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50화 (250/275)

아지랑이 (1)

흉조였다.

짹짹거리던 새가 난데없이 불길한 귀곡성을 흘리거나 계곡이 시뻘겋게 물들었다.

심지어 북방에서는 나뭇잎이 얼어붙기까지 했다.

혹한을 짊어진 거인이 천하 곳곳을 누비듯.

유난히도 추운 겨울은 북방에서 끝나지 않고, 남쪽으로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러나 그의 걸음이 닿지 않은 곳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저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아지랑이.

수백 명의 핏물을 머금고서 기화하기 시작한 제단의 아지랑이가 하늘을 향해 나아갔다.

그 기괴한 광경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었기에 새로이 나타난 사교 집단의 증거가 되었다.

춥고 고달픈 혼란.

두려움이 낳은 자중지란.

중소 문파가 찢어지고 가족이 사라지는 광경이 빈번해졌다.

울거나 세상을 저주하는 소리가 들리는 일은 이제 흔했다.

“대사형…….”

유성한은 울먹이는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현종휘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각오를 다지고 하산했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유성한은 뒷말을 이으려다 자신의 손을 보았다.

소맷자락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손아귀에서 빠져나갔다.

뒤늦게 주위를 살피니 현종휘가 가까이 있는 촌로에게 다가가 온화한 표정으로 묻고 있었다.

“건량(乾糧)이지만 물에 충분히 불려서 먹으면 배가 조금이나마 부를 겁니다.”

“이걸로는 턱없이 모자라네…….”

“가족이 몇이나 됩니까?”

“나 말고…… 아들 내외랑 손주들까지 합쳐서 다섯일세.”

“왜 어르신을 뺍니까?”

“이러다 보면 언젠가 죽지 않겠나. 내가 먹는 것보다는 자식들에게 주는 게 낫지.”

촌로는 죽을 각오까지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지나가던 무인에게 밥을 구걸하다가는 언제 어떻게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다만 세상사에 초탈한 미소가 마음에 걸렸다.

유성한이 잠시 머뭇거리다 현종휘에게 다가갔다.

“가는 길이 같다면 모셔다 드리죠.”

“그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느냐?”

현종휘가 차분히 가라앉은 어조로 말하니 유성한이 당황하여 대꾸했다.

“……예?”

“우리가 한 번 모셔다 드린다고 하여 위험이 사라질 것 같으냐?”

“…….”

말문이 턱 막혔다.

갑자기 대사형이 차갑게 느껴지기도 했다.

유성한이 아는 현종휘라면 끝까지 모셔다 드리자고 했을 테니까, 곤륜파의 표식을 쪼개 주자고도 말했을 대사형이니까.

그러나 현종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갈 길이 바쁘다. 성한아, 어르신은 우리가 모셔다 드리지 않아도 잘 찾아가실 것이고 성에 도착하고 나서 편의를 봐 드려도 늦지 않아.”

“……그래도.”

“우리가 늦으면 사조님께서 저 아지랑이를 없애러 가는 시간 또한 늦어질 거다. 그래도 하겠느냐?”

정녕 그것을 원하냐고 물어 오는 현종휘의 시선.

그 엄중함에 유성한이 어깨를 좁혔다.

하물며 촌로마저도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천하가 혼란한 이유가 저 이상한 것 때문이라고 들었네. 젊은 영웅이 남아서 날 도울 이유는 없네. 얼른 가서 이 소란을 끝내 주게.”

촌로가 그렇게 말하니 유성한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현종휘의 얼굴에 쓰디쓴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자, 가자. 지체할 시간이 없다.”

“예, 대사형.”

현종휘는 유성한과 함께 호광성으로 곧장 향했다.

무림맹에 도착하고 나서는 중간에 마주쳤던 촌로를 돌봐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며칠 전에 흑도가 그 주변을 휩쓸었다고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현종휘의 목소리가 공허했다.

시야에 보이는 한 줄기 아지랑이.

그것을 노려보는 시선에 집념이 가득했다.

***

“제발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저희 지방에…….”

