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43화 (243/275)

위문엽 (4)

‘가면이라.’

백무량은 공동파에서 온 전서구로 새로운 정보를 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만일 칠성교주였다면 교주라 썼을 거고, 무인이었다면 별호를 적었을 텐데…….”

척준환의 식견이라면 웬만한 고수는 다 알아볼 수 있을 터였다.

그가 애매하기 짝이 없는 가면을 적었다는 건 정체를 꿰뚫어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문엽아, 네 생각은 어떠냐?”

“뭘 말이오?”

쭈그려 앉은 채 태청신공의 구결을 외우는 위문엽.

아무리 백무량일지라도 사문의 신공을 이런 식으로 유출해선 안 되나, 거대한 싸움을 두고 절차를 따질 순 없었다.

그걸 상기하니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가면 말이야. 현천신검이 그렇게 적었다면 무림인이 아닐까?”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맞소. 척준환의 성격상 아는 대로 남겼을 테니까.”

칠성교주였다면 마교주, 무영조사라면 별호를 끝까지 적을 무인이 바로 척준환이었다.

그가 ‘가면’이라고 적었다면 정말로 특징이 그거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백무량의 인상이 자연스레 찌푸려졌다.

“가뜩이나 마교 때문에 정신이 어지러운데, 가면을 쓰고 척준환을 습격하는 놈까지 있을 줄이야.”

“뭐, 어디서 듣긴 했소.”

“무엇을 말이냐?”

“칠성교 말이요. 가면 쓰는 마교. 그들로 위장하고 사람을 죽이고 다니는 흑도가 많아졌다고 들었소.”

“염병할.”

천하가 혼란하니 인의도 무너지는가?

백무량은 가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채 돌아다닐 악한을 떠올리며 이를 갈았다.

“공동파의 장문인, 그것도 십대고수에게 중상을 입힐 정도라면 흔한 놈은 아닐 텐데 말이야.”

“그거에 대해서 말이오. 조금 신경 쓰이는 놈이 있소.”

위문엽이 자리에서 일어나 백무량과 시선을 마주했다.

“청라라는 놈을 아시오?”

“……모른다.”

“최근 저잣거리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 놈인데, 어디 출신인지도 모르고, 어디 태생인지도 모를 놈이오.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느낌이 싸했지.”

그 말에 백무량이 반론을 내놓았다.

“출신 모르는 무인이야 어디 한둘이냐?”

“그걸 내가 모르겠소? 근데 청라 그놈은 좀 다르단 말이오. 낭인인 남천이나 길바닥 출신인 나도 어디서 살았는지 대충은 나오는데, 말이 되오?”

“음.”

확실히, 십대고수가 저렇게 확언한다면 믿을 만하다.

백무량은 청라에 관해서 더 묻기로 했다.

“몇 번 마주쳤으니 얼마나 강한지는 아나?”

“……그게 참 싸하다는 거요.”

위문엽의 눈가가 일그러졌다.

“어떨 때는 대종사처럼 현격한 기도를 지녔다가, 다른 곳에서 마주쳤을 때는 살기를 풀풀 뿌려 대는데 천살성인가 싶고. 자기 기분 따라 변화하는 놈 같았소.”

“허, 무슨 동물이냐?”

“그래서 심상찮다는 거요.”

위문엽의 말에 백무량은 잠시 의자에 앉아 등을 기댔다.

뒤이어 검해에 있는 선배에게 물었다.

‘저 이야기를 들으면 사이한 마공을 이용한 것 같지 않습니까?’

[저만한 놈이 기도를 읽었으면 마기를 못 알아차렸을 리 없지.]

심천검의 확언에 백무량이 과거의 이야기를 꺼냈다.

‘하지만 예전에 칠성교도 중에 자기 기운을 완벽하게 숨기고, 남을 모방하던 놈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그거야 그렇지만, 명색이 십대고수가 못 알아봤다고?]

‘저랑 같이 저놈을 지켜보셨잖습니까.’

[…….]

심천검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야차 위문엽.

그가 곤륜파에 있으면서 한 행동들은 제자들의 불만을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새로 입문한 제자인데 법도를 지키질 않습니다.

-대사형한테 꼬맹이라고 부르는데 어떡합니까?

-사조님이 해결해 주세요! 시도 때도 없이 밥 달라고 아우성칩니다!

