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지랑이 (2)
이야기를 마친 무영조사는 무림맹에서 떠나겠다고 하였다.
“싸우지도 못하는 주제에 주변에서 얼쩡거리진 않을 거요. 그냥 한적한 곳에서 지켜보고 있겠소.”
가볍고 경박하게 말했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물을 머금은 돌처럼 무거웠다.
그가 품은 다른 생각도 보였다.
무학의 경지가 너무 높아진 탓이다.
백무량은 무영조사의 속내를 꿰뚫고서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서 무얼 하든 멍청한 짓은 하지 마라.”
“……!”
죽립 아래, 그림자 속에서 두 눈동자가 부자연스럽게 흔들렸다.
무언가 말하려다가 머뭇거리던 무영조사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웃었다.
“참 걱정도 많소.”
“걱정으로만 끝나게 해라, 그러면.”
“나중에 봅시다.”
등 돌린 무영조사가 왼팔을 흔들었다.
백무량은 그의 등을 보았다.
세간에선 누구보다 넓은 등을 가졌으며, 나누고 베풀길 좋아한다는 십대고수였다.
그는 언제나 기다란 낚싯대를 가지고 다닌다고 들었다.
‘……없군.’
백무량은 쓴웃음을 지었다.
오른팔을 쓰지 못하게 된 무영조사의 등은 좁았고, 낚싯대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
우울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척사멸마의 기치를 세우기 위해 많은 무인이 모였다.
심지어는 문파의 기둥뿌리까지 뽑아서 호광성에 도착한 문파가 있었다.
이에 백무량은 한마디만 했다.
“허리보다 등에 짊어진 게 많은 사람은 고향으로 돌아가라. 등이 굽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학도사들의 우물쭈물하는 모습에 백무량의 표정이 묘해졌다.
끝이 다가오니 주책이었다.
저들을 보니 사형과 어울리던 학도사들과…… 그들의 주검이 떠올랐다.
[……사지에 두어선 안 된다.]
주백천도 마찬가지였는지 회한에 젖은 눈으로 학도사들을 보았다.
백무량은 회한보다는 후회가 컸다.
“싸우지 못할 몸이라면 고향으로 돌아가서 후학을 가르쳐라. 불안해하는 사람을 보살피고, 또 다른 소악(小惡)이 준동하지 않도록 해라. 그것이 내가 말할 수 있는 도리다.”
“…….”
“다른 말은 받지 않을 거다. 그러니까 돌아가.”
앞으로 안 볼지도 모르는데 곱게 말해서 뭐 하겠나.
다른 학도사들이 죽는 꼴을 보기 싫어서 강압적으로 말했다.
평판이 깎여도 하등 상관없는 낭인처럼 말이다.
그런데 학도사들의 태도가 영 이상했다.
“천의를 이으셨다는 소문이 틀리지 않았군요.”
“……?”
“저희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선배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미 잘 처리하고 왔습니다.”
“아니, 얼른 꺼지래도 그러네.”
“아무리 험한 말을 하셔도 꺾일 의지가 아닙니다. 그보다 이것부터 보시지요.”
학도사들은 어깨에 짊어지고 있던 봇짐을 내려놓았다.
매듭 사이로 낡은 서책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풍겼다.
백무량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게 뭐지?”
“선배께서 도문의 무학을 배우신다기에 사문의 비급을 챙겨 왔습니다.”
“……허.”
딱 봐도 장서에 소중히 보관해 두던 원본이었다.
백무량은 학도사가 건네는 비급을 조심스럽게 받아 들었다.
손으로 넘겼다가는 종이가 문드러질 것 같아서 적게나마 공력을 운용했다.
손가락 끝에 일어나는 자그마한 바람.
스르륵…….
고등한 기예가 학도사들의 눈앞에서 펼쳐졌다.
“허어.”
“이렇게까지 섬세한 지풍이라니…….”
그들이 놀라는 사이에 백무량은 진지한 표정으로 비급을 탐독했다.
‘점창파와 같은 원류를 지니고 있구나.’
위문엽의 무공이 아미복호검과는 완전히 다르듯.
이들이 가져온 비급 또한 독특한 체계를 이루고 있었지만, 안정성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무시하지는 않았다.
“이건 어떤 묘리를 지니고 있는 건가?”
“……예?”
