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문엽 (3)
[울지나 말라며?]
[무량아, 실망이 크구나.]
심상에서 패배를 두고 놀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으나 백무량은 가까스로 떠올린 변명을 주절거렸다.
“파, 팔씨름을 연마한 거냐?”
“그게 무슨 소리요, 선배.”
위문엽이 별 미친놈을 보겠다는 듯 미간을 좁혔다.
그럼에도 백무량은 추한 말을 계속 덧붙였다.
“네 팔뚝을 보고 알았다. 뭔진 몰라도 근력을