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74화 (274/275)

곤륜검해 (5)

“백무량은? 그놈은 어디에 있느냐?”

“뉘신대 사조님의 존함을 함부로 말한단 말이오!”

현종휘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심천검을 꾸짖었다.

심천검으로선 어이가 없는 말이었다.

“이 녀석아, 내가 녀석이랑 얼마나 막역한 사이인데 말을 그렇게 하느냐?”

“…….”

정신이 나갔군.

현종휘의 표정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심천검은 답답하다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다가 한마디를 덧붙였다.

“너를 이해시키는 것보다 그놈이랑 마주하는 게 더 낫겠다.”

“……안 계시오.”

“그게 무슨 말이야? 백무량 그놈이 왜 없어?”

심천검은 진심으로 당황하여 되물었다.

일찍이 죽었던 자신이 현세로 되돌아왔다.

그건 즉, 백무량이 하늘의 뜻을 꺾었다는 뜻인데…… 자기 안위는 기가 막히게 챙기는 녀석이 희생했을 리가 없었다.

그 사실을 모르는 현종휘로선 심천검이 무례하게 보일 뿐이었다.

“갑자기 나타난 것도 그렇고, 사라진 사조님을 놈놈거리는 것도 불쾌하군.”

“아, 아니, 너랑 싸우자고 한 말은 아니야.”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마시오. 사정을 다 들을 때까지 허하지 않겠소.”

현종휘가 검을 뽑아 들자, 심천검도 살짝 부아가 치밀었다.

‘한번 들이받아?’

자기도 무척 혼란스러운데, 까마득한 후배가 저렇게 까칠하게 구니 짜증이 났다.

물론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사문 내, 그것도 백무량의 처소 근처에서 갑자기 나타난 도사가 적처럼 보일 만했다.

하지만 심천검은 이성으로 움직이지 않았다.

“허하지 않아? 네가?”

쿠구궁……!

백무량을 보고서 가히 완성에 가까워진 태청신공이 주변을 강하게 짓눌렀다.

같은 내공심법을 익힌 현종휘마저도 한순간 움츠러들 정도로 고강한 경력이었다.

그제야 현종휘는 심천검의 내력을 알아차렸다.

“고인은 누구신지요?”

“백무량이 품고 있던 심상. 그 안에 내가 있었다.”

“……!”

어쩌다 한 번씩 백무량이 말하곤 했던 심상, 검해.

그곳에서 왔다는 도사에게 현종휘는 감탄했다.

“아직 얼떨떨하지만, 태청신공의 깊이를 보니 참으로 대단하시오.”

“흥, 이제야 알았느냐?”

“혹시 가르치는 것도 뛰어나신지요?”

“나에게 한 수 배우는 것보단 얼른 그놈을…….”

“삼대제자가 너무 많아져서 인력이 부족합니다. 사조님이 돌아올 때까지라도 곤륜파의 장로로 있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

심천검이 뭐 이런 놈이 있냐는 시선으로 쳐다보자, 현종휘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우리가 굳이 찾지 않아도 돌아올 겁니다, 사조님은.”

“이 아해야, 무량이가 누구랑 싸우는지는 아느냐? 어디서 죽어 갈지도 모르는 판국에 가만히 기다리자고?”

“고인이 보기에 사조님은 어땠습니까?”

“……그건.”

심천검의 말문이 순간 턱 막혔다.

상단전에서 봐 왔던 백무량의 오만과 담대함, 그리고 목표하는 것을 이루는 집념까지.

설령 천의에게 대항할지라도 백무량은 불굴했다. 꺾이지 않는 무인의 기상이 그에게 있었다.

심천검은 그제야 현종휘의 미소를 보았다.

“믿는 거냐?”

“예.”

“……방치가 아니라?”

심천검은 무뚝뚝한 어조로 말했다.

현종휘가 거대한 암반을 가르는 모습을 보지 못했기에, 심천검에게 그는 그저 백무량의 어린 후배이자 제자였다.

그래서 백무량의 업을 도울 생각을 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것처럼 보였다.

“가 봐야 소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냐?”

“사조님을 오래 보셨다지만, 하나는 모르시는군요.”

“뭐?”

“무량이 형은, 옆에 있는 사람이 헛되이 살도록 두지 않습니다. 하물며 도움이 필요하면…… 직접 말씀하셨겠지요. 그것이 어떤 싸움이든 말입니다.”

현종휘에게 있어 백무량은 형이었고, 스승이었으며, 까마득한 사조였다.

그때마다 가르침을 주거나 떼를 들어주었고, 도움을 청하기도 했다.