“여기 보면 수양명대장경을 지나는 순행이 다른 도문의 무학과는 다른데, 어떤 현상에 뜻을 두고 있는지 궁금해서.”
“아, 아아.”
어쩐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도움이 되기 위해 가져오기는 했으나 정말로 관심을 가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듯했다.
백무량이 생각하기에 별로 좋지 않은 마음가짐이었다.
“구파일방의 무공만 귀중한 게 아니야. 이것도 훌륭하게 자라난 하나의 가지지.”
“……저, 정말입니까?”
“사문의 무학을 궁구하게 파고들었으면서 주눅이 들긴 왜 드나. 당당하게 굴었어야지.”
그 말에 학도사들이 창피하다는 듯 시선을 피하거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걸 본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뭐,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야. 세상에서 구파일방의 위상이란 오악(五岳)만큼 드높으니까.”
“…….”
“그렇다고 사문의 무학을 아래로 놓진 말게.”
“부끄러운 모습을 보여서 죄송합니다.”
학도사들의 얼굴에 지금까지 보이지 않았던 열의가 있었다.
이제야 제대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겠다.
백무량은 따라오라는 듯 등을 돌렸다.
학도사들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뒤따랐다.
저벅저벅.
그들은 걸음을 내디디면서 촌사람처럼 두리번거렸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림맹에 모인 것은 마교와 싸우기 위해 모인 일학(一鶴)들이었다.
“허, 저 사람은…….”
“흑도까지 합류했단 말인가?”
“무영조사가 낚시 친구를 몇몇 불렀다더니만, 면면이 참으로 대단하구먼.”
그들이 혀를 내두른 채 따라오며 내뱉는 말을 듣고 있으려니 마음이 가라앉았다.
모두 말문이 사라진 채 결전을 준비하는 와중이었는데, 지금만큼은 평소와 같은 강호의 느낌이 났으니까.
물론 학도사들을 거슬려하는 무인도 있었지만, 백무량의 모습을 보고서 고개를 수그렸다.
그렇게 걸어서 도착한 곳은 바로.
“허억……!”
점창파와 해남파의 장문인뿐만 아니라 종남파의 장로까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는 연무장이었다.
학도사들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이게 대관절 무슨 일입니까?”
“보는 대로다. 나 말고도 다른 도우들도 무학을 익히는 데 힘쓰고 있지.”
백무량은 연무장 한가운데로 걸어가며 말했다.
“내가 네가 보여 준 비급의 무공을 펼칠 터이니, 부족한 것이 있다면 말해라.”
“아, 알겠습니다.”
학도사들이 포권을 취하곤 서로를 바라보았다.
대답은 선선하게 했지만 속으론 의구심이 있었다.
아무리 백무량이 고수라고 한들 한 번 본 무공을 익힐 순 없다, 우리의 도움이 필요하기 때문에 불렀을 것이다.
사문의 무학에 대한 자긍심과 자존심.
강호에 있으면서 쌓인 상식이 뒤섞이면서 그들의 표정에 묘한 자신감이 떠올랐다.
그 시선과 백무량의 눈이 마주쳤다.
“……하하.”
속이 너무 뻔하게 읽힌다.
가볍게 웃음을 터트리고서 연무장 구석에 손을 내밀었다.
스으윽.
태청신공의 기류가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극에 이른 허공섭물이라.
평생토록 보지 못한 기예에 학도사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속으로는 백무량에 대한 평가가 급상승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무량은 읽었던 비급의 내용을 되새기고 있었다.
‘점창파의 무론을 좀 더 날카롭게 갈아 낸 느낌이지 않습니까?’
[호흡은 짧게 가져가는 것이 좋겠다. 곤륜의 것보다는 날카롭고 직선적이니까 말이다.]
‘저도 선배처럼 생각했습니다.’
[무량아, 태청신공의 운용을…….]
‘아,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역시 사형이십니다.’
백무량과 주백천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자 심천검이 인상을 뒤틀었다.
[이런 썩을 후배놈.]
다른 도문의 무학을 궁리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심천검, 주백천과 의견을 나누고는 했다.
대화는 제법 잡스럽고 길었으나 검해를 통하였으므로 시간은 찰나밖에 지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완벽하리라.
무론이 완전히 정립되었을 때, 백무량이 목검을 쥐었다.
척.
