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검해 (4)
하늘은 공허하고 무정했다.
무애한 색채에 온정을 느낄 구석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백무량은 목소리를 내지 않은 채 입술을 어물거렸다.
이제 와서 망설임이 생기거나 다른 생각이 든 것도 아니었다.
‘천지불인이라.’
천지는 어질지 못하여 자연 그대로 행할 뿐이니.
자신이 어떤 한을 가지고 있든, 얼마나 강한 의지를 지니고 있던 무애한 민낯을 드러내는 것이 전부였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하늘은 그저 존재하기만 할 것이다.
백무량은 그것을 뒤늦게 깨닫고서 이를 뿌득 갈았다.
“그런 식으로…… 끝내겠다고?”
그저 살아가라.
하늘이 백무량에게 보낸 뜻은 그것밖에 없었다.
떼를 부려도 소용없다는 듯, 쌀쌀한 기운이 전신을 감쌌다.
그렇게 한참 동안 백무량은 가만히 서서 하늘을 노려보았다.
아침에서 저녁.
저녁은 다시 아침이 되어 간다.
무의미한 눈싸움이 체감상 열흘 정도가 흘렀을 때였다.
-이곳까지 온 것은 그저 무의미한 일이었다. 인정해라.
바람 소리가 말처럼 들렸다.
-다시 내려가라. 살아가라. 천의를 이룬 도사로서 천수를 누려라.
“……허.”
백무량이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잠깐 터진 웃음은 전신으로 흘렀다. 어깨가 떨리고 목덜미에서 끅끅 소리가 났다.
-하늘의 말이 우스운가.
고저 없는 바람 소리가 백무량의 어리석음을 꾸짖으려는 찰나.
백무량은 말했다.
“과연, 역시…… 하늘은 어질지 못하구나. 내가 그딴 명령을 듣고 ‘예, 알겠습니다.’ 하고 내려갈 줄 알았나 봐?”
쥐뿔도 모르는 소리다.
명령이든 부탁이든 따를 생각이 들게 말해야 할 것 아닌가?
그런데 저 하늘이란 놈은 명령만 하면 따를 줄 안다.
그것이 우스워서 백무량은 웃고 말았다. 숨이 찰 때까지 웃고 난 뒤에야 하늘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내가 천의를 따른 것은 어디까지나 백련교 같은 놈들한테 복수하기 위해서였던 거야. 가는 길이 같았던 거지.”
-하면, 너는 천상에 반하고자 하느냐?
“맞아, 따르기 싫어.”
백무량은 악동 같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넌 내가 숭앙할 하늘이 아니야.”
도사의 껍데기는 이곳에 도착하기 전에 버렸다.
남은 것은 무인의 반골(反骨)과 하찮은 자존심, 두 개뿐.
백무량의 시선이 자신의 몸뚱이로 향했다.
이곳에 오면서 몸이 메말랐고, 팔뚝도 야위었다. 피를 여러 번 토해서인가 가슴도 불규칙하게 뛰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육신.
악만 남았을 뿐인 몽롱한 정신.
누구보다도 강한 상대를 앞두고서 이 모양이다.
당장 쓰러져서 죽으면 개죽음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백무량이었다.
“내가 성질이 보통 더러운 게 아니라서.”
사문이 답답해서 강호로 뛰쳐나갔던 과거.
반골로 살았던 구천검 백무량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불규칙하게 뛰던 가슴을 억지로 짜 맞췄다.
오로지 백무량의 의지.
신념이 뒤흔들린 육신마저 조율했다.
“마음에 안 들면 따지기도 전에 칼부터 휘둘러 왔거든.”
백무량이 팔을 옆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검이 손아귀에 잡혔다.
백선신검이었다.
팔 년 동안 수천 번 휘두르면서 손때가 묻은 검, 신념으로 휘두른 애병.
백무량은 씩 웃으며 하늘을 향해 백선신검을 겨눴다.
“누구 성질이 더 더러운지 보자.”
-…….
하늘은 대답하는 대신 뇌운을 흩뿌렸다.
순식간에 검게 물든 하늘에 빛 한 점 없었다.
온통 어둠으로 물들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백무량의 마음속엔 등불이 있었다.
‘되돌린다.’
백무량의 과오, 주백천에 대한 망각, 주연호의 희생.
망검의 휘둘린 운명까지도 되찾을 작정이었다.
그것이 검해를 밑바닥까지 가져다 쓴 마지막 후인, 백무량(㓦無量)의 책무이자 책임이다.
“자아…….”
백무량은 얼굴에서 웃음을 지웠다.
