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성 (2)
-강호가 하나로 뭉친다.
전례 없는 사건이었다.
각 지역에서 호족(豪族) 노릇을 하던 오대세가와 구파일방이 뭉쳐서 한 집단과 싸우게 된다니.
심지어 관인마저도 백무량과 무림맹에게 접촉하여 도움을 준다는 말이 돌았다.
“천하가 바뀔 일이로다.”
지식인이 아니라 일개 소작농도 천하의 변화를 입에 담을 정도였다.
이에 많은 부류가 창궐했다.
“우리 교인은 강호를 떠나 새로운 대륙에서 안식을 찾을 것이오! 필요한 것은 거대한 배를 만들 헌금이오!”
사람들의 불안을 이용해 자기 배를 불리려는 사교 집단.
“지금이다! 모든 고수가 호광성에 모인 이때야말로 기회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 밀려 기를 펴지 못하던 놈들이 새로운 흑도를 구축했다.
혼란은 그렇게 또다시 혼란을 낳았다.
어디서든 회색 연기가 피었고, 누군가가 골목길에서 허무하게 죽었다. 죽음이 무감각해지는 계절이었다.
추운 겨울이 사람 마음까지 차갑게 만들고 말았는가.
그 변화를 백무량은 보지 못했다.
다만 만금상단의 상인들을 통해 들었을 뿐이었다.
“사람은 참으로 못났구나.”
한탄이 저절로 나왔다.
이토록 어렵고, 힘든 이때 어찌 강자는 약자를 갈취하지 못하여 안달이 났나.
어째서 이렇게 무애(無愛)할 수가 있나.
그 이야기를 함께 듣던 남궁진이 입술을 열었다.
“이럴 줄 알고 백의단(白衣團)이라는 것을 미리 만들어 두었습니다.”
“백의단?”
“사교와 싸우기 전에 이런 꼴이 날 것 같아서, 관과 함께 대비해 두었습니다.”
황실과 어쩌다 보니 연이 닿았다고.
백무량에겐 별로 중요치 않은 이야기였다.
그저 사교와 싸우는 도중에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길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직접 나서서 다 때려잡고 싶지만…….’
백무량은 복잡한 생각을 정리하고서 수련장으로 나갔다.
그곳에 종남파와 해남파의 고수가 대기하고 있었다.
비밀스럽게 만든 교류회.
도문의 무학을 하나로 정립하여 우화하는 기로가 눈앞에 있었다.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해남파의 장문인, 통천옹.
“뭐 그리 표정이 심각하십니까?”
선배임을 알고서 부쩍 눈치를 보기 시작한 종남파의 목허도장.
그들의 얼굴에 큰 기대감이 있었다.
“도문의 근간에 그런 대의가 있을지도 모른다니, 허허.”
마물에게 대적하였던 고대의 무인들.
그들 중 도사들은 언젠가 다시 나타날 마물에게 대적하기 위해 하나로 정립할 수 있는 무류를 창안하였다는 백무량의 가설.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 목허도장은 말이 안 된다며 부정했고, 통천옹은 그저 신기해하기만 했다.
“다른 도문이야 그렇다 쳐도, 해남파는 바다 건너에 있는 섬에서 오랫동안 고여 있었는데…… 그 대의가 닿아 있겠습니까?”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백무량도 통천옹의 의문에 긍정했다. 가설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필요한 호기심이기도 했다.
마교와 가장 먼 곳.
해남도에서 개파한 해남파마저도 곤륜의 검해 아래에 정립할 수 있다면 시야가 달라지리라.
가지가 무한하게 쳐져서, 하늘의 한 티끌마저 보이지 않는 거목.
그 아래에 펼쳐진 바다가 있다.
처음에는 곤륜의 무학만이 존재하였지만, 백무량의 노력 끝에 다른 도문의 무학까지 흡수하였다.
이에 백무량은 또 다른 답을 내었다.
“만일 종남과 해남의 무학까지 내가 손쉽게 다룰 수 있다면…… 서로 교류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지 않나?”
“그게 무슨 소립니까?”
