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3)
-배움에 있어 전혀 오만하지 않고 끝없이 정진해 간다.
백무량을 만나 본 도사들의 공통적인 극찬이다.
항간의 소문과는 달리 몹시 여유 넘치고, 상대를 배려하는 품행이 있었다.
[우스운 말이지. 안 그러냐?]
‘이제야 성품이 제대로 드러나기 시작한 것이지요.’
백무량은 심천검과 농담을 나누며 수련에 매진했다.
매 순간을 쪼개듯 행하는 단련.
십대고수일지라도 혀를 내두를 일상이었다.
곧 마교와 싸울 시간이 다가온다는 걸 생각하면 초조하거나 절박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내심은 청명하고 맑았다.
천하의 쟁패(爭霸)를 두고 싸우러 가는 사람답지 않게 얼굴에 여유가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노력하고 있다는 걸 호사가들도 알아야 할 텐데요.’
백무량의 시선이 연무장 곳곳으로 향했다.
어떤 사연을 가졌든, 혹은 백무량 자신이 부탁하였든.
무림맹에 모인 무인들은 온 힘을 쏟아 내며 대련하고, 한계에 부딪쳤다.
단지 백무량이 천의를 이은 도사이기에 만인이 지켜보고 있을 뿐.
그들의 노력 또한 폄하돼선 안 될 일이다.
백무량은 읽고 있던 비급을 덮고서 어깨를 쭉 폈다.
우드득.
쭈그려 앉아 있다가 굳은 근육이 풀렸다. 살짝 피로해져 있던 정신도 태청신공의 소주천에 명료해졌다.
“으으음…….”
폐부에 고인 숨을 하품으로 뱉어 내는데, 그 모습을 보고서 다가오는 무인이 있었다.
“여유 좀 되면 한번 붙어 주쇼.”
걸걸한 목소리로 대련을 청하는 무인.
금모(金毛)의 도왕. 남천이 한쪽 어깨에 금도를 걸치고서 다가왔다.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한 가지를 물었다.
“못 보던 무기인데, 어디서 훔쳤나?”
“전에 백련교주와 싸우면서 느낀 점이 있어서 말이오.”
“그게 뭐였는가?”
“실력이 부족하면, 실력을 뒷받침할 도구라도 챙겨야 한다.”
“그게 저 금도다?”
“선배가 가지고 있는 고검(古劍)도 마찬가지 아뇨?”
남천이 삐뚤게 웃으며 백선신검을 턱짓했다.
척 봐도 대련을 하기 위해서 도발한 것 같아서 백무량은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지. 내 사문의 옛 유물이다. 어쩔 테냐?”
“……쯧, 이렇게 쉽게 인정하면 재미가 없지. 역시 도사 아니랄까 봐.”
남천이 껄껄 웃으면서 도를 아래로 늘어뜨렸다.
무조건 싸우겠다는 뜻이다.
백무량은 눈을 가늘게 뜨곤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다가, 재밌는 제안을 떠올렸다.
“너 말고, 다른 사람까지 끼어드는 건 어떨까?”
“그게 무슨 소리요?”
“어차피 너 하나로는 날 감당할 수 없지 않으냐? 그렇다면 다른 무인들도 끼어들 수 있게 해 줘야지.”
“…….”
남천의 미간이 일그러지는 걸 보니 묘한 쾌감이 일었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붙잡고서 하려던 말을 이었다.
“어떠냐, 선배로서 엄청난 배려가 아니더냐?”
“다시는 그런 말 꺼내지 못하게 해 주겠소.”
투박한 말에 뒤따라가는 남천의 도.
반원을 길게 그린 도극(刀極)이 백무량의 오른팔을 노렸다. 열양지기가 한가득 실린 탓에 겨울의 추위마저도 한순간 밀려 나갔다.
이에 연무장의 무인들이 저마다 내기를 끌어 올렸다.
뜨거운 열기가 전신을 두드렸으나 그들에게는 열망이 있었다.
백무량과 남천.
두 상승 고수의 비무를 봐 두는 것만으로도 큰 소득이 될 테니까.
백무량은 그들의 시선을 받고서 웃었다.
가볍게 내쉰 숨결 사이로 새어 나온 태청신공의 정심한 공력이 구름의 형태로 유형화했다.
쿠르릉……!
“또, 귀찮은.”
남천이 짜증을 짧게 끊어서 토했다.
청운.
백무량만의 고유한 무학은 모든 기운을 포용함과 동시에 밀어 내기까지 했다.
그건 멀쩡한 바위마저 갈라지게 만드는 열양지기라도 다르지 않다.
콰콰!