각지에서 온 방문객이 무림맹 주위에 터를 잡고서 각자 한을 토했다.

무림맹에 합류한 낭인이나 무인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에는 늘 어두운 기색이 드리워 있었다.

당장 마교와 싸워야 하지 않겠냐며 분통을 터트리는 이도 적지 않았으나.

“참아라. 터트릴 때가 곧 오니까.”

금모도왕 남천이 자주 모습을 드러내서 무인들을 다독였다.

합류하기로 한 무인이 모두 모이기로 약조한 시간까지가 두 시진.

그 후엔 곧장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모산으로 진격할 작정이었다.

분명 그러하였을 텐데.

“무영조사가 도착했습니다.”

“그래서?”

“구천신검을 꼭 뵈어야 하겠답니다.”

여태껏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마지막 십대고수가 백무량을 콕 집어서 찾아왔다.

남천은 불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내 얼굴부터 보고 가라고 해라.”

“아, 하지만…….”

문지기가 잠시 머뭇거리는 사이에 챙이 넓은 죽립을 쓴 사내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얼굴은 죽립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배배 꼬인 수염이 소수민족을 떠올리게 했다.

“금모도왕, 이게 얼마 만인가?”

“얼마 만이긴, 처음 보는 사이잖아.”

“그랬던가?”

한껏 너스레를 떤 무영조사가 히죽 웃으며 다가왔다.

딱 봐도 주변 분위기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남자처럼 보여서, 남천은 속으로 생각했다.

‘보통 이런 놈은 자기가 궁할 때만 찾아오는 법인데.’

“표정이 안 좋군. 내가 찾아온 게 그리 싫나?”

“코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갑자기 찾아왔으니 손님보다는 불청객에 가깝지.”

“하하,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무영조사는 남천의 핀잔을 가볍게 넘기고는 아지랑이를 턱짓했다.

“자네도 그럼 같이 가겠나? 저것에 관해서 해 줄 말이 있어서 말이야.”

“……뭐야, 백 선배만 보려고 온 게 아닌가?”

“모산으로 싸우러 갈 거라면 같이 듣는 게 좋지.”

그 말에 남천은 자연스럽게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무영조사, 당신은 가지 않는다는 건가?”

“그래.”

“무책임하군.”

남천은 짧은 말로 무영조사를 비난했다.

그러나 무영조사는 그렇게 말할 줄 알고 있었다는 듯 씁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나도 알아. 하지만 어쩌겠나, 이미 싸울 수 없는 몸이거늘.”

스윽.

무영조사가 오른팔 소매를 길게 걷어붙이자, 팔뚝에 깊은 상흔이 있었다.

힘줄이 끊기고 핏줄이 찢어진 상태였다.

“공력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정돈가.”

남천의 말에 무영조사가 고개를 끄덕이곤 소매를 내렸다.

“그래, 하지만 그놈과 싸우면서 어느 정도 얻은 바가 있었네.”

“칠성교주 말인가?”

“……여기서 자세히 논하기는 어렵군.”

무영조사가 주변을 곁눈질했다.

남천과의 대화를 듣기 위해 무인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개중에 마교의 간자가 숨어 있을지도 모르는 노릇.

남천은 무영조사에게 따라오라는 듯 등을 올렸다.

“일단은 안에서 이야기하지.”

무영조사는 남천을 따라서 백무량이 있는 연무장으로 향했다.

그곳엔 이미 많은 도사가 있었다.

해남파의 장문인인 통천옹, 종남파의 장로로 유명한 목허도장.

그들 외에도 곤륜파의 도사로 보이는 젊은이가 있었다.

“……허.”

저도 모르게 헛기침이 나왔다.

저렇게 새파랗게 어린 도사들까지 모산으로 데려갈 생각이라면, 당장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없어졌다.

콰르르르……!

약관도 되지 않았을 젊은이가 펼친 무공.

세 층을 이룬 구름이 폭풍을 방불케 하는 소음을 일으켰다.

무림맹의 건물이 무사한 것은 오로지 백무량이 태청신공으로 막고 있기 때문이라.

