와아아아-!”
개방도들은 자신도 모르게 환호성을 질렀다.
“뭣들 하느냐? 후개님께서 우리들을 위해 직접 보여주시거늘!”
정전국의 말에 개방도들은 우렁차게 소리를 질렀다.
“공! 구! 난! 마!”
쿵!
쉭-
한꺼번에 내딛는 발소리와 타구봉의 소리는 분명 예전과 달랐다.
“견화타구(犬靴打拘).”
두 번째 초식.
개 발바닥을 패라.
남하림은 제자리에서 뒤로 날아오르듯 타구봉을 바닥에 찍었다.
투투투투투투투-
수십 개의 타구봉이 늘어나는 듯한 잔상이 펼쳐지더니 바닥 위에 구멍이 만들어졌다.
정확히 한 자의 깊이.
삽십여섯 개로 파인 구멍의 깊이는 하나같이 일정했다.
며칠 전 수련을 받았던 그때와 또 다른 무공의 영역.
머리털 나고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장면을 눈앞에서 목격한 개방도들은 가슴이 두근거렸다.
원래 개방도들은 모든 무림인들과 마찬가지로 상승 무공을 익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모두 익힐 수는 없는 법.
그런데,
‘이것도 엄청나잖아!’
십팔초 타구봉법 단 두 초식이 만들어낸 위력이 상상 이상!
십팔초 타구봉법은 이미 자신들이 알고 있는 무공이다.
열심히 수련한다면 후개 남하림과 같은 결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견……! 화……! 타……! 구……!”
희망에 가득 찬 개방도들이 남하림의 동작을 기억한 그대로 따라했다.
새벽 연무장에는 타구봉이 휘둘리는 소리만이 가득했다.
팽유도는 아침이 밝기도 전 울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을 깼다.
“여긴 잠도 없는 모양이다.”
옷을 걸친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오자, 다른 형들, 신소소까지 수련 소리에 일어나 밖으로 나와 있었다.
“어…… 하림 형이네…….”
개방도들과 함께 타구봉법을 펼치는 남하림.
“역시 후개님은 멋진 분이세요. 투덜대는 듯하지만 늘 솔선수범하잖아요.”
당무독은 방금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방금 누가 솔선수범한다고?”
“후개님요.”
“에이, 설마.”
“당 오빠는 항상 부정적이더라.”
“내가?”
당무독은 옆에 성철각을 쳐다보았다.
“응. 소소 말이 조금은 맞아.”
“허얼.”
“없는 건 아니지.”
“휘연 형까지…… 진짜 내가 부정적 성격인가?”
툭툭.
이휘연은 미소를 지으며 당무독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정도는 괜찮아. 사람이 의심 없이 살 수는 없지. 일어난 김에 우리도 같이 몸을 풀어볼까?”
“오, 그렇게 하죠.”
이휘연을 따라 팽유도, 당무독, 성철각 또한 타구봉을 들고 수련에 참석했다.
풍천분타의 개방도들은 그 걸협오성이 모두 나와 자신들과 함께 수련을 시작하자 힘이 솟구쳤다.
기합 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나도…… 같이하면 좋을 텐데.’
신소소는 그들이 왠지 부러웠다.
* * *
때아닌 아침 수련이 끝난 후.
척!
신소소는 허리춤에서 숨겨 놓았던 나무숟가락을 꺼냈다.
“뭐냐?”
“저도 개인 도구는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어때요?”
“괜찮은 자세긴 한데…… 넌 개방도 아닌데 굳이 우리랑 밥 먹을 필요 없어.”
“따로 먹는 건 심심해요. 같이 먹으면 밥맛도 좋잖아요.”
스윽.
신소소는 남하림과 이휘연 사이로 엉덩이부터 먼저 들이댔다.
“야, 어디에 궁둥이부터 밀어 넣어? 저리 안 가?”
“참 후개란 분이 너무하시네요. 전 조금밖에 안 먹어요!”
신소소는 완전히 자리를 잡은 후 숟가락으로 밥을 펐다.
“너도 생각보다 뻔뻔하네.”
“저도 몰랐는데 그런가 봐요.”
슈욱.
신소소는 입에 한가득 밥을 넣고 맛을 음미했다.
“오오…… 너무 맛있네. 지금까지 이런 걸 나만 빼놓고 먹다니.”
“…….”
그녀의 숟가락이 연이어 두 번 밥을 펐다.
남하림은 활짝 웃으면서 밥을 퍼 먹는 신소소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젠 하는 행동은 완전 거지 그 자첸데. 그냥 개방에 입방을 시켜?’
남하림이 살짝 고민하던 그때.
덜컹!
문이 벌컥 열리며 처음 보는 중년 사내가 얼굴을 내밀었다.
“앗, 아빠!”
신소소는 숟가락을 들고 그대로 멈췄다.
“소소…… 야…….”
눈앞에 보이는 딸내미.
세가 공녀다운 어여쁜 소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없었다.
신명항은 충격을 받았다.
‘완전 상거지구나!’
나무 숟가락으로 밥을 퍼 먹는 딸내미의 모습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아빠, 여기 이분이 후개님이야.”
“아…… 후개, 반갑소이다.”
“저어…… 여기 이분은…… 신려세가의 가주님이세요.”
“신려세가의 가주시군요. 반갑습니다.”
“본인도 마찬가지외다.”
“으음…… 지금은 식사 중인데 혹 함께하실까요?”