물론 백무량이 검해에서 현실과는 다른, 아주 긴 시간 동안 싸웠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그저 믿었다.

백무량이라서 믿었다.

“고인께서 본 백무량은 달랐습니까?”

“…….”

심천검은 잠시 턱을 매만졌다.

고민은 짧았고, 답은 빨랐다.

“참나, 누가 들으면 의심이라도 한 줄 알겠어?”

“하하.”

“녀석의 이름을 막 부른 건 나중에 일러줄 거다.”

심천검이 씩 웃으며 말하자, 현종휘도 빙긋 웃었다.

***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났다.

심천검을 제외하곤 누구도 검해에서 돌아온 사람이 없었다.

백무량이 그토록 꺼내 주길 염원하던 주백천의 잔재도 돌아오지 않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심천검의 마음만 답답해졌다.

“주백천 모르냐?”

“선배님…….”

현노윤은 고개를 작게 저었다.

심천검이 저렇게 물어보기 시작한 지도 어언 반년.

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없던 기억이 되돌아오진 않았다. 하물며 망검이나 백노 같은 옛 선배가 곤륜파를 찾아오는 일 또한 없었다.

“하, 진짜 환장하겠네. 설마 나만 구한 건가?”

심천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일 년이나 지나니 믿음도 조금씩 무너졌다. 곤륜도의 표정에 조금씩 심려가 깊어지는 것이 보일 정도였다.

그러나 현종휘는 달랐다.

언제나 그렇듯, 열흘마다 백무량의 처소를 청소하곤 했다.

그걸 안쓰럽게 보는 눈도 있었지만, 현노윤이 불호령을 내리며 꾸짖어 댔다.

-사조님이 계셨던 자리를 항상 깔끔하게 해 두는 것이 우습더냐?

-아, 아닙니다. 그게…….

-시끄럽다! 참회동에 사흘 동안 있거라!

그럴 때마다 현노윤도 내심 믿음이 깎이는 것이 보였다.

심천검은 동지를 찾은 것 같아서 그를 자주 찾아갔다.

“백무량이 그렇게 괴팍했는데 말이야…….”

“허, 그랬습니까?”

“아무렴! 내가 본 도사 중에서 제일 돼먹지 못한 놈이었다!”

심천검은 히죽 웃으며 뒷말을 덧붙였다.

“뭐, 그래서 더 믿음직스럽긴 했지만.”

“왜 그리 생각하셨습니까?”

“너도 백무량과 가까웠으니 알 것이다. 그놈이 한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하면 이룰 때까지 떼를 쓰지 않았더냐?”

“아…… 그랬지요.”

현노윤의 얼굴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맺혔다.

그러나 그 미소 한구석에 슬픔이 있었다.

일 년이나 지난 지금, 언제 만날지 모른다는 감정이 언뜻 드러났다.

하물며 현노윤의 나이가 어느새 일흔.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멀쩡히 걷는 것보다 누워 있는 시간이 길 터였다.

“아주 예전에, 사조님께서 어린 육신일 때…… 그렇게 말렸는데 말입니다. 운산보와 담판을 지어야겠다고 떠나셨지요. 남들이 보기엔 소년에 불과했는데요.”

“……그놈답구만.”

“예, 무작정 내려가셨지요. 그때도 도사보단 무인에 가까우셨습니다. 도사의 도리보단 무인의 업(業)을 따르셨지요.”

그 말에 심천검이 ‘허’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참 좋게도 말해 주는구나. 그냥 성질을 자주 부린 것이지.”

“그 성질이 천하를 평안하게 만들었다면, 영웅의 기상이라고 불려도 좋지 않겠습니까?”

“…….”

그 말에 심천검이 순간 침묵했다.

영웅담의 주인공.

백무량이 되고자 했던 길.

그 뜻을 이루고자 걸었던 험난한 여정이 심천검의 기억 속에서 생생하게 떠오르다가 지워졌다.

“……그랬지.”

결국엔 자기 성질을 이기지 못해서 하늘과 담판을 짓지 않았나.

그저 천수를 누리다가 죽으면 될 것을, 검해에 묶여 있던 망령들의 빚까지 받아야겠다며 대들지 않았나.

심천검은 피식 웃다가 주먹으로 바닥을 꽝 내리쳤다.

“진짜, 빌어먹을 놈이었지. 누가 바라지도 않았는데 말이야. 천마한테 이겼으면 얌전히 즐겁게 살다가 뒈질 것이지.”

“……즐겁지 않았을 겁니다.”

“뭐?”