백무량의 거처에 이러한 밀서가 끊임없이 들어왔다.

자연히 인간적인 믿음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심천검이 침묵하자 백무량도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앞에서 마기를 풀풀 흘리는 놈이 있어도 왠지 자기 갈 길만 걸어갈 것 같지 않습니까?’

[……쩝.]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이에 확신을 얻은 백무량이 위문엽에게 재차 물었다.

“청라에게 마기가 느껴지지 않더냐?”

“없었소.”

“어찌 확신할 수 있지?”

“그놈이 직접 손목을 내밀었으니까.”

그 말에 백무량이 눈을 끔뻑였다.

“뭐?”

“말 그대로요. 자길 그렇게 쳐다볼 거면 직접 몸을 훑어보라고 하였소.”

“그, 그래서 어떻더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게 단련된 삼단전이었소. 공력은 조금 탁하긴 했지만…… 단기간에 쌓았다고 생각하면 이상하지 않았지.”

그 일화를 마무리하며 위문엽은 사납게 웃었다.

“그게 참 마음에 들지 않았단 말이오.”

“……과연.”

백무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위문엽처럼 확신에 차진 않았지만, 뭔가 기묘한 부분이 많은 놈이라는 건 맞았다.

‘청라라고 했지.’

얼마 지나지 않아 무림맹에서 새로운 전서구가 도착했다.

[현재 무림맹에 새로운 상승 고수로 확신하는 ‘청라’라는 이가 도착해 있습니다.

선배께서 그의 정체를 명확하게 해 주십시오.

-무림맹주 남궁진]

“문엽아, 네 의심이 옳은 모양이다.”

백무량은 서둘러 제자들을 가르치고 떠날 계획을 세웠다.

***

한때 연무지회에 참석했던 구파일방의 장로들.

종남의 목허 도장(木虛道長).

개방의 무영개(無影丐).

점창의 독검군(獨劍君).

무당의 무의 진인(無疑眞人).

소림의 공저 대사(空貯大士).

황산파의 통천옹(通天翁).

현재 폐관 중인 낙매신검과 중상을 입은 현천신검을 제외하고 중진이 모두 모였다.

무림맹에서 조금 떨어진 외지에서 말이다.

이에 독검군이 불만스러운 표정을 드러냈다.

“아무리 세상이 혼란해도 그렇지 대접이 이래서야 되겠소?”

“끌끌, 성질 좀 죽이게. 현천신검도 중상을 입은 와중에 자네가 무슨 자신감으로 대접 타령이야?”

무영개가 아픈 부분을 꼬집자, 독검군이 토라졌다는 듯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거지가 한번 붙잡은 놀림거리를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연무지회 이후로 자기도 십대고수에 오르겠다느니, 점창의 사일로 복마검을 꺾겠다느니 하던 포부는 어디 가고…… 사내다운 웅심은 주름살이 다 먹어 치웠는감?”

“시끄럽다.”

“맹주가 말하기를, 젊은 상승 고수가 등장했다잖아. 어떡하나? 구천신검은 그래도 대선배라도 됐지, 그놈은 출신도 불분명한 놈인데, 크캬캬캬.”

무영개가 거칠게 웃어 젖히자 독검군은 아예 몸까지 돌렸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통천옹이 이빨 빠진 웃음소릴 내었다.

“흘흘…… 다 젊어서 그런 걸세. 혈기가 아직은 무인으로서 자존하길 바라는 게지.”

평생 수련한 외공이 무너지기 시작하는 나이.

고희를 넘긴 통천옹은 세상만사에 초탈한 눈으로 다른 장로들과 시선을 마주쳤다.

“자네들도 마찬가지야.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으나 마교를 막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닌가? 사소한 다툼이야 이해하지만, 대의는 잊지 말게.”

“……큼, 어르신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나도 아오.”

무영개와 독검군이 선선히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에는 목허 도장과 무의 진인이 입을 열었다.

“한데 무의 진인, 그곳에서도 구천신검이 무학을 배웠다고 들었소만…… 사실이오?”

“그렇소. 장문인께서 직접 가르쳐 주었다고 들었소.”

“허.”

목허 도장은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대선배인 백무량에게 딱히 호의적인 마음은 없었으나, 왜 하필 종남의 무학은 거르고 갔단 말인가?