“아, 아니, 됐소이다. 마저 식사를 하시지요. 이미 먹고 와서…… 밖에서 잠시 기다리겠소이다.”
“아빠. 그럼 기다려요! 빨리 먹고 나갈게요.”
“어어…… 알았다.”
신명항은 당황한 표정으로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신려세가의 가주로서 마음을 추스른 그는 돌아선 채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곳이 개방이군.’
신소소를 만나기 위해 급하게 달려오던 중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허허허…….’
자신 앞을 지나가는 개방도들.
허리에는 호리병들이 달랑거리고 있었고.
가끔 한두 명이 슬쩍 그를 쳐다보았지만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아무렇지 않게 지나갔다.
‘내가 누군지 알고 있나?’
풍천분타 밖으로는 신려세가 무인들이 대거 대기하고 있었다.
더구나 개방도와는 다른 사파.
개방의 입장에서는 비상상태라 할 수 있는데도, 이들은 그저 평온해 보였다.
‘자신감인가? 아니면 개방도의 특유의 기질 때문인가?’
“후후후.”
신명항은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방금 전 숟가락을 들고 밥을 파 먹던 신소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입이 짧은 녀석이었거늘. 항상 챙겨도 잘 먹지 않던 녀석이었는데…… 다행이구먼.”
세가에 있을 때보다 표정도 더 좋아 보이는 듯했다.
잠시 보았지만 걸협오성 사이에서 동료처럼 잘 지내고 있는 듯했다.
‘하긴…… 얼굴 보고 싶어 가출할 정도인 후개가 옆에…….’
신명항은 순간 멈칫했다.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일.
딸자식을 가진 부모라면 언젠가는 당연하게 생각해야 할 일이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윗감으로 후개를……?’
히죽.
갑자기 신명항의 입꼬리가 치켜 올라갔다.
‘가능성은 없겠지만, 뭐 세상일은 아무도 모를 일이지.’
덜컹!
그때, 문이 열리며 신소소의 큰 목소리가 들렸다.
“아빠!”
돌아서자 반갑게 달려오는 신소소의 모습이 보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딸아이보다 뒤에 선 후개의 모습에 시선을 빼앗겼다.
스윽.
신명항은 허리를 숙였다.
“후개, 고맙소이다. 이 말썽꾸러기 때문에 큰 고생을 하셨다고 들었습니다.”
“아닙니다. 큰일도 아닌데요. 오히려 재미있게 여기까지 왔습니다.”
“허허허, 살천성 두 가문을 박살 낸 게 큰일이 아니라는 후개의 배포를 존경하는 바이외다.”
“운이 좋아서 그런 것입니다.”
“대협이군요. 지금까지 많은 인물들을 만나보았지만 후개처럼 겸손한 인물은 보지 못했소이다.”
신소소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으며 남하림을 돌아보았다.
‘……이중인격자?’
“신 가주님 또한 대인의 풍모가 느껴지십니다. 제가 나중에 나이가 들면 닮고 싶을 정도군요.”
‘이젠 아부까지?’
“허허허허! 후개에게 칭찬을 받으니 정말 기분이 좋소이다.”
무공이면 무공.
재력이면 재력.
거기에 어른을 대하는 공손한 태도.
완벽한 사윗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후개를 사위로 삼는다면 천하를 얻는 기분이 들 것 같소이다.”
“아닙니다. 과찬의 말씀입니다. 며칠 동안이었지만, 소소 또한 성격이 맑고 생각도 바른 사람이었습니다.”
“허허, 그렇소이까? 이 녀석을 너무 좋게 보신 게 아닌가 싶소이다.”
신명항은 후개의 말에 기분이 매우 좋았다.
“허허, 실례가 안 된다면 후개의 마음에 든 여인이 있는지…….”
“아…… 제가 못난 탓인지 아직 없습니다. 소소가 말하기를 제가 너무 잘난 체를 잘해 결혼하기 힘들 거라고 하더군요.”
“이런, 이 녀석이…….”
신명항은 눈을 부릅뜨며 신소소를 노려보았다.
“누가 잘난 체를 한다는 것이냐. 보아라, 세상에 후개처럼 겸손한 인물이 없거늘.”
“네? 아빠. 아니라고요. 지금 속고 계세요!”
타악!
신명항은 가볍게 신소소의 등짝을 두드렸다.
“이 녀석아! 후개가 아니었다면 넌 여기까지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항상 은인처럼 곁에서 모셔야 할 게야.”
“……그, 그건 그렇지만.”
신명항은 그러면서 은근슬쩍 남하림의 눈치를 살폈다.
그때,
후다다닥!
“후개님! 후개님!”
급하게 달려오는 발소리.
모두가 분타주 정전국의 목소리만으로 큰일이 생겼음을 알았다.
“무슨 일이죠?”
“그게……!”
정전국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신명항의 눈치를 보았다.
“분타주님, 괜찮습니다.”
“아…… 네에. 저어…… 정문에 살천성이…….”
화락!
순간 신명항의 내기가 치솟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다스렸다.
“후개, 미안하외다. 살천성이라는 말에.”
“아닙니다. 이해합니다.”
남하림은 다시 분타주 정전국에게 물었다.
“살천성이 쳐들어왔다는 건가요?”
“살천성 성주가 후개님을 만나뵙고자 청하십니다. 수하 한 명만을 데리고서 말입니다.”
“나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