도극에 맺힌 열양지기가 청운에 맞물렸다. 서로 힘겨룸을 하다가, 종래에 밀려 나는 건 남천이었다.
그러나 힘겨룸만으로 승패가 갈린다면 상승 고수라고 할 수 없다.
남천의 눈빛이 사납게 변했다.
‘위문엽이랑 붙어 다니더니 서로 닮아 가는 건가.’
백무량은 순간 떠올린 생각을 잘랐다. 남천의 우수에서 발해진 운심쇄의 초식이 시야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방심하면 당한다.]
심천검의 조언에 눈을 깜빡였다.
그동안 어디에 있다가 왔는지, 남천을 비롯한 다른 십대고수들도 전보다 더욱 강해져서 왔다.
전처럼 가지고 놀듯이 상대할 순 없는 것이다.
백무량의 우수에 시퍼런 구름이 모여들었다. 그 구름은 곧 경파의 흐름을 타고 흘렀다.
그렇게 만상(萬象)이 백선신검에 담겼다.
콰콰콰!
숨을 가볍게 내뱉을 동안의 찰나.
초식보다는 본능에 가깝게 휘둘렀다.
형(形)에 집착하던 버릇은 진즉 버렸다. 아무렇게 휘두르는 움직임 하나하나에 도학의 묘리가 있었다.
그렇게 다섯 합.
남천의 기력이 먼저 떨어졌다. 열양지기로 몸을 데웠으나 백무량의 움직임을 앞지를 수는 없었다.
“크으.”
남천이 인상을 찡그리며 뒤로 밀려 나던 찰나.
다른 무인이 비무에 끼어들었다.
“낙매신검!”
누군가의 외침에 백무량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낙매신검의 매화검이 등 뒤에 도달해 있었다.
[언제든 참여해도 된다고 하였으니, 비겁하다고 하시진 않겠지요?]
귓가를 파고드는 전음에 장난기가 어렴풋이 맺혀 있다.
하지만 백무량은 낙매신검을 알았다.
한번 끼어든 이상, 무조건 승리를 거두려고 할 터였다.
화산에서 진자충이 죽었을 때 그는 앞으로 불태(不殆)하겠다고 맹세하였으니까.
무인의 맹세는 무거운 법이다.
“매인설한.”
낙매신검의 입가가 가늘게 열렸다. 명색이 비무니까 초식명을 말한 것처럼 보였다.
그 덕분에 백무량은 여유로울 수 있었다.
[내가 누구한테 매화검법을 배웠는지 알 텐데.]
매화동인 진무월.
그에게 화검을 배우면서 매화검법의 조예도 익혔다.
그 사실을 모를 리가 없는 낙매신검이 짤막하게 대답했다.
[등을 노린 대신 선배께 한 수 알려 드린 겁니다.]
[네가? 나를?]
백무량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어물거렸다.
낙매신검에게 확실하게 보이도록.
-감히 나를 배려하겠다고?
입 모양으로 말한 뒤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의 오른발이 땅을 때렸다.
휘르르…….
가볍게 휘도는 바람은 곧 작은 폭풍이 된다.
현종휘가 곤륜산에서 보였던 기예가 백무량의 몸에서 펼쳐졌다.
“저건……!”
멀찍이서 구경하고 있던 현종휘가 주먹을 꽉 쥐었다.
같은 기예, 현격한 차이.
창(槍)의 형태에 가까웠던 기예를 백무량이 펼치니 사뭇 달랐다.
“이런……!”
등 뒤를 꿰뚫으려던 낙매신검의 검이 중간에 멈췄다.
정확하게는 붙들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말도 안 된다니까.”
밀려 난 자세를 고친 남천이 투덜거리듯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도 청운이었다.
돌풍을 머금은 청운이 낙매신검의 진격을 막고, 매화의 향을 날려 버렸다.
두 상승 고수의 난색에도 백무량은 웃지 않았다.
‘이건…… 좀 위험한데.’
여러 걸출한 영단을 취하고, 상단전을 수없이 단련했다.
그럼에도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정신력에 한계는 있는 법이다. 그것이 만상을 품은 청운이라면 더더욱 어려웠다.
여기서 만일 척준환이나 위문엽이 추가로 끼어든다면 어떨까?
상상하는 순간 오금이 저렸다.
정말로 한계가 찾아와 상단전의 운행이 멈춰 버릴지도 몰랐다.
바로 그때였다.
[재밌지?]
심천검이 부럽다는 듯이 말했다.
본심을 들킨 백무량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한계에 부딪히는 걸 싫어했다면 처음부터 무공을 배우지도 않았죠.’
무인의 맹세가 무거운 이유는 어떠한 한계가 있어도 완수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바로 낙매신검이 그러했다.
