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55화 (255/275)

행로 (1)

하루 뒤.

백무량은 뻐근한 몸을 매만지고서 무림맹 광장으로 향했다.

그곳에 많은 무인이 모여 있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비롯해 이름조차 듣지 못한 중소 문파나 낭인 고수가 자신과 무림맹주의 말을 기다렸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어제 비무를 치렀던 십대고수들과 현종휘에게 눈길이 갔다.

“잘 쉬었나?”

백무량의 말에 남천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뻐근합니다.”

“그만큼 움직였으니 당연하지.”

“마지막엔 왜 뼈를 건드립니까?”

“자기가 갖다 댄 거라곤 생각하지 않나?”

“……쯧.”

괜히 말꼬리를 잡았다가 본전도 못 건졌지만,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남천은 히죽 웃으며 옆에 있는 위문엽의 옆구리를 찔렀다.

“가장 많이 갖다 댄 사람?”

“죽고 싶으냐?”

“클클…….”

두 상승 고수의 시시콜콜한 대화에 한껏 굳었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백무량은 그걸 보고 속으로 생각했다.

‘둘 다 그냥 속없이 사는 놈들처럼 보였는데…….’

[적어도 너보다는 깊어 보이지 않으냐?]

‘선배.’

[저들도 십대고수로 살면서 많은 무인과 대화하고, 인연을 만들었을 거다. 어찌 보면 저들한테 지휘를 맡기는 게 좋을지도 몰라.]

장군보다는 무인에 가깝지 않느냔 뜻이다.

백무량은 심천검의 말에 쉬이 긍정했다.

‘솔직히, 저만한 인원을 모산까지 데려가는 게 쉬울 것 같진 않습니다.’

[내가 생각하기도 그래. 모산에서 대놓고 연기를 피우고 있는데, 가는 동안 아무런 일이 없을까?]

심천검은 최악의 상황을 상정했다.

[잠을 자는 동안에 불침번이 술법에 당해서 천막을 모두 불태우거나 고수의 목을 노린다면 어쩌겠느냐?]

‘그건…….’

[십대고수나 네가 서면 막을 수 있겠지. 하지만 모산에서 싸우기도 전에 피로를 쌓아 두는 게 그놈의 목적 아니겠느냐?]

‘과연.’

백무량은 심천검의 가정에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을 살리기 위해 많은 고수와 양민을 인신공양 한 쓰레기들이었다.

이제 와서 무인 한둘쯤 더 죽인다고 해서 달라질 것도 없었다.

이에 백무량은 옆에 서 있는 남궁진에게 물었다.

“혹시 바쁜가?”

“연설이라면 제가 하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아니, 그게 아니라.”

백무량은 잠시 머뭇거렸다.

가뜩이나 혼란한 강호를 진정시켜야 할 남궁진에게 더욱 무거운 짐을 주는 것 같아서 망설여졌다.

하지만 남궁진의 태도는 어제 비무를 보고서 더욱 결연해져 있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 하겠습니다.”

“모산으로 향하는 이들을…… 지휘해 줄 수 있겠나?”

“허.”

남궁진의 말문이 순간 턱 막혔다. 그러나 옅게 웃었다.

“사람을 모으고, 연설하고, 좀 쉴 줄 알았는데 모산까지 같이 가자 이겁니까?”

“어려우면 척준환에게 부탁하겠네.”

“아닙니다. 제가 모았으니 제가 동행해야 안심이 좀 되겠지요.”

남궁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감 있게 웃고는 단상 앞쪽으로 걸어갔다.

‘과거엔 무림맹주란 자리는 결국 인맥을 쌓는 곳이라 생각했거늘.’

어느새 이런 중책이 맡아 버리고 말았다.

천하의 쟁패를 두고서 싸우는 전쟁에 끼어들어 버렸다.

그것도 선두에 서서 연설하고, 지휘까지 하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어느 때, 어느 과거보다 더욱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그 감정을 가슴에 품고서 숨을 내뱉었다.

부디 이번 연설에 이러한 감정과 결의가 담겨 나오길 바랐다.

남궁진의 시선이 앞으로 향했다.

수백에 가까운 무인들이 시야에 꽉 찬 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을 향해서 남궁진은 서두를 떼었다.

