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4)
박투와 병기술, 경신법의 역량.
매 순간의 판단과 끊기지 않는 출수와 방어.
극한에 가까운 다툼이 네 무인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가공할 만한 내력이 서로 부딪치면서 몸이 밀려 나고 관절이 꺾였다.
한데 기이한 것은 따로 있었다.
“어느 하나…… 부서지질 않아요.”
유성한이 수없이 맞부딪치는 상승 고수의 비무를 보며 전율했다.
발과 맞닿은 대지, 울타리의 균열, 연거푸 맞부딪치는 칼날마저도.
처음 싸울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일수로 언덕을 날리고도 남을 고수끼리 싸우는데도 연무장에 남는 상흔은 일절 존재치 않는다.
그 사실을 깨달으니 비무가 달리 보였다.
구름 위에 산다는 신선들의 놀음이 아닐까?
유성한의 손에 땀이 배는 동안, 백무량은 쉼 없이 칼날 위를 내디뎠다.
‘역시, 전과는 달라졌어.’
높은 경지에 이른 이후로 처음으로 숨이 벅찼다.
백무량은 서로 다른 방위를 점하고 있는 세 고수를 노려보았다.
낙매신검은 한쪽 무릎을 꿇고 있었지만 언제든 달려들 기세였고, 위문엽과 남천은 붉어진 얼굴로 내력을 운용하고 있었다.
참으로 기이했다.
근골에 상처만 남기지 않았을 뿐, 살이 짓이겨지고 관절이 꺾일 정도로 출수에 자비를 두지 않았거늘.
[불굴(不屈)한 고수들이로다.]
심천검의 말대로였다.
백무량이 모든 무공을 파해하고, 밀어 내도 그들의 눈에 불굴의 기상이 어려 있으니.
누구도 쉬이 패배를 시인하거나 물러나지 않았다.
‘저렇게 되어야만 할 이유가 있으니까요.’
백무량은 저들과 인연이 있었다.
우연히 만나거나, 의도적으로 만났다. 심지어는 처음 마주치자마자 싸운 남천 같은 고수도 있었다.
그때는 그들에게 마교와 싸울 이유 따윈 없었다.
그래서 약했다.
“선배를 이기고 나면 안심하고 칠성교주와 싸울 수 있지 않겠소?”
낙매신검의 자하강기가 시뻘건 색을 드러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란 말이 무색하게도, 그의 기량은 수없이 꺾여도 불굴한 채 들끓어 올랐다.
그 모습이 마치 성화교의 마인과 필사적으로 싸우던 진자충과 닮아 있었다.
업(業)이었다.
낙매신검 말고도, 십대고수라면 저마다 마교와 싸울 이유가 있었다.
“선배를 이기고, 칠성교주까지 이긴다면 내가 천하제일이 되지 않겠소?”
무인으로서 순수하게 자강(自彊)하고자 하는 열의.
야차 위문엽이 사나운 미소를 드러내며 덤벼들었다.
기이하게 생긴 칼이 세차게 회전하며 천둔심여공 특유의 기운이 주변을 짓눌렀다.
그걸 본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사문의 신공을 가르쳐 줘도, 몸에 익은 것이 좋다는 거냐?”
“흐흐, 내 맘이지!”
위문엽은 걸걸한 웃음소릴 흘리고서 낙매신검에게 눈짓했다.
전음 하나, 말 한마디 없이 재기 넘치는 합공이 펼쳐졌다.
파바박!
낙매신검의 자하강기가 매화잎 형태로 비산했다.
한데 청운과 방식이 비슷했다.
사문의 무학을 유형화한 강기에 담고서…… 비검으로 펼친다.
‘어쩌다 보니 내가 사부가 됐구만.’
자신의 무학을 남이 펼친다라.
백무량은 낙매신검의 어정쩡한 모방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한편으로는 우습기도 했다.
폐관수련 동안 자신의 무학을 되새기면서 존경심을 품었으리란 방증이니까.
“그래도 아직 부족하군.”
영기와 공력을 잔뜩 머금은 백선신검이 낮게 울었다.
천하를 가득 덮고도 남을 층운(層雲).
