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5)
이른 저녁.
만금상단과 교섭하는 둥 이런저런 업무를 마친 남궁진이 집무실에서 나갔다.
“아쉽구만.”
천하를 따뜻하게 달굴 저녁놀에 검붉은 아지랑이가 뒤섞여 있다.
고수인 자신마저도 불길함을 저 기운에 불길함을 느끼는데, 일반 민초는 어떠겠는가?
세상이 망할 징조라는 소문이 퍼지는 것도 이해가 간다.
“저런 꼴을 매일, 하늘을 볼 때마다 보면 정신이 나갈 만도 하지.”
남궁진은 과중한 업무로 굳어 버린 어깨를 휘돌리며 연무장을 멀리서 지켜보았다.
하루의 낙이었다.
매일 한두 시진밖에 잠을 이루지 못함에도 젊은이들이 수련에 매진하는 걸 보면 피로가 가뿐하게 풀리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넷…… 아니, 여섯에 한 명이 따로 있군.”
뒤엉키고, 부딪치고, 밀려 나가길 반복하는 인영(人影)들.
이 늦은 시간까지 최선의 기량을 펼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보였다.
“허허, 가서 격려라도 해야 하나.”
남궁진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연무장과 점차 가까워질수록 발이 무거워졌다.
집착 혹은 광기에 가까운 투기(鬪氣).
무공에 관한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한 남궁진마저도 휩쓸릴 만큼 가슴 뛰는 기운이었다.
“허어, 허.”
어떤 말도 이을 수 없었다.
그저 연무장으로 가는 걸음을 빠르게 했다.
명색이 무림맹주인데 체통을 지켜야겠다는 생각도 없었다.
보신경을 펼치고 나서 도착한 연무장엔 여섯의 상승 고수가 기예를 다투고 있었다.
까강! 캉! 카드드득!
철의 대화였다.
불똥이 튕기는 소리와 숨을 가다듬는 호흡만이 명료하게 들렸다.
나머지는 사소한 것이었다.
투지를 연료로 삼고서 뛰쳐나가는 무인의 모습은 남궁진의 가슴을 뛰게 하기 충분했다.
“현종휘……라고 하였던가.”
이제 열여덟이라고 들었다.
약관이 되면 훌륭한 도사가 되어 강호를 주유할 거라며 쑥쓰러운 표정으로 말하던 것이 떠올랐다.
하나 지금은 어떠한가?
“크으……!”
십대고수에 비해 부족한 기량, 완성되지 않은 육신과 삼단전.
뒤떨어지는 무위를 가지고도 뒤처지지 않았다.
백무량을 이기고자 하는 마음이 한껏 고양하여 제 몸을 불사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남궁진은 내심 부끄러워졌다.
‘저 청년도 저렇게 전념하는데, 나는 일찍이 단념하였구나.’
무림맹주로서의 업무가 막중해서.
칠성교주에게 대적할 경지에 이르지 못해서.
호광성에서 겪었던 패배감이 남아 있어서.
변명은 곧 합리가 되었다.
안전한 곳에서 천하의 결말을 지켜보고 싶단 마음도 없잖아 있었다.
그래, 마치 이 비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저 아이처럼.
“유성한이라고 하였느냐?”
“……예.”
“왜 너는 지켜보고만 있느냐?”
“어울리지 않으니까요.”
유성한이 시선을 피했다.
무림맹에 처음 올 때만 해도 호승심 가득하던 아이였거늘, 수준 높은 비무를 보고서 주눅이 든 것 같았다.
남궁진은 그 옆으로 가서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편하게 봐라.”
“예?”
“어차피 칼부림을 아무리 잘해야 칼부림. 우리보고 보라고 열심히 움직이는데, 편한 자세에서 봐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을 들은 위문엽이 ‘푸핫’ 하고 웃었고, 남천이 실소를 흘렸다.
-칼부림은 결국 칼부림.
-맞는 말이지.
한 줌의 호흡마저 아쉬웠기에 입 모양으로 대답하는 그들이었다.
그 모습을 본 남궁진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렸다.