“나는 솔직히 무림맹주가 되기 싫었네.”

“……?!”

감작스러운 선언에 좌중의 눈빛이 흔들렸다.

마교와의 싸움을 눈앞에 두고서 갑자기 저런 말을 한다는 것이 선뜻 좋게 들리지만은 않았다.

그러나 모두가 집중하게 만드는 건 확실했다.

남궁진이 피식 웃으며 하던 말을 이었다.

“알 만한 사람은 알겠지만, 난 남궁세가의 종가 출신이 아니야. 분가 주제에 너무 강해져서 처지가 곤란했지. 바깥으로 나돌아서 입지를 다지는 것이 살아가는 방법이었다.”

“…….”

아는 사람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인상을 찌푸렸고, 모르는 사람은 입을 헤벌렸다.

그들 중 남궁세가의 무인은 대놓고 주먹을 꽉 쥐었다.

왜 가문 내에서 이야기할 치부를 여기서 말하느냔 분노.

그 감정을 남궁진은 가볍게 흘려 넘겼다.

“여기에 모인 호걸들 중엔 살기 위해서 온 사람이 있을 거고, 분노나 복수 때문에 온 사람도 적지 않을 테지. 나도 살아가면서 많이 원동력으로 삼았소.”

“…….”

“그래서 여기에 서서 왜 이런 이야기를 꺼냈느냐면은.”

남궁진은 잠시 뜸을 들이고는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서 말했다.

“천하의 쟁패가 달린 일이오. 하물며 상대는 마교의 주구들이지. 부정적인 감정을 가지고 덤볐다가는, 그 괴물에게 당하고 말 거요.”

“…….”

“소의(小義)가 아니라 대의를 가지고 가시오. 지금까지 갈고닦은 무공을 가지고 천하를 밝힌다는 각오와 결의를 가지고 가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오!”

“……무슨 개소리를 하나 싶더니만.”

음울한 인상의 무인이 단상 앞까지 다가갔다.

척 봐도 복수심에 사로잡힌 남자였다. 어떤 사연인지는 알지 못했으나, 호광성에선 제법 유명한 고수였다.

철권마협 관로.

그의 등장에 몇몇 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대의를 품어라? 그게 무슨 억지요? 일가의 복수를 하러 왔는데, 그걸 어찌 버린단 말이오!”

처음엔 작은 조잘거림이었으나 끝에는 고함이 되었다.

처절한 감정이 담긴 외침에 고개를 끄덕였던 무인들이 눈물을 보였다.

아무래도 관로와 함께 복수를 결행하러 온 무인처럼 보였다.

남궁진은 그들을 내려다보았다가, 짤막하게 말했다.

“사의(私意)만 있다면 다른 곳을 알아보게.”

“……뭐라?”

“마인을 죽여서 그 복수심이 풀릴까?”

남궁진이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자신이 경험했던 일생에서 그런 일은 없었다.

오히려 더더욱 삐뚤어지고, 비슷한 적을 찾아서 죽이기만 했다.

그래서 관로와 같은 무인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마교가 사라지면 자네는 마교와 같은 놈들을 찾아서 돌아다니겠지. 큰 혼란이 사라지고 나서 또 다른 혼란을 만들고 말 것이야.”

“그럼 나보고 자진이라도 하란 게요?”

“정심한 마음을 가지고 오게. 그러지 않으면…… 칠성교에게 이용당할 걸세.”

칠성교.

그 낱말에 관로가 입을 꾹 다물었다.

복수심 때문에 귀가 막혀 있다지만, 칠성교에 관한 소문이나 정보는 너무 많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술법 말입니까?”

관로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했다.

“그것이 무서우면 여기까지 왜 왔겠습니까? 싸울 수 있습니다! 술법에 당할 것 같으면 그 자리에서 자진이라도 하겠습니다!”

관로가 말로써 보인 기백.

그 기백에 공감한 무인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적잖은 숫자인지라 남궁진도 잠시 당황한 듯 보였다.

그래서 백무량이 단상에서 내려갔다.

“술법에 당할 것 같으면 자진하겠다?”

“예! 아무리 선배라도…….”

“허튼짓하다가 죽지 말고 어디 구석에 박혀서 수련이라도 해라.”

