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륜검해 (2)
축하연으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났다.
“오셨어요?”
밝은 웃음이 백무량을 맞이했다.
휘익, 탁.
수많은 청년과 소년 들이 각자의 실력에 따라 비무를 하고 있었다.
제대로 초식을 펼치는 것보다 엉거주춤한 움직임이 더 많다. 어쩌다 맞아도 운에 의한 것이 대다수였다.
“요 녀석들.”
백무량은 빙긋 웃으며 아이들을 한차례 지켜보다가, 과거에 삼대제자로 들인 청하에게 다가갔다.
“그래, 지낼 만은 하고?”
“지낼 만하다니요? 요즘만큼 즐거웠던 적이 없어요!”
그 말에 백무량은 청하의 신색을 쓱 훑어보았다.
자신처럼 고아였던 아이는 세월의 시류에 묻혀 사라지기라도 한 걸까?
청하는 어엿한 청년이 되어 곤륜파의 일원으로 자리했다.
본래 뛰어났던 눈썰미만큼이나 검의 재능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무공을 직접 가르치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뭐, 제대로 보여 줄 수가 있어야지.’
천마와의 싸움.
그 끝에서 백무량은 검해의 파도를 모두 소모했다.
태청신공의 내공 또한 말라붙어서 제대로 된 초식을 펼칠 수가 없었다.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그러나 포기하지는 않았다.
태청신공이나 검해 말고도 자신이 펼칠 수 있는 무공이 무엇일지 더더욱 궁리했다.
금분세수 같은 거창한 행사를 열지 않은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생각을 정리한 백무량은 청하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고생이 많구나.”
“고생은요. 동생들이 많아졌다는 느낌뿐입니다. 가끔 찬장에 숨겨 두었던 찬거리가 사라지기도 하지만요.”
그렇게 말한 청하가 피식 웃었다.
한 아이의 정수리를 째릿 쳐다보는 걸로 보아 누군지도 알고 있는 듯했다.
“가끔은 솔직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이런, 당과라도 사 올 걸 그랬나?”
“괜찮아요. 몇 개를 가져오시든 한 식경이면 손가락만 빨고 있을 겁니다.”
“……요즘 애들은 먹성이 좋구나.”
떨떠름한 표정을 지은 백무량은 아이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어쩐지 눈에 익은 얼굴이 뜨였다.
백무량의 발걸음이 구석에서 마보세를 연습하고 있는 아이에게 향했다.
“아이야.”
“……예?!”
갑자기 뒤에서 나타난 탓에 아이는 뜨악한 표정을 지으며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백무량은 아이의 무릎이 살짝 굽혀진 것을 보고, 낯빛을 굳혔다.
임전(臨戰)에 가까운 모양새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성씨가 어떻게 되느냐?”
“어, 음.”
대답하길 잠시 망설이던 아이는 부쩍 시무룩해했다.
“구(求)씨요. 본적은 연경(燕京)이고요.”
백무량은 아이가 어느 가문의 자식인지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구횡 장군의 자제로구나.”
“……힝.”
투욱.
힘없이 검을 내려놓은 아이를 보며 백무량은 아직 이름을 묻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 미안하구나. 이름도 아직 듣지 못했는데 말이다.”
“구상천(求霜天)이요.”
“그래, 상천아.”
실망하는 기색이 만연한 구상천의 모습에, 백무량은 제자리에 앉았다.
“내 이름은 백무량이라고 한단다.”
“백, 백무량?! 설마…….”
쉿.
더 말이 나오지 않게 입을 막은 백무량이 빙긋 웃었다.
“내가 유명하긴 하지.”
“그, 그렇다면 아저씨가…… 천마를 죽인 구천신검이라는 거죠?”
아저씨라는 말에 일순간 백무량의 눈썹이 꿈틀거렸으나 딱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아직은 아저씨라고 불리고 싶지는 않은지라, 백무량은 구상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아저씨라고 하니 왠지 모를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느냐. 그냥 형님이라고 불러라.”
“에, 예, 형님.”
“그래서, 장군의 자제가 어떤 일로 여기까지 와서 검술을 배우려 했느냐?”
그 말에 구상천은 머리를 쓰다듬는 백무량의 손을 묘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수많은 역경과 고전으로 인해 새겨진 상처.