“예전이었다면, 못 풀었겠지만.”
낙매신검의 권장이 청운을 터트렸다. 붙잡힌 검이 풀리자마자 최선을 다한 검법을 펼치며 다가왔다.
남천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처음부터 협공을 노렸다는 듯, 멀리서 광랑참의 강기를 날렸다.
매화의 향기에 뜨거운 기운이 뒤섞였다. 내력이 약한 무인은 피를 토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 폭풍의 중심.
그곳에서 백무량은 히죽 웃었다. 지금까지 이곳에서 익힌 무학과 곤륜의 무공을 떠올렸다.
검해가 모든 것을 품고 있었다.
검들이 잠자는 바다가 백선신검 안에 있었다.
“자, 마음대로 와 봐라!”
태청신공의 공력을 머금은 천주가 청운을 검으로 빚었다.
비검의 묘리와 이기어검이 섞였다. 진자충의 무학을 떠올리게 하는 솜씨에 주변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그러나 여기서 끝날 거라면 수련조차 시작하지 않았다.
백무량의 의념이 검해를 강하게 때렸다.
일점에서 일어난 커다란 파도가 파문처럼 퍼져 나갔다.
“……허!”
남천은 기가 차서 헛웃음을 흘렸다.
전력을 다해서 펼친 광랑참이 백무량의 이기어검과 공멸한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천의 시선이 백무량과 직접 검을 나누고 있는 낙매신검에게 향했다.
[졌다는 말이나 들어 봅시다.]
[…….]
대답할 여유가 나지 않는다.
낙매신검은 백무량과 계속해서 검을 부딪치며 밀려 나가는 자신을 보았다.
매화비원에서의 폐관수련이 겨우 이 정도였던가?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자기를 의심하려는 마음을 옆으로 치웠다. 그저 백무량이 강한 것이라고, 억지로 인정하고서 현실을 보았다.
“누구 앞에서, 매화검을.”
낙매신검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백무량이 펼치고 있는 것은 바로 매화검법.
그것도 전반부 초식으로만 자신의 검을 쳐 내고 있었다.
조금씩 생기는 허점을 보고도 아예 노리지도 않았다.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무너지는 것 같다.
그 분노가 임계점에 이르기 직전에 자하신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렸다.
끓었던 감정은 곧 연료가 되었다.
콰아아……!
낙매신검의 전신에 감돌기 시작한 자색의 기류.
자하신공에서 비롯된 자하강기가 매화잎으로 변해 갔다.
백무량의 비검에 비할 바는 아니나, 언제든 요혈을 노릴 듯 불규칙하게 움직였다.
“제법.”
백무량은 작게 중얼거리며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이쯤이면 한 명 더 끼어들지도 모른단 예감.
그 예감은 기가 막힌 순간에 찾아왔다.
“재밌어 보이는구만!”
정수리 위.
백무량은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비검을 쏟아 냈다.
낙매신검과 남천에게 정신을 쏟은 사이에 기척을 숨기고 다가온 것 같았다.
“비겁하게 굴기는.”
“그야 원래 그런 놈인 걸 어쩌오.”
아미복호검의 머나먼 후예, 야차 위문엽.
그가 애병을 움켜쥐고서 오른팔을 강하게 휘둘렀다.
‘위험하다!’
위문엽이 휘두르는 폭풍은 상승 고수의 절초에 맞먹는다.
백무량은 상반신을 뒤로 뉘며 운룡대팔식을 펼쳤다.
그 움직임이 몹시 신묘하고 기괴한지라, 세 고수의 합격이 백무량에게 닿지 못하고 허공을 스쳤다.
“미꾸라지 같구만.”
“쯧.”
“……후우.”
위문엽, 남천, 낙매신검.
세 고수가 저마다 보이는 반응에 백무량은 피식 웃었다.
‘이 비무로 끝낸다.’
솔직하게 말하면, 배우기만 한 무공에 의미는 없다.
실전을 통해서 완전히 체화하는 것이 옳았다.
그건 저들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폐관수련은 어디까지나 새로운 영역에 발을 내디디는 일.
새로운 영역에서 얻은 깨달음을 자기 무공에 불어 넣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마교와 싸우기 직전인 지금.
이번이 무공을 정돈할 마지막 기회였다.
“모든 걸 부딪쳐 와라.”
백무량의 진지한 어조에 세 고수가 무기를 쥐었다.
반면에 상대적으로 경지가 뒤떨어지는 무인들은 기가 죽어서 자기 수련으로 되돌아갔다.
이제 그들의 비무를 지켜보는 건 현종휘와 유성한, 척준환뿐이었다.
두근두근.
세차게 뛰는 가슴을 쥐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