“마교가 코앞에서 사람을 제물로 바치고, 천하를 혼란스럽게 하는 때에 무학을 꽁꽁 감추고 있어야겠냐는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지만.”
도문끼리 서로 무학을 교류하여 힘을 기르자는 제안.
백무량의 말에 통천옹이 자기 수염을 매만졌다.
“선배의 가설이 맞는다면 강호의 도문이 같은 근간을 지니고 있기야 하겠지만,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때와 상황은 다르지요.”
“……그런가, 어려우냐.”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통천옹이 끝말을 이었다.
“일단 시도는 해 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뭣?”
목허도장이 저도 모르게 반문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나 통천옹의 목소리는 무덤덤하기만 했다.
“사문의 무학을 반출하는 것은 중죄. 단전을 폐하여도 이상하지 않으나, 언제 마물과 싸워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 무론 정도는 논하여도 되지 않겠나?”
통천옹의 무덤덤한 목소리가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목허도장에게로 향했다.
언제까지 강호의 상식에 얽매여 있을 것이냔 책망이 담겨 있었다.
그것을 알아채지 못할 목허도장이 아니었다.
“나라고 속 좁게 굴고 싶은 건 아니오! 다만…… 당장 오늘 저녁이나 내일 출발할지도 모를 상황에서 어찌 무론을 나눈단 말이오?”
“왜 못 나눈단 말이냐?”
답답함을 이기지 못한 백무량이 대화 중간에 끼어들었다.
“예전에 연무지회 때부터 널 지켜보았다. 편협한 걸 왜 드러내지 못해서 안달이냐?”
“아, 아니…….”
“화산에서 있었던 일로 네가 나쁘지 않은 사람인 건 알겠다만, 우유부단하고 질투심 많은 것도 알겠다.”
백무량이 흠을 잡자, 목허도장도 욱하여 말했다.
“그러는 선배는…….”
“나도 알아.”
목허도장의 말을 가볍게 끊은 백무량이 진지한 어조로 진의를 꺼냈다.
“서로 흠결 많은 사람인 건 누차 겪어 알지 않나. 나만 해도 과거에 강호에서 많은 소란을 일으켰고, 이번 생도 마찬가지지. 그러니까 고치자는 것이다. 그게 나쁜 것이냐?”
“…….”
목허도장은 잠시 억울하다는 표정을 짓고 한숨을 내쉬었다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전에는 낙매신검에게 질투를 품었고 이번에는 무론을 공유한다는 것이 껄끄러워서 우유부단하게 굴었다.
하지만 그걸 입 밖으로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다.
“……허, 일단은 선배께 무학을 전수하겠습니다.”
“그래 볼까?”
백무량은 히죽 웃으며 어깨를 가볍게 휘돌렸다.
그 직후에 태청신공으로 빚어진 아지랑이가 주변에 무겁게 자리했다.
무림맹에 있는 무인이라면 모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정도로 강한 존재감이었다.
저도 모르게 목검을 꽉 쥔 목허도장이 공력을 운용했다.
“종남의 무학은…… 태을(太乙)부터 시작하여 큰 범주로 나아갑니다.”
“큰 범주라면?”
“직접 보시는 것이 빠를 겁니다.”
목허도장의 목검에 구궁의 신행이 자리했다.
***
백무량이 무학을 재정립하는 사이, 곤륜파에서는 많은 도사가 두 사람의 행장을 챙겨 주고 있었다.
현종휘와 유성한.
두 도사가 행장을 어깨에 짊어지는 모습을 철유가 부럽다는 눈으로 보고 있었다.
“대사형이야 이해하지만, 성한이가 그리 짧은 시간에 고수가 될 줄이야! 하하, 성공했구나!”
“…….”
가까이서 칭찬했음에도 유성한답지 않게 침묵했다.
이에 철유가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냐? 마음이 달라지기라도 했느냐?”
“달라졌죠.”
“무엇이?”
“무서우니까요.”
유성한이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주변의 공기가 차가워졌다.
두려움.
그 감정은 함께 떠나는 현종휘나 곤륜에 남는 도사나 다르지 않았다.
