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검해 (3)
백무량은 방에 홀로 앉아서 턱을 괴었다.
‘어떤 편지를 남기고 가야 할까?’
사실상 유서가 될지도 모르는 기록이 아닌가!
이 백지를 어떻게 채워야 하나, 깊게 고민하다가 첫 줄을 기록했다.
[고맙다.]
거기까지 쓰다가 지웠다.
속에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막상 쓰려니까 고민이 되었다.
다 쓰자니 자질구레하고, 부끄러웠다.
첫 줄을 채우기가 이렇게 어렵다.
백무량은 한숨을 쉬었다가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창가 밖, 위문엽이 떠난 자리에 적막과 어둠만이 있었다.
그놈도 어렴풋이 알아차렸을 터였다.
자신이 어디론가 멀리 떠나려고 한다는 것을.
그 예의 없는 놈이 ‘스승님’이라고 말한 건 그 이유였을 것이다.
“……말리지 않고 갔단 말이지.”
예전이었다면 자기랑 한참 싸워 달라고 했을 텐데.
백무량은 피식 웃다가 손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검해는 메마른 그대로였고, 태청신공의 운용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한번 조화를 이룬 천주는 여전히 남아 있었다. 하늘과 한순간 맞닿았던 감각이 선명했다.
종결식.
천마에게 휘둘렀던 그 감각이 머릿속에 어렴풋이 남았다. 상단전이 하늘을 발판으로 삼아 승천하던 순간이었다.
그 직후에 이어진 유천앙시엔 혼을 담았다.
‘내공은 없어도 돼.’
한순간이었지만, 깨달았다.
내공이나 영기, 선기든 결국 자기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힘.
무인은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무공을 익힌다.
무학(武學)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또한 무공을 익히면서 자기를 알아 가기 때문이다.
그 끝에 하늘이 있었고.
백무량은 그 하늘을 넘었었다. 그래서 천마를 이겼었다.
‘그때의 감각만 다시…… 내가 체현할 수 있다면.’
검해를 통해 하늘과 직접 담판을 지을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주먹을 꽉 쥐었다. 그 목표를 떠올리니 백지에 무엇을 적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많은 말을 남길 필요가 없었다.
“미련한 짓, 해 봐야.”
각오만 줄어들 뿐이다.
백무량은 피식 웃고는 짤막하게 썼다.
[무인 구천신검, 도사 백무량, 장문인의 선배, 대사형의 스승으로서 남긴다.
금방 돌아오마.]
이곳에 남길 말은 이것으로 족하다.
백무량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생애 마지막, 검해로 향하는 길.
그 길을 통해 검해에 도착하는 시간은 생각보다 더 짧았다.
찰나에 불과했지만, 육신을 천하에 두고 온 듯한 해방감이 전신을 휘돌았다.
뒤이어 시야에 들어온 광경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오, 이런.”
광활한 대지.
완전히 말라붙은 검해가 시야에 가득했다. 끝도, 처음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백무량은 그 광경을 눈에 담고서 앞으로 향했다.
저벅, 저벅.
걸음마다 기억이 떠오르고 사라지길 반복했다.
메마른 땅바닥이라지만, 물길이 있었던 자국은 있었다.
검해에서 수없이 수련에 매진했던 백무량이기에 알아볼 수 있는 흔적이었다.
“그땐 참…….”
무명과 함께 천중수 아래에서 일 합을 나누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도 그런 동굴은 어떻게 만들었는지 모르겠군.”
백노가 만들었던 동굴에서 행했던 비무를 회고했다.
그곳에서 공동파와 화산파의 무학을 궁구하며 익혔다. 천마와 싸우기 전까지 유용하게 써먹었던 가르침이었다.
그렇게 여러 곳을 거닐었다.
처음 검해의 망령들과 마주했던 장소.
선배들이 성불한 언덕과 동굴, 검해의 중앙.
유성백의 성불을 떠올린 백무량의 얼굴에 헛웃음이 맺혔다.