고대의 마인, 천마를 쓰러트린 손이 바로 저 손이었다.
그의 제자가 되고 싶은 건 당연한 일인지라.
구상천은 자기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형들을 떠올렸다.
“그, 그거야 당연히 저도 장군이 되고 싶어서죠.”
“왜?”
“제가 막내거든요.”
아,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탄성을 냈다.
명가의 여식이나 막내아들은 유력 가문과의 친교를 맺기 위해 혼처를 잡아 놓는단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구상천도 그런 올가미에 묶여 있었던 것인가.
백무량은 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그렇다면 여기까지 올 필요가 없이, 거기서 직접 배우면서 자기 뜻을 관철하면 될 일이 아니더냐.”
“네?”
“여기 있어 봐야 너는 가문 내에서 바깥에서 배운 아이로 취급받을 것이다. 이건 네가 곤륜의 제자라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이 되어서 하는 말이다.”
구상천의 눈이 한차례 깜빡였다.
“아닌데요.”
“……?”
“형님께서 아직 모르시는 게, 황실 사이에서…….”
줄줄이 이어진 구상천의 이야기는 다음과 같았다.
-황실과 군문에서 재능이 뛰어난 아이들을 선별하여 곤륜파로 보내고 있다.
이를 들은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렸다.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있었다 보니 사문을 너무 평가절하 하고 있다.
재능만으로는 다른 형제들보다 자기가 더 위일 거라고, 구상천이 어깨를 으쓱였다.
‘아이치고는 민첩하긴 했지.’
그것도 어린아이가 가질 만한 귀여운 오만이리라. 백무량은 빙긋 웃곤 지나쳤다.
한데, 조금은 의외였다.
‘아직도 욕심을 못 버린 건가.’
그 축하연이 지나고 나서 한차례 토하고 자리를 빠져나갔던 황제가 여태껏 관심을 보이고 있다니.
백무량은 실소를 참지 못했다.
“하, 하하……. 그랬구나. 그래서 너는 곤륜의 무공이 배우고 싶어서 찾아온 게냐?”
“예.”
그 말에 구상천은 제법 사내다운 표정을 지었다. 아니, 반쯤은 억지로 지어내고 있었다.
그걸 보고 백무량은 저 가문의 가정교육은 엄격한가 보다, 하고 넘겼다.
그러고서 구상천의 또랑또랑한 눈을 보았다.
“내가 너를 가르치면, 뭐가 좋아질까?”
그 말에 구상천은 끝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혹시나 하는 희망이 혀를 지배했다.
“제가 장군이 되면 곤륜파에서 배웠다고 대대적으로 홍보하는 건 물론이고, 다른 장군가에서도 사람들을 보내올 겁니다. 당연히…….”
“아니, 그게 아니야.”
고개를 가볍게 저은 백무량은 구상천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내가 보여 주는 검형을 착실하게 따라와, 기쁘게 해 줄 수 있냐는 말이다.”
그것 말고 네가 해 줄 수 있는 게 무엇이 있겠느냐 하고 백무량이 말을 덧붙였다.
그러면서 구상천의 품을 흘낏 살폈다.
“혼자서 아무런 재산 없이 나온 것이냐?”
“……예.”
“지금까지는 그럼 어떻게……?”
말을 하다 말고 백무량은 시선을 돌려 청하를 바라보았다.
머쓱한 얼굴로 뒷머리를 긁는 걸 보니, 필시 저 녀석이 자비로 구상천을 먹여 살린 듯했다.
‘명가의 자식인 걸 알았다면 그랬을까.’
아마 먹은 찬거리를 뱉어 놓으라고 농을 던질지 모른다.
백무량은 기대에 가득 찬 구상천을 보며 차마 부정적인 말을 내놓을 수가 없었다.
어렵게 지낸 건 자신 하나면 족하다.
백무량의 얼굴엔 훈훈함이 가득했다.
“간단한 청소나 정리만 도와준다면 앞으로도 돈은 받지 않으마.”
“저, 정말이요?!”
“단.”
백무량은 구상천이 내려놓았던 목검을 들어 올렸다.
‘간만이군.’
왠지 모르게 그리운 느낌이었다. 백무량은 숨을 내쉬며 공력 없이 구천화우검을 펼쳤다.
“우와아아!”
현격한 수준의 검형이 검무로 이어진다.