“저놈들도 편하게 보란다.”
“그, 그렇게 말했다고요?”
“그래. 얼른 앉으래도. 무림맹주의 말이 그리 가볍게 들리더냐?”
“……아, 으.”
유성한이 엉거주춤하게 앉았다.
아무래도 무림맹주라는 직책이 어색하고 불편하게 느껴진 것 같았다.
그러다 남궁진은 하늘을 보고서 말했다.
“신기하지 않으냐?”
“무엇이요?”
“하늘에 흐른 검붉은 아지랑이가 천하를 무너뜨린다는데 저들은 두려움이 없지 않으냐.”
“…….”
“그 강인함이 어디서 오는지 아느냐?”
“모르겠어요.”
“검에 있다.”
그 말에 유성한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듯, 남궁진의 복색을 살피는 시선이었다.
남궁진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도사처럼 보이더냐?”
“하지만 맹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아리송하겠지. 강인함이 검에 있다는 말 자체가 답답한 선문답처럼 들릴 거야. 하지만 천하의 어떤 고수도 부정할 수 없는 답이기도 하다.”
남궁진은 깊게 심호흡하고는 첨언했다.
“검에는 무인의 일생이 있다.”
“……?”
“잘 들어 봐라.”
아직도 어리둥절해하는 유성한에게 남궁진은 짤막하게 말했다.
“무인은 두 다리로 설 수 있을 때부터 목검을 만지작거린다. 너도 그랬을 테지.”
‘……나는 무공을 최근에 입문했는데.’
처음부터 걸리는 말이 있었지만, 유성한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에 흐뭇한 미소를 지은 남궁진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첫 마보, 첫 내려치기, 첫 대주천…… 그마다 기억이 있다. 설령 머리는 잊었을지언정, 검에 남는 기억이 있는 법. 그것을 통해서 상승 고수는 심상(心象)을 이끌어 내곤 하지.”
어렸을 때부터 상상해 온 최강의 형(形).
그것을 이루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똑같은 가전무공을 가지고서도 조금씩 다른 이유가 바로 최강의 형을 구축하기 위한 신념.
그 신념은 시간으로 축을 쌓아, 무를 증명하는 데 쓰이게 되니…….
“따라서 무인의 일생은 검에 있다.”
남궁진은 단언하듯 말했다.
무공, 무학에 대한 절대적인 개념이 있다면 이것이라는 듯 말이다.
그 말에 유성한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그렇군요.”
사실, 아직은 제대로 와닿지는 않았다. 나이가 어리기에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가슴을 간질이는 무언가가 있었다.
백무량에게 배운 천주.
그 안에 담긴 가능성은 가히 무한했다.
유성한이 어떤 식으로 가지를 뻗어도 상승 고수로 인도해 줄 것 같았다.
게다가 백무량이 말하지 않았나.
자기가 익힌 신공 중 제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녔노라고, 너도 나처럼 강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저도 저기 있는 선배들처럼 강해질 수 있을까요?”
자기도 모르게 툭 튀어나왔다.
시시콜콜한 이야기까지 다 할 수 있는 현종휘도 아니고, 무림맹주에게 이런 시시한 질문을 했다는 점에서 얼굴이 빨개졌다.
어떠한 답을 대놓고 요구하는 것처럼 들릴 테니까.
그러나 남궁진의 반응은 생각보다 달랐다.
“흠. 가능할지도 모르지.”
“……예?”
“저길 봐라.”
남궁진은 비무 사이에서 사나운 웃음을 드러내고 있는 위문엽과 남천을 가리켰다.
“야차와 금모도왕은 사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약했던 때가 있었다. 성격은 워낙 지랄맞아서 자다가 칼맞아죽을 거라고 예상하던 호사가도 있었지.”
그 말에 비무 중이던 두 고수가 고개를 홱 돌렸다.
“지랄!”
“끝나고 보자!”
“봐라, 저렇다니까.”
남궁진은 히죽 웃고는 유성한의 등을 두드렸다.