그것이 한순간 세 고수의 시야를 희롱했다.
“……음.”
“이게 뭐야!”
음공이 만들어 낸 환상이란 걸 알았으나 피부에 닿는 차가움과 자연을 존경하게 만드는 웅장함이 있었다.
이마저도 무림맹에서 배운 도학 중 하나이리라.
위문엽은 백무량의 그릇에 치를 떨며 부러워했다.
“태청신공에 구천화우검, 운룡대팔식까지 익혀 놓고 별 신공까지 다 처배우니.”
“부러우면 나한테 배울 테냐?”
백무량은 짓궂은 농담을 흘리며 검으로 막을 그렸다.
구천화우검의 삼초, 호천풍연의 파생 초식.
비류폭이 두 절학을 쳐 냈다. 그러나 마음을 놓고 있을 순 없었다.
아까 전부터 조용해진 금모도왕 남천.
그가 극점에 이른 열양지기를 토할 준비를 이어 가고 있었다.
“크흐…….”
시뻘겋게 물든 눈동자와 어깨선을 타고 흐르는 열기.
열화신공이 상단전까지 침습한 것이 보였다. 저대로 둔다면 머리가 완전히 익어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있는 어느 누구도 남천을 걱정하지 않았다.
-여기에 있을 정도라면 이겨 내겠지.
-자기가 평생토록 익힌 무공에 도취되거나 먹힐 놈은 없다.
한 무류의 정상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겸허와 동격의 고수를 인정하게 되는 감정.
평소 오만하기 그지없던 위문엽마저도 남천이 제어할 거란 확신을 가지고서 행동했다.
“발이나 묶을까?”
“그러지.”
낙매신검의 대답에 위문엽이 돌풍을 일으켰다.
방금 백무량이 펼쳤던 청운의 막, 비류폭을 막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 뒤를 따라서 자하강기가 비산했다.
이십사수매화검법의 정수가 담긴, 변화와 허실을 구분할 수 없는 날카로움이 있었다.
‘이제야…….’
백무량은 입술을 비틀었다.
‘기량이 올라왔다, 이거지.’
자신이 곤륜산에 있는 동안 저들은 어떤 고련으로 자기를 깎았을까.
어설픈 마음가짐이라면 아예 두고 가거나 자존심을 꺾어서라도 가르칠 생각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들을 보라.
누구 하나 물러서지 않고 한계를 넘어서 최선의 수를 강구한다.
백무량이라는 벽을 넘어서려는 무인의 의기(意氣)가 드높았다.
‘이래야 나도 제대로 싸울 만하지.’
백무량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백선신검뿐만 아니라 전신에서 청운이 흘러넘쳤다.
“……!”
그것을 본 위문엽이 인상을 찡그렸다.
‘설마 검 한 번 휘두르지 않고도 호신막을 형성할 줄이야.’
표정만 봐도 생각이 읽히는 남자였다. 그러나 판단이 느리지는 않았다.
중간에 멈춰선 위문엽이 오른팔에 힘을 가득 주자, 힘줄이 흉하게 치솟았다.
“까짓것!”
전력을 다한 천둔심여공이 애병으로 모였다.
일곱 개의 단층으로 이루어진 축이 힘 있게 돌았다.
콰르르르!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치가 돌아가듯, 무공보다는 도구의 힘을 빌린 파괴에 가까웠다.
화약의 발전이 무공을 점차 대체하는 것처럼 말이다.
‘참으로 신묘하단 말이지.’
근본 무학은 아미복호검이면서 완전히 다른 무공을 창안한 후인이라니.
백무량은 무공의 무한함에 깊이 감탄하며 의념을 청운에 실었다.
막아 내야 할 것이다.
걸출한 두 절초와 뒤이어질 극점의 열양지기까지.
“……하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었다.
어느 때보다 어지러운 비무를 치르고 있음에도 정신은 명정한 채 고양된 상태였다.
“너도 올 테냐?”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척준환에게 머물렀다.
청라에게 급습을 당해 오랫동안 치료에 전념해야 했던 상승 고수.