그 대신에 광활한 하늘과 칠흑 같은 어둠을 직시했다.
천마와도 비교도 되지 않는 대적이다.
기껏 수백, 수천 년을 살았을 마인이 아니라 천지와 싸워야 했다.
오직 인간 하나의 의지만으로.
무인 하나가 쌓은 무학과 경지로 천지에게 원하는 걸 되찾을 자격을 증명한다.
“앞으로 길어질 것 같은데, 누가 먼저 지칠지 볼까?”
백무량의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하늘이 대답했다.
꽈광!!
뇌운에서 내리친 번개가 백무량을 향했다.
그러나 강한 힘을 이겨 내는 것이야말로 무학의 본질인지라.
휘르륵……!
백무량의 검이 반원을 그렸다. 강격을 흘려 내는 유려한 곡선이 허공에 그려졌다.
멀쩡한 산마저 무너뜨릴 뇌격.
그것을 피하거나 흘리려면 적어도 백분지 일의 힘은 필요했으나, 백무량에게 그럴 여력은 없었다.
그 대신에 많은 것을 불태웠다.
“……크으!”
백무량의 이빨이 뿌득 갈렸다.
의지와 의념이 크게 깎였다. 당장이라도 백선신검을 놓아 버리면 고통에서 해방될 것 같았다.
그냥 포기하면 편할 터였다.
곤륜파에서 여생을 누리다가 죽으면 될 일이고, 여동빈처럼 등선의 기회를 얻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에 무인다운 의미는 없었다. 마땅한 쟁취와 투쟁 같은 게 아니라, 하늘이 주는 여물이나 마찬가지였다.
백무량은 그런 것을 거절했다.
“큭!”
잇새로 신음이 흘렀다. 고통을 이기지 못한 정신이 한순간 새하얗게 질렸다가 천천히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그걸 붙잡는 건 강인한 의지였고 후회의 역사였다.
“거참, 사소한 부탁 하나 못 들어주나.”
-네가 하려는 것은…… 사자(死者)를 생자(生者)로 만들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당연한 율법을 거스르려는 것이냐?
그 말에 백무량은 민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놈의 말이 옳았다.
자신이 하려는 것은 천기를 거스른 죄를 사하라는 억지였고, 죽은 사람의 영혼을 지상으로 옮기려는 짓이었다.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부끄러운 짓이라는 건 알지만, 죄라곤 생각하지 않는다.
백무량은 품고 있던 본의(本意)를 내뱉었다.
“네 뜻을 이뤄 주기 위해 죽은 도사의 넋이고, 혼이다. 그들에게 작은 온정 하나 베풀어 주기조차 어렵단 말이냐? 마지막에 이룬 나한테는 그저 천수나 누리며 평안하게 살라고?”
-…….
하늘의 번개가 한순간 멎었다.
백무량은 이를 뿌득 갈며 말했다.
“웃기지 마라. 사소한 선물 하나에도 고맙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도리고, 예법이다. 네가 모든 사람이 숭앙하는 하늘이라면…… 적어도 빚을 져선 안 되지 않으냐?”
절규와 같은 목소리가 검해 전체에 메아리쳤다.
백무량은 속에 있는 감정을 그대로 쏟아 내며 눈을 부릅떴다.
눈물이 작게 흘렀지만, 닦지는 않았다.
그 눈물이 의지를 더더욱 부풀렸다.
“받아 가겠다. 네가 빚을 갚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멱살을 잡아서라도 받아 가겠다!”
-그러한가?
하늘은 여전히, 지독하게도 무정했다.
-나는 율법을 지키겠다. 너는 네가 하려는 것을 하라.
“하, 그렇게 나와야지.”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꽉 쥐었다.
언제 끝날지도 모를 격전을 이어 가면서, 마음속에서 불굴(不屈)을 되새겼다.
***
“편지 하나만을 남기고 사라지셨다고.”
현종휘는 백무량이 있었던 암자의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참, 사조님다운 방이구나.”
어딜 봐도 자질구레한 것들이 어지럽게 널브러져 있었고, 비급을 쓰다가 흘렸는지 지필묵 자국도 남아 있었다.
아무리 좋게 말해도 명문의 도사답지 않다.
그에 반해서 도학이 적힌 서적은 깨끗하기 그지없었다.
“……삼대제자한테 그대로 줘도 되겠어. 도학은 아예 펴 보지도 않으신 건가.”
참으로 우스웠다.
분명 자기가 이제부터라도 도학을 좀 살펴보겠다고 하였는데.