‘유 선배는 잠깐 유성한한테 빙의하긴 했지만.’
길게 이야기하진 못했다. 천마를 쓰러뜨리고 나니 유성백의 혼백은 이미 떠난 지 오래였다.
그게 못내 아쉬웠지만, 그러할 인연이라고 여겼다.
‘예전이었다면 하늘을 원망했겠지.’
하늘의 뜻을 부정한다는 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니까.
백무량은 고개를 높게 들어 검해의 하늘을 보았다.
메마른 검해와는 다르게, 언제나 푸르렀고 중간중간에 층층이 쌓인 구름이 떠다니고 있었다.
“저긴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그럴 것 같네.”
천마와 싸우면서 내공을 잃었고 검해가 메말랐다.
무인으로서 기능하던 기감과 육감이 죽었다. 천이통을 각성한 것도 무용지물이 되었다.
그러나 지금 이곳에 서니, 강한 기시감이 들었다.
“그래, 저곳이구만.”
인연의 이끌림.
하늘로부터 되찾고자 하는 사람의 기운이 드높은 곳에서 느껴졌다.
그곳에 천의(天意)가 여러 영혼과 함께 있었다.
백무량의 입술이 씰룩였다.
“누가 못 갈 줄 알고?”
천의가 백무량을 되살렸듯, 이번에는 백무량이 천의를 끌어당길 차례다.
백무량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지극한 숨소리가 검해 전체를 울리는 듯했다.
태청신공으로 쌓아 올린 내공은 하단전에 없었다.
신단으로 얻은 영기는 중단전에서 씻은 듯 사라졌다.
도문의 성지에서 얻은 선기마저 천마와 싸울 때 모두 써 버렸다.
백무량의 몸엔 이제 어떠한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검해에서 백무량은 그저 힘을 잃은 방랑자에 불과했다.
수상비(水上飛)는커녕 초상비조차 불가능.
……그러나 불가능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무인인지라.
“자, 어디 한번 누가 이기나 해 보자.”
백무량은 도사의 껍데기를 벗었다.
무인으로서 히죽 웃으며, 의지로 의념을 끌어 올렸다.
그 의념이 하늘을 바라보았다.
광활한 허공에 존재하는 천의를 향해 발을 뻗었다.
……쿵!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계단 같은 것이 밟혔다.
“…….”
기절초풍해도 이상하지 않을 일이었지만, 백무량의 표정은 평온하고 정신은 명정했다.
이제야 깨달았다.
검해는 천의만 주무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뭐야, 그렇게 어려운 것도 아니었구만.”
백무량은 씨익 웃으며 발을 재차 내디뎠다.
콰앙!
포탄을 갈긴 듯한 폭음이 길게 퍼졌다.
백무량의 힘이 되돌아와서도, 천의의 방해가 있어서도 아니었다.
오직 백무량의 정신.
의념이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았던 허공에 새로운 구조물을 창조하고 있었다.
백무량은 하늘을 향해 말을 걸었다.
“이제 당신만 검해를 주무를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천마와의 싸움에서 한순간 닿았던 상천(上天)의 경지.
천애의 협로 너머, 인간이라는 소우주(小宇宙)를 넘어서 커다란 굴레에 손끝이 닿았다.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 경지를 넘어선 백무량에게 이제 내공이나 영기, 선기 따위는 무용했다.
“어디 한번 얼굴이나 보자고.”
백무량은 또다시 발을 내디뎠다.
쿵…… 쿠웅!
이번에는 두 걸음.
거리가 먼 것을 생각해서 보폭을 크게 넓혔다.
위로 올라설수록 소음이 너무 커져서 이명이 머리를 때릴 정도였다.
“……끄으.”
귀에서 진물이 흐르고, 내부도 진탕되어 입가에서 핏물이 줄줄 흘렀다.
그러나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삐이이-!