백무량의 손아귀에 목검이 잡히자 주변에 있던 도사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심지어 대련하던 와중에 왼손을 펼쳐서 멈추는 이도 있었다.
스르릉…….
심유한 공력을 머금은 목검이 낮게 우짖었다.
그와 동시에 백무량의 전신이 움직였다.
“……오.”
검이 먼저 움직이고, 탄성이 뒤늦게 흘러나왔다.
안력이 부족한 무인은 눈을 의심했으나 상승의 경지에 이른 고수는 현격한 격차에 존경심을 품었다.
뒤늦게 목검 끄트머리에서 신묘한 현상이 일어났다.
관일(貫日).
원류인 점창파가 해를 쏜다면, 이들의 무학은 꿰뚫기를 원했다.
근본으로 삼은 심상이 달라져서 다른 방향으로 가지를 뻗어 낸 것이다.
달리 보면 본질을 잃은 셈이다.
관일의 초식은 창법에서 흔하게 볼 수 있으니까.
검으로 해를 쏴서 떨어뜨린다는 사일검법에 비하면 현실과 타협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백무량의 ‘관일’은.
“무, 무너진다.”
연무장의 울타리에 기대고 있던 무인이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울타리 기둥이 꿰뚫리고 약간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무너지기 시작했다.
“극치로다. 극치가 저기에 있구나.”
가장 연로한 학도사가 눈물을 보였다.
누구도 이루지 못한 사문의 완성을 본 것이 기쁨에 겨웠다.
하지만 백무량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사일검법을 관일로 바꾼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테지.’
점창파의 검법은 원숙하다는 말까지 들을 정도로 익혔다.
원류를 익힌 이상, 아류 또한 이해할 수 있으리라.
백무량은 눈을 감고서 목검을 늘어뜨렸다.
심상을 구현하려고 했다.
천주무극세를 펼치듯, ‘꿰뚫는다’는 개념의 묘리가 하나둘씩 백무량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렇게 도학의 무학이 목검에 깃들었다.
“……후우.”
숨을 가다듬고 목검을 쥐었다.
겉보기엔 그저 평범한 목검이나, 내관혈을 타고 흐른 공력과 무학의 깊이가 한계까지 담겨 있다.
백무량은 그것을 꽉 붙잡고서 하늘을 향해 내질렀다.
마교가 만들어 낸 혼란의 징표.
아지랑이를 향해서.
‘관일.’
그 가르침을 숙고한 결과물이 목검 끝에서 터졌다.
콰아아아아!
허공을 찢고 가르는 소리가 무림맹에 퍼졌다.
그 소리는 곧 파문처럼 흘러서 호광성 전역의 새들이 동시에 날아올랐다.
백무량이 쥔 목검은 산산이 조각나 바닥에 널브러졌다.
하지만 그것을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하늘을 향해 있었다.
“다, 닿았다.”
누가 꺼낸 말인지는 몰랐다.
다만 그것이 신호가 되었다.
“아지랑이가…… 흩어졌다.”
“어쩌면 이길 수 있을지도 몰라.”
희망 섞인 소란이 연무장에 퍼졌다.
상식적으로는 단순한 우연일 공산이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마교가 세운 제단은 모산에 있는데 이곳은 호광성이지 않나?
거리가 멀어도 너무 멀다.
햇빛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워서 잠시 그렇게 보였을 뿐일 터였다.
그러나 백무량이 임기응변으로 펼친 도문의 일 검.
그 한 번의 검격이 아지랑이를 흩어 냈다.
[멋지구나.]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 비급을 보여준 학도사들에게 들리게끔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자네들이 보여 준 사문의 무학이야. 어떤가?”
“…….”
학도사들은 망연히 하늘을 보고 있었다.
극치를 넘어선 무언가.
한 번 보았을 뿐인 사문의 비급을 보고서 아주 훌륭하게 펼쳤다.
인세의 무공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만들어 낸 감동이 너무나도 벅차올라, 눈물을 흘릴 방법마저 까먹고서 말했다.
“천하……제일입니다.”
“천하제일의 무공을 가르쳐 준 거, 고맙네.”
백무량은 한 학도사의 어깨를 툭 치고서 지나갔다.
장난을 섞어서 마무리했다고 생각했는데, 등 뒤에서 감동에 젖어서 눈물 흘리는 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