“……그게 할 소리입니까?”

백무량의 무신경한 말에 관로가 저도 모르게 검을 쥐었다.

관로와 비슷한 사연을 가진 무인도 약간의 적의를 품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말을 좀 서투르게 한 모양이군. 이봐, 철권마협이라고?”

“그렇소!”

“우리가 좋아서 모산으로 가는 걸까?”

“그놈의 대의 타령을 또 하려는 게요?”

“사람 참 꼬였다. 아니, 내가 좋아서 대의를 지키러 가는 것처럼 보이냐?”

그 말에 구파일방의 장로들이 제자리에서 일어났다.

천의를 이은 도사라는 제일고수가 저런 말을 할 줄이야!

호사가들도 이번 일을 머릿속에 재빨리 기억했다. 이 자리에 없던 사람에게 들려준다면 앞으로 일 년은 먹고살 만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무량은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해야 하기 때문이야. 그리고 내가 제일 강하기 때문이지.”

누구도 나를 대체할 수 없다.

백무량은 자신을 엄지로 가리키며 말했다.

“내가 나서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을까, 얼마나 많은 지역이 도탄에 빠질까…… 그런 마음으로 여기에 있다. 천의나 그런 것들은 부가적인 거야.”

“…….”

“천지불인이라고 하였다. 하늘은 땅에서 아이가 얼어 죽어도 무정한 법이다. 인세는 인간이 지켜야 한다. 그 결의가 이끌었지, 천의는 그저 내 등을 밀어 주는 것에 불과해.”

백무량이 가볍게 숨을 골랐다.

그것만으로 구름이 모여들었다. 태청진기의 기운이 섭리를 조율하는 듯했다.

만인이 침묵에 잠기고, 관로의 손아귀에 힘이 풀렸다.

이에 백무량은 후배를 가볍게 꾸짖듯 말했다.

“그 무게가 너에게 있느냐? 그걸 짊어질 만큼 강하느냐?”

“……그렇진 않소만. 그래도.”

“내가 보기에 철권마협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어 보인다. 재능이 있어. 하지만 네가 가진 사연이 만든 증오와 분노가 발전을 막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구나.”

그렇게 말하는 백무량의 눈이 시퍼렇게 물들어 있었다.

극소수의 도사는 알았다.

그가 천애의 협로에 올랐음을, 섭리를 살펴볼 정도로 강하다는 것을 말이다.

철권마협 관로가 앞으로 더 강해질 수 있다는 건 사실이리라.

그걸 관로도 어렴풋이 느꼈다.

그래서 울먹일 것 같은 마음을 내리누르며 대답했다.

“나보고 어쩌라는 거요? 내가 도사도 아닌데 어찌 가슴을 찢어 놓은 감정을 버리겠소.”

“내가 실패하면, 네가 해라.”

“그게 무슨…….”

“죽더라도 시간은 끌 수 있도록 할 테니까, 하란 말이다. 복수 같은 것에 몸을 던져서 죽어 버리지 말고.”

백무량은 무덤덤하게 말했다.

“내가 백련교의 난에서 그렇게 죽었다. 백련교주와 맞서 싸워서 죽이겠다는 마음으로 있다가, 허무하게 죽어 버렸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귀한 목숨이 아니냐? 그 재능이라면 더 가치 있게 쓸 수 있지 않겠느냐?”

“…….”

“간섭 같으면 듣지 마라. 나라고 누구 인생에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아. 그냥 그렇게 쓰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거지.”

관로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뒤이어 무림맹 밖으로 걸어 나갔다.

무엇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는지는 몰랐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나 같은 사람이 또 나오지 않게 해 주시오. 나는…… 밖에서 뭐라도 해 보겠습니다.”

“그거 좋네.”

백무량은 빙긋 웃었다.

관로를 따라서 여러 무인이 무림맹을 떠났다.

이를 본 남궁진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왜 사람을 내보내려고 그럽니까?”

“내보낸 게 아니야. 내가 실수하면, 마인 몇몇을 놓친다면…… 저들이 나서 줄 거다. 나는 씨를 뿌린 거야.”

백무량의 말에 남궁진이 ‘아’ 하고 감탄성을 흘렸다.

그러고서 무림맹에 남은 이들을 보니 결연한 기색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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