화산파와 무당파, 공동파의 무학은 고수에게 배웠으면서!

“허, 흠. 종남의 무공도 궁금해하던 것 같은데.”

체면을 덧붙이려고 한마디를 중얼거린 차에 무의 진인이 칼같이 대답했다.

“선배가 종남에 간다는 말은 못 들었소.”

“아니, 그런 것 같다고 말한 거요.”

“사실…… 화산파에 여러 번 들르면서 종남산도 들를 기회가 많지 않았소?”

무의 진인의 묘한 어조에 목허 도장은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타문의 선배에게 무학을 알려 주는 것으로 우열이 갈린단 말인가?

‘아무리 그 선배가 천의를 이은 도사고, 백련교주를 이겼다지만……. 끅.’

백무량의 업적을 속으로 나열하고 나니 울컥했던 마음이 분통으로 변했다.

“이게 다 첫인상이 안 좋아서 그렇지! 내가 직접 알려 주면 달라질 거요!”

“허허, 누가 들으면 뭐라고 한 줄 알겠소.”

“아니라고 할 셈이오?”

목허 도장이 눈을 흘겼으나 무의 진인은 자연스럽게 흘릴 뿐.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만 있던 공저 대사가 찻잎을 달이며 말했다.

“연이 있다면 언젠가 올 것을, 목허 도장은 뭐가 그리 급하시오?”

사람의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불도의 울림이라.

잠시 드잡이질을 고민했던 목허 도장도 더운 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그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음.”

목허 도장이 헛기침하자 다른 장로들도 불현듯 고요해졌다.

단순히 대화의 흐름이 끊겨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모인 외지의 모처.

남궁진 말고는 아무도 몰라야 할 그곳에 천천히 다가오는 인기척이 있었다.

단 한 사람.

여유로운 발걸음에서 목허 도장은 불길함을 읽었다.

“방심하지 마시오.”

“…….”

무언의 동의가 다섯 장로를 거쳤다.

각자 공력을 그러모으고 언제든 초식을 펼칠 수 있도록 정제하던 순간.

드르륵.

갑자기 정문이 젖혀졌으나 그림자 하나 보이지 않았다.

이에 목허 도장이 신중한 어조로 말하기를.

“불청객은 모습을 드러내라.”

“그러지.”

문 너머가 아니라 천장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콰지직!

장로들의 한가운데로 떨어진 사내가 고개를 들었다.

그 모습을 본 목허 도장의 눈이 크게 뜨였다.

“……가면?”

불길함의 정체는 바로 척준환을 습격한 악한이었는가.

여섯 장로가 곧바로 절초를 펼치자, 사내가 낮은 웃음소리를 흘렸다.

“손님을 맞이하지는 못할망정.”

불평을 논한 사내는 주먹을 쥐었다.

***

“사부는 이래저래 챙길 제자가 많으니 내가 먼저 떠나겠소.”

“뭐야?”

백무량은 위문엽을 흘겨보았다.

“이제 배울 건 다 배웠다는 거냐?”

“말 참 섭섭하게 하시오. 곤륜이야 선배가 있으니 괜찮다지만, 이 강호에는 아직 마교도가 돌아다니고 있지 않소!”

“저번에 구했다던 여자처럼 말이지?”

“……누가 들으면 여자라서 구한 줄 알겠소.”

“흥, 아무렴 어떠냐.”

말은 툴툴거렸지만 내심 흡족하였다.

낙매신검, 야차, 금모도왕.

이 셋만 강호를 돌아다녀도 많은 수의 양민을 구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자신은 현종휘와 유성한을 돌볼 생각이었다.

‘정말 아쉽지만, 철유는 마교도와 싸울 재목까진 아니야. 내가 없는 동안 곤륜파를 지키는 정도가 한계지.’

어쩌면 이 그림을 위문엽이 본능적으로 알아차린 걸지도 모른다.

백무량은 위문엽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잘 가라. 태청신공의 수련은 절대 게을리하지 말고.”

“사부.”

“왜.”

“나 같은 제자한테 많이 베풀어서 고맙소.”

“……실없긴.”

얼른 가라는 듯, 백무량이 손을 내젓자 위문엽은 극진한 예를 취하고서 하산했다.

팔뚝에 큰 고통을 주던 금극목의 상충.

그것을 해결한 위문엽의 무위는 한층 더 위를 바라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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