머리가 조금 굵은 청년부터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까지, 입을 쩍 벌린 채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무량은 딸꾹질을 시작한 구상천을 바라보았다.
“깍듯했으면 좋겠구나.”
“……에.”
“청하도 눈썰미뿐이었지, 예의는 좋지 않았거든.”
그 말에 청하가 괜스레 발끈하여 외쳤다.
“에이, 형님!”
“봤지?”
백무량이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목검을 넘겨주었다.
“먼저 청하에게 기본을 배우고 나면, 저 언덕 위의 큰집으로 오거라.”
“암자로요?”
“그래.”
백무량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히죽 웃었다.
“내가 직접 만들어서 그런지, 아주 튼튼해.”
“……또, 또또.”
옆에서 청하가 딴죽을 걸자, 백무량은 옆구리를 툭 치며 지나갔다.
무관의 정문 앞에 무거운 존재감이 자리해 있던 탓이었다.
드르륵.
백무량이 문을 열기가 무섭게 허름한 차림의 상인이 종이를 매만지는 모습이 보였다.
상인의 얼굴이 대번에 일그러졌다.
“아이고, 깜짝이야.”
“무관에는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주문한 물건의 수송 건으로 왔네.”
‘주문했던 물건이 있었던가?’
백무량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의 수레로 향했다.
수레의 앞에 걸린 만금상단이라는 목패가 아련하게 비쳤다.
“이런 건 안 보내 줘도 괜찮다니까.”
백무량은 만금상단주 조원양을 나무라며 물건을 가린 거적을 벗겨 냈다.
대부분 아이가 연습용으로 쓸 만한 가벼운 목검이었고, 흙도 많았다.
그 사이에 조심스레 끼어 있는 서신을 보고 백무량의 손이 향했다.
찌이익.
편지를 봉한 인장을 찢어 내니 서두와 끝말이 드러났다.
[백 거사께.
조윤 배상(拜上)]
“배상이라니, 한 표국의 주인은 함부로 허리를 굽혀선 안 되는 것인데.”
그러면서 백무량은 내용을 읽었다.
과거 만금상단의 상인 중 하나에 불과했던 자신이 호광성의 표주로 임명받게 된 일.
마교에 의해 피해를 본 사람들을 도와줬다는 말이 적혀 있었다.
“이제야 진짜 마무리가 된 거구나.”
부드럽게 웃었다.
많은 목숨이 스러지고 나서야, 마교가 모두 절멸했다.
그 속에서 백무량은 행복을 되찾았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행복해졌으면.’
백무량은 청하를 시켜 수레에 든 짐을 모두 받게 한 뒤, 조윤에게 답장을 써 냈다.
[지금 보내는 편지에 인장을 찍을 터이니, 황실에 직접 연서(聯書)를 보내 재물을 받아 내시오.
그 재물로 그들을 보살펴 주시오.
백무량.]
***
황실에 보낸 연서가 통과되고, 열하루째 되던 날.
백무량에게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아직도 아이가 없어서야, 거참, 무공은 그리 뛰어난데 후계가 없다고? 이래서 도사는 문제라니까.”
“…….”
백무량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것만으로 위문엽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허, 농담이오.”
“처음부터 그렇게 말하지.”
목검을 다시 아래로 늘어뜨리는 백무량.
그 모습을 본 위문엽은 왠지 모를 오한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분명히 천마와의 싸움에서 무공을 잃었다고 말했었는데, 백무량의 기세에는 변함이 없었다.
‘무공을 잃었다는 거, 거짓말 아냐?’
백무량이 하늘을 향해 도전한다고 말하긴 했지만, 그게 진짜라고 생각하진 않았거늘.
위문엽이 약간의 호승심을 느끼려던 찰나에 백무량이 먼저 말했다.
“지금까지 고마웠다.”
“뭘 말이오?”
“그냥, 남기고 싶어서 한 말이다.”
“…….”
위문엽은 침묵으로 대답했다.
무인이 가려고 하는 길.
그것도 백무량의 뜻에 괜히 방해되고 싶지 않았다.
“나도 스승님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었소.”
“그래, 고맙다.”
백무량은 부드럽게 웃고는 위문엽에게 등을 돌렸다.
하늘과 마주하러 가기 전에, 곤륜파 동도에게 편지를 남길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