-사조님도 어려워하는 마인을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사조님과 대사형이 자리를 비우는 사이에 곤륜산에 누가 쳐들어오면 어떻게 하지?
-실감이 되질 않아. 앞으로 대체 어떻게 될까?
그들의 생각에 유성한의 말이 뒤섞였다.
늘 강한 척, 당당한 척 허세를 부렸던 유성한이기에 두려움을 토로하는 행동이 크게 다가왔다.
“…….”
“…….”
곤륜산이 잠시 침묵으로 물들던 그때였다.
“두려울 만하지. 누구라도 다르진 않을 거다.”
“……?!”
도사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였다.
장문인 현노윤.
그가 허리를 펴고서 당당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최근 연로하여 기침이 잦았던 모습과는 판이하였다.
그 모습이 현종휘에게는 사뭇 무섭게 다가왔다.
“하, 할아버지…… 들어가셔서 쉬셔야…….”
“제자들이 보고 있는 자리다. 감히 장문인이라고 칭하지 않고 혈육의 정을 논하려느냐! 정신 차려라!”
현노윤은 차가운 목소리로 현종휘의 걱정을 쳐 냈다.
그저 걱정스럽고, 답답한 눈으로 제자들을 훑어보고는 유성한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무섭다고 말하였느냐?”
“……예.”
평소와는 다른 현노윤의 모습에 겁이 났지만, 유성한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고수가 되면 마인과 싸우고 싶다고 말했던 주제에, 이제 가려니까 무서워졌어요. 이상하지요?”
“이상하기는.”
현노윤은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유성한의 어깨를 두드렸다.
뒤이어 눈을 지그시 감아, 여러 기억을 떠올리고 헤아렸다.
“네가 입문하고 대화를 여러 번 하였지만, 아직 진지하게 해 본 적은 없었구나.”
“……?”
“너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게 뭔데요?”
“네가 보타암에 있을 적에 말이다. 마교가 공격해 왔다지?”
“예.”
“너를 데려온 사조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구나.”
현노윤은 가늘고, 숨이 가쁜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마교 때문에 고통받는 아이가 있어서…… 속가제자일지언정 기명제자와 차이를 두지 않고 돌봐 주었으면 한다고 말이다.”
“…….”
“문파의 엄정한 규율을 무시하는 부탁이었지. 내가 뭐라고 말했을 것 같으냐?”
“어, 된다고 하셔서 여기 있을 수 있었겠죠.”
“안 된다고 하였다.”
현노윤은 백무량이 지었던 표정을 떠올렸다.
“화를 내시더구나. 언제 그렇게 편협해졌냐고, 태생이나 배운 무학이 다를지언정 같은 과거를 공유하는 아이가 아니냐고 말이다.”
“같은 과거라면…… 마교 말씀이세요?”
“그래.”
유성한이 인상을 찡그리자, 현노윤이 하려던 말을 이었다.
“곤륜에도 그런 역사가 있단다. 들어 보겠느냐?”
“예.”
그 말에 현노윤은 가까운 바위에 앉았다.
유성한을 비롯하여 주위에 모인 도사들을 향해 옛이야기를 해 주었다.
길진 않았다.
오래 하면 해가 질 테니, 최대한 줄였다. 그렇게 해도 한 시진이 훌쩍 지나갔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니 유성한의 얼굴에 망설임이 없었다.
차기 장문인으로 생각하고 있던 현종휘의 표정도 굳건했다.
“이제 가 보겠습니다.”
두 도사가 극진한 예를 취하고는 곤륜산에서 떠났다.
그 뒷모습을 보며 현노윤이 속으로 생각했다.
‘이제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현노윤은 노쇠한 미소를 지었다.
***
“드디어.”
청노는 완전해진 제단을 보고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는 옆에 있던 칠성교주라고 하여 다르지 않았다.
“청라야, 보고 있느냐? 네가 대의를 완성하였다.”
제단의 끄트머리에서 새어 나오는 검붉은 아지랑이.
그 아지랑이는 조금씩 위로 피어올라, 하늘로 향했다.
사가가각…….
사슬이 조금씩 갉히는 소리가 모산 정상에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