“저놈들도 지금 십대고수가 되어서 꺼드럭거리고 있는데, 네가 왜 못 하리라고 생각하느냐? 하물며…… 저기 있는 구천신검 백무량 선배께서 네 스승이잖느냐.”
솔직히 말하자면, 현종휘의 눈부신 발전이 너무나도 부럽다.
그 심정이 질투심으로 변했으나 구태여 말하진 않았다.
다만 유성한 또한 백무량이라는 고금제일의 무인에게 사사받아 더 강해지리란 확신이 있을 뿐.
남궁진은 유성한의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지금 당장은 나서지 못해도 좋다. 언젠가는 네가 할 수 있는 일, 도의와 협의를 지키는 일. 그것만 지켜도 저기 있는 선배께선 만족하실 거다.”
“그런가요…….”
잠시 고민하던 유성한은 가부좌를 틀고는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나비가 되어 가는 광경이라.
남궁진은 그것을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하지만 비무를 치르고 있는 여섯 고수는 사뭇 달랐다.
***
평생 축적해 온 무를 전력으로 부딪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다.
마교와 싸우기 위해 축으로 삼았던 의무와 맹세, 신념보다 백무량이라는 벽이 더 높았다.
“큭……!”
운해가 달라붙어 오는 불쾌한 촉감.
그것이 상승 고수의 육감을 방해했다.
사소한 지점에서 시야를 방해하거나, 운신이 서로 꼬이기도 했다.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십대고수씩이나 되는 무인이 합공을 제대로 하지 못하다니.
호사가들이 보면 자기 눈을 의심했으리라.
[저거, 진짜 비열하지 않냐?]
위문엽이 짜증을 부렸다.
그러나 그만큼 백무량의 대처가 신묘할 뿐더러, 혼란을 야기시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백무량은 목까지 차오른 숨을 훅 내뱉으며 백선신검을 쥐었다.
‘끝이 없군.’
그들이 청운이 까다롭다고 분노를 터트릴 때면, 백무량은 그들의 순수한 기량에 감탄했다.
기껏해 봐야 하나의 계절이 지나지도 않았을 텐데.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서 자신을 압박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렇게까지 밀릴 줄은 몰랐다.
‘하나씩 큰 단점이 있어서, 그걸 파고 들면 합공도 쉽게 깨부술 줄 알았건만.’
예컨대 위문엽은 오른팔의 요혈을 점혈하면 무공 대부분을 쓰지 못했고, 낙매신검은 자하신공에 대한 조예가 부족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태청신공을 배운 위문엽은 많은 단점을 극복했고, 낙매신검은 자하강기로 진무월처럼 매화잎을 유형화했다.
쉽게 보았다가는 일다경도 되지 않아서 패배할 터.
백무량은 자신이 아는 모든 기예를 꺼내고, 태청진기로 몸을 데웠다.
가지고 있는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게끔 처신하였다.
까강!
검과 검이 부딪치고, 정강이와 주먹이 부딪쳤다.
자세가 무너질 찰나에 한 줄기 돌풍이 백무량의 전신을 쓸었다.
“후.”
완전히 무너지지 않은 것은 오로지 곤륜의 운룡대팔식 덕택이다.
백무량은 사문의 무학에 감사를 느끼며 청운으로 검을 그렸다.
진무월이나 낙매신검이 그랬듯, 곤륜의 검법이 깃든 이기어검이었다.
“큭.”
그것을 보고서 진자충의 풍화뇌동이 생각났는지 낙매신검이 숨을 토했다.
백무량은 그 위치를 향해 운검을 서너 개 쏘았다.
쐐액!
하나같이 강철을 꿰뚫을 정도로 날카로운 균천관일이 담겨 있다.
상승 고수들은 그것을 하나씩 쳐 내면서 백무량을 전방위에서 압박했다.
“……하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혜성이 되고자 했다.
마교가 만들어 낸 아지랑이를 흩어 버릴 혜성.
천하의 운명이 달린 때에 백무량과 상승 고수들은 붉게 물든 석양 아래서 서로를 두들겨 가며 연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