결국 펴 보는 게 너무나도 귀찮았던 모양이다.
백무량다운 구석이 방 하나하나에 묻어 있어서 피식 헛웃음이 나왔다.
현종휘의 눈길이 이곳저곳에 닿았다.
그러다가 방 한구석으로 향했다.
“…….”
자질구레하고, 더러운 방.
둘러보는 것조차 어지러운 공간에서 오직 한 곳만이 깨끗했다.
“하, 사조님. 아니, 형.”
소년일 때.
백무량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을 때만 불렀던 호칭을 입에 담았다.
그러지 않으면 복잡한 감정을 풀기가 어려울 것 같았다.
현종휘가 두 무릎을 꿇고서 한 비급을 붙잡았다.
[구천화우검]
구천화우검의 비급 옆에 구겨진 종이가 수북했다.
그러나 비급과는 뒤섞이지 않게끔 거리가 꽤 있었다.
‘이걸 쓰기 위해서 몇 번이고 생각을 정리한 건가.’
수십 개의 쌍욕이 쓰여 있질 않나, 대충 쓰면 검해가 알아서 도와주던 게 참 편했다고 적혀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겐 절대 보여 줄 수 없는 사담(私談).
그마저도 백무량다웠다.
현종휘는 비급을 양손으로 잡고서 한 쪽씩 넘기기 시작했다.
사박, 사박.
보기 좋게 정리된 묘리.
어느 것도 허투루 흘리면 안 된다는 정신론.
심지어 즐겨 쓰던 호천풍연의 파생 초식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지저분한 방과는 달리 아주 깨끗하게 적힌 비급이었다.
분명 심혈을 기울여서 썼을 것이다.
“……이런 걸 쓰고 있다면 진즉 말해 주지.”
헛웃음이 나왔다.
현종휘는 비급을 가장 깨끗한 곳에 내려놓고서 벽에 몸을 기댔다.
그러고서 백무량이 남겼다는 편지를 폈다.
[무인 구천신검, 도사 백무량, 장문인의 선배, 대사형의 스승으로서 남긴다.
금방 돌아오마.]
“스승.”
현종휘의 표정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위태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펑펑 쏟을 것 같은데, 그러기가 싫었다.
그렇게 하면 백무량이 앞으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았다.
유약하던 소년으로 되돌아간 기분이었다.
“어디로 간 건지는 남기고 가야지, 이게 대체 뭐요?”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서 편지를 구길 뻔했지만, 가까스로 참았다.
현종휘는 편지를 비급 위에 곱게 두고서 방 중앙에 앉았다.
한 시진, 두 시진.
가벼운 요기조차 하지 않고 생각을 정리했다. 백무량이 간다는 곳이 어딜지 고민해 봤다.
하지만 쉽게 떠오르진 않았다.
‘무공을 잃은 사조님이 곤륜도의 눈을 피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어딜까?’
설마 등선이 아닐까?
그 가능성을 점치던 현종휘가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야. 금방 돌아온다고 했으니까, 그건 아닐 거야.’
하물며 백무량이 먼저 등선한 신선의 바둑판을 닦는 광경이 상상되지 않았다.
현종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고개를 떨궜다.
“정말 사라지신 건가……?”
개방과 황실에 알리는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찾아야겠다고 생각한 현종휘가 자리에서 일어난 순간.
꽈과광!!
거대한 폭음이 암자 밖에서 터졌다.
깜짝 놀란 현종휘는 검을 붙잡고서 문을 박찼다.
감히 누군진 모르나, 백무량의 암자를 부수게 둘 순 없었다.
그곳엔 처음 보는 도사가 멀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 그놈이 진짜 기어이 해냈구나.”
그가 영문 모를 소릴 중얼거리기에 현종휘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은 뉘시오!”
“어…… 반갑다. 맨날 남 눈으로 보다가 내 눈으로 보니까 유명한 사람을 만난 것 같아서 신기하네.”
“말하지 않으면 베겠소!”
“곤륜이 언제부터 이렇게 정이 없어졌어? 나 때는 적어도 일다경 정돈 대화했는데.”
도사가 피식 웃으며 겉옷을 벗어 던지자, 안쪽에 특이한 단어가 적힌 도복이 보였다.
심천(心天).
그 도복을 본 현종휘의 인상이 찡그려졌다.
“당신은…….”
“이제 알아보겠느냐? 나는…….”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 온 모양인데, 내가 내려가는 길을 안내해 주겠소.”
“…….”
도사, 심천검은 자기를 안쓰러운 눈으로 보는 현종휘에게 자존심이 크게 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