“어찌 저럴 수가 있나.”

장강의 뒤 물결이 앞을 기어이 밀어내는가.

무영조사가 감탄성을 흘리자 앞서 걸어가던 남천이 입을 열었다.

“나도 참 신기했지. 곤륜의 도사는 다 저런가 싶어서.”

“구천신검의 제자인가?”

“글쎄. 제자라고 할 수 있을까? 당신도 귀가 열려 있다면 백무량 선배가 얼마나 빨빨거리고 다녔는지 알 텐데.”

“……그건 그렇지.”

백무량이 강호를 바쁘게 돌아다닌 것이 칠 년.

남을 가르치기보다는 마교와 싸운 시간이 길었고, 폐관 수련에 들었던 적이 잦았다.

기껏해야 수련을 조금씩 봐주는 정도가 한계.

곤륜파의 제자를 돌볼 여념이 없으리라 생각하였는데.

무영조사는 속에 앓고 있던 짐을 바깥으로 털어놨다.

“이래서야 내가 빠진다 해도 강호가 위험할 것 같지 않군.”

소년의 나이에 터득한 상승의 무학.

오른팔은 이제 움직일 수 없으나, 눈이 있는 이상 젊은 도사가 펼친 무공이 얼마나 뛰어난지 알았다.

“그리고 저걸 순수하게 공력만으로 막고 있는 것도 참…… 인간 같지 않소.”

구천신검 백무량.

고금제일인으로 불리고 있단 명성이 아깝지 않다.

무영조사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하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누구냐?”

“아, 나는…….”

“말이 짧다.”

백무량의 시선에 한기가 어렸다. 독기라고 해도 좋았다.

모산으로 향하기 전에 마음을 무장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무영조사는 백무량의 경지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높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저는 무영조사라고 합니다.”

“맹주가 그토록 찾았는데 숨어 다녔다는 마지막 십대고수로군.”

“면목이 없습니다.”

“팔을 그렇게 다쳐서야 어찌 싸울 수 있겠나?”

“……!”

무영조사가 깜짝 놀라서 옆을 돌아보았다.

혹시 남천이 전음을 보냈나 해서였지만, 그는 뭘 보냐는 듯 인상을 찌푸릴 뿐이었다.

그러는 동안에 백무량은 한계까지 가다듬은 안력으로 무영조사를 훑어보았다.

“칠성교주에게 당한 건가?”

“그걸 어찌……!”

“싸웠다면 빨리 말해라. 모산으로 향하는데 시간이 지체된다.”

“그게 어떻게 된 것이냐면은.”

무영조사가 잠시 목을 가다듬고는 칠성교주와 마주쳐서 싸우게 된 경험을 자세히 고했다.

“강동에 있는 금현강에서 낚시를 즐기고 있었는데, 저녁인가 새벽 때쯤에…….”

말주변이 좋은 편은 아닌지라, 조금씩 말을 더듬기도 했다.

하지만 백무량은 인내심을 가지고서 경청했다.

그 말고는 칠성교주와 최근에 싸운 사람이 없을뿐더러, 여유를 부릴 시간도 없었다.

그러다 한 가지 대목에 마음이 걸렸다.

“그가 중간에 가면을 벗었습니다.”

“가면을 벗어?”

백무량이 처음으로 이야기 도중에 끼어들었다.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다.

칠성교란, 가면을 통해서 악신의 힘을 빌리는 사교.

그들의 정점에 선 교주가 가면을 벗는다는 건 백무량의 상식에서 어긋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영조사의 정신은 명정했고,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가면을 벗고 나니, 마기가 한층 더 짙어졌습니다. 마치 선천진기를 끌어내는 것처럼 보였지요.”

칠성교주의 얼굴이 흉측했다는 건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놈도 숨겨진 한 수를 가지고 있었단 건가?’

속으로 한숨을 내쉰 백무량은 불현듯 하늘을 보았다.

검붉은 아지랑이.

불길하기 그지없는 연기가 끝없이 나풀거렸다.

그 모습이 마치 천하를 불태우는 것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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