이명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백무량이 좁디좁은 계단에서 할 수 있는 발버둥이라곤 가끔 몸을 비틀거리거나, 고개를 내젓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정신이 흐트러지진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떨어질까 보냐?”
하늘을 바라보는 시선에 집념이 있었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무인의 눈이었다.
‘죽음조차 극복하겠다.’
각오는 그렇게 다졌지만, 상황은 좋지 않았다.
머리를 방망이에 얻어맞은 것처럼 시야가 흔들렸다. 제대로 된 생각을 품는 것도 조금씩 어려워졌다.
그때마다 기억이 하나씩 시야를 스치고 지나갔다.
-이 또한 곤륜을 위해 남긴 안배라고 믿겠소, 사형.
-다음에.
-위에서 지켜보겠다.
검해의 망령들과 쌓은 인연, 기억, 감정.
그것이 백무량의 정신을 강하게 붙들었다.
그래서 부서지지 않았다. 포기하거나 낙관하지 않았다.
-조금 더 나아가라.
이제는 사라진 망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귓가를 스쳤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안다, 압니다, 알아요.”
여기서 꺾이면 평안한 여생을 살아야 한다.
좋은 이야기였다.
평생 현씨 조손과 대화하고, 어린 곤륜도와 대화하며, 조금씩 가르치면서 살아가면 행복하게 천수를 누릴 수 있었다.
……누구나 바랄 인생이겠지만, 백무량에겐 그렇지 않았다.
“행복한 천수는 됐어.”
백무량은 곤륜도이나 무인으로 살아갔다.
천의를 이은 것도 도사가 아니라, 백련교주에게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행했다.
그 마음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도사였다면 천의에 순응했겠지만, 무인이기에 천의에 다다르길 원했다.
“천마도 죽었는데, 그놈보다 센 존재가 당신밖에 없어서.”
도전이라는 말도 부족했다.
그저 범접하는 것만으로 이 모양이다.
내력이 온전하였더라도 멀쩡한 행색으로 마주하는 건 불가능했을 터였다.
하지만 두려워하진 않았다.
백무량의 심상에서 천의는 싸워서 쟁취할 상대였지, 무릎을 꿇고서 충성할 하늘은 아니었다.
“나는 무인이라서, 도사처럼 생각하진 못해.”
사형이 이걸 가지고 얼마나 호되게 꾸짖었던가?
곤륜파의 도사면서 도학은 쥐뿔도 모르고, 하늘도 숭앙하지 않았다.
백무량이 그런 무인이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러니까, 생떼 좀 부리자고.”
쿨럭.
피가 입가에서 토해졌다.
속에 있는 핏물을 모두 게워내지 않으면 풀리지 않을 고통이었다.
“쉽게는 안 된다 이거지?”
백무량은 억지로 피를 삼키며 위로 향했다.
좋게 말해서 치기고, 나쁘게 말하면 미련함이었다.
무인이 억지를 부리면서 금강석에 머리를 부딪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백무량이었다.
“내가,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로 했거든.”
사형과 한 맹세.
검해의 망령들과 한 이야기들, 인연.
그 모든 것이 백무량을 이곳으로 이끌었다.
싸움밖에 모르던 백무량을 무인으로 만들었다. 도사로서 생각하는 법을 가르쳤다.
천마에게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사실, 천의보단 검해의 망령들 덕분이었다.
“천마도 해치워 줬잖아? 그런데 선배들 취급이 이게 뭐야. 나만 행복하게 살 순 없잖아.”
아직도 주백천의 이름은 천하에서 잊혀 있다.
주연호의 희생도 백무량밖에 알지 못했다.
망검과 심천검, 백노가 품었던 고뇌나 행적도…… 강호의 모두가 알아야 한다.
아니,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백무량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비틀어졌다.
“내 마음대로, 직성이 풀릴 때까지 이곳에 있겠어. 모두 나한테 돌려줄 때까지 말이야.”
무인의 의지가 하늘마저 꺾어 버리는 순간.
저벅, 저벅.
백무량은 마침내 하늘 위로 올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