“제가 봐 온 사조님이라면, 찝찝하다고 온종일 칭얼거리거나 성질을 부리셨을 겁니다. 저는 제명보다 빨리 죽고, 곤륜파는 매일 시끌벅적했겠지요.”

현노윤이 엷게 웃었다.

기력은 부족했지만, 눈빛은 형형했다.

“빚은 반드시 갚을 사람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릇이 대접보단 종지만 한 놈이긴 했지.”

“흘흘.”

“그나저나 주백천의 이름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러냐?”

심천검은 혀를 쩝 차며 찻잔을 들었다.

‘이대로 계속 기다리다가, 끝까지 안 오면…… 직접 찾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우습기는 했다.

검해에서 해방되면 인생이나 거나하게 즐기려고 했는데, 빠져나오지 못한 후배 때문에 또 들어갈 생각이나 하다니.

‘……그렇다고 빚을 제자 가르치기로 대신할 생각은 없지만.’

솔직하게 말해서, 곤륜파의 제자를 가르치는 건 너무 쉬웠다.

곤륜파가 가히 천하제일문파가 되면서 천하의 기재가 몰려들었다.

게다가 심천검에게 보내지는 것은 대부분 벌모세수를 마친 명가의 자식.

‘예의가 너무 똑바르면 애 같은 맛이 없어서 재미가 없어.’

백무량처럼 막말하는 놈까진 아니더라도, 조금은 순수한 척이라도 하면 뭐가 덧나나.

무학에 눈을 미친놈처럼 번쩍거리는 놈들을 보자니 기가 질릴 정도였다.

심천검은 제자들을 떠올리며 쩝쩝거렸다.

“후우…… 이렇게 한가로운 것도 참 심심하구나.”

“그리 말씀하시지 마십시오. 또 혼란이 일어나면 제가 힘듭니다.”

“그래, 그래. 나도 안다.”

심천검의 목소리가 한순간 진지해졌다.

“그놈이 만든 평화가 다시 어지러워지면 나도 참기가 어려워질 것 같으니까.”

“……흘흘.”

심천검과 현노윤이 다시 찻잔을 따르는데, 문이 별안간 열렸다.

“여기서 마시고 있었구만!”

현노윤 못지않게 나이 든 노인.

송우현이 술이 든 호리병들을 보라는 듯 흔들었다.

찰랑!

척 보아도 비싼 주향이 방 안을 가득 채우자, 심천검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송 노야가 나보다 육신의 나이가 많으니, 주도(酒道)를 지켜야겠군.”

“허, 허…….”

자연스럽게 술로 넘어가는 심천검을 보며 현노윤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러다 별안간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음?”

거대한 울림이 곤륜산맥을 휘감았다.

짐승의 울음소리 같기도 했고, 폭풍이 가지를 거칠게 흔드는 소음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안에 익숙한 기척이 있었다.

그것도 한둘이 아니었다.

“……으윽.”

현노윤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아주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기억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걸 본 심천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술 생각은 아예 머릿속에서 날아갔다.

“나갑시다!”

송우현도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달려 나갔다.

나이가 들어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양발이지만, 지금은 약관 부럽지 않았다.

어떤 신묘한 힘이 송우현의 달음박질을 돕는 것 같았다.

그 행렬에 현종휘와 유성한, 철유가 함께했다.

“이건…….”

“그래, 분명하다.”

현종휘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돌아오시는 거다. 그것도 기다린 만큼, 아주 즐거운 소식을 가지고서.”

깊은 연무(煙霧).

운해가 짙게 낀 곤륜산맥의 전경에 희끄무레한 형상이 나타났다.

심천검을 비롯한 곤륜도는 그 형상을 눈을 부릅뜨며 지켜봤다.

그러나 단 한 명.

“아, 드디어…….”

송우현은 한쪽 눈에서 눈물을 흘렸다.

지금까지 쭉 잊고 있었던 은혜.

자신의 인생을 점소이에서 끝나지 않게끔 가르쳐 준 도사.

그가 저 멀리에서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아주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이었다.

“주, 주백천…… 도사님…….”

가까스로 떠올린 기억에 송우현이 두 팔을 크게 벌렸다.

그와 동시에 운해가 걷히며 형상의 정체가 드러났다.

검해의 망령들이 육신을 가진 채 서 있었다.

주백천, 주연호, 망검, 백노, 유성백, 무명에 이르기까지…….

천의에 의해 상처 입고 잊혔던 사자(死者)가 모두 되돌아왔다.

그들의 중앙에 백무량이 있었다.

백무량은 망령들을 대동한 채 바다처럼 밀려왔다.

그 자체로, 곤륜의 검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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