그의 얼굴에는 절박함에 가까운 투지가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며칠 전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공동파의 장문인으로서 의무를 지키지 못했소.
그때 척준환은 부끄럽다는 듯 말했다.
이런 자리가 없었다면 심산유곡에 틀어박혔을 거라고, 청라에게 패하여 공동파의 긍지를 지키지 못하였다고.
그 말을 떠올린 백무량이 가볍게 말했다.
“가만히 구경만 할 테냐, 아니면 무언가를 증명할 테냐?”
“…….”
공동파의 장문인이자, 무림맹에 마지막으로 도착한 십대고수.
척준환이 의무를 이루기 위해 검으로 들었다.
***
곤륜산에서 가끔 백무량이 펼칠 때 말고는 보지 못했던 극한의 무예와 기예.
그것이 눈앞에서 매 순간마다 펼쳐졌다.
“대사형…….”
“…….”
현종휘는 유성한의 부름조차 듣지 못한 채 몰입했다.
곤륜산에서 수련하는 동안 어렴풋이 상상하거나 이루고 싶었던 것들 모두가 저 비무 안에 있었다.
-저건…….
-그랬구나, 오른팔의 근력이 저만큼 강하면 저런 무학도 펼쳐 낼 수 있었던 거구나.
-만일 내가 저 무공에서 영감을 얻어서 펼친다면 어떤 점을 체화할 수 있을까?
자신의 그릇을 알기에 가능성을 점치고 심상으로 펼칠 수 있었다.
불가능한 것도 있었지만, 애초에 안 되는 것이라곤 생각지 않았다.
눈앞에 백무량이라는 존재가 있었으니까.
단지 현종휘라는 도사의 기량이 부족한 것뿐이다.
“……하.”
황홀경에 가까운 웃음이 나왔다.
한 무학의 정점에 오른 이들의 비무가 눈앞에 있다. 보는 것만으로 무인의 가슴에 기쁨을 움트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옆에 있는 유성한은 조금 다른 듯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도사가 아닌 무인의 길에서는 서로 고독한 법이다.
“성한아.”
현종휘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부르니, 유성한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사형!”
“이번에는 입장이 바뀌어야겠구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유성한이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현종휘의 기세를 보고 입을 꾹 다물었다.
“……저기에 끼어드시게요?”
“그래.”
현종휘는 조용히 검을 쥐었다.
곤륜산에서는 입장이 달랐다.
유성한은 어느 비무에서나 끼어들려고 굴었고, 언제나 자신이 중재하거나 맞상대가 되어 주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유성한은 저 비무에 끼어들기를 본능적으로 두려워했고, 현종휘는 몸이 근질거렸다.
“저길 보아라. 곤륜의 사조께서 대종사라 자칭할 만한 고수를 넷이나 상대하고 계시다. 저걸 보면…… 가슴이 뛰질 않으냐?”
“하지만.”
“하물며 저 선배들은 주변에 피해가 가지 않도록 내력의 발산을 절제하고 계시지. 지금이 아니면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조문도석가사의(朝聞道夕死可矣)라고 하였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
처음 그것을 접했을 땐 귀한 목숨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도란 집착해서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잡으려고 할수록 손아귀를 벗어나기 마련이니까.
“적어도 죽지는 않을 것 아니냐?”
현종휘가 도를 붙잡기 위해 앞으로 뚜벅뚜벅 걸었다.
이에 백무량을 비롯한 십대고수들은 잠시 비무를 멈추고서 그 걸음을 보았다.
입문하려는 걸음이요, 배움을 갈구하는 마음이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현종휘의 합류를 받아들였다.
“네가 먼저 열 테냐?”
일찍이 곤륜산에서 현종휘와 안면을 익힌 남천이 장난스럽게 물었다.
그 말에 현종휘는 십대고수들에게 한 번씩 예를 표했다.
낙매신검은 마주 표하고, 남천이나 위문엽은 눈인사만 하는 등 반응은 조금씩 달랐다.
하지만 어린 고수의 등장이 기꺼운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그 과정을 지켜본 백무량이 고개를 끄덕였다.
촤아악!
다섯 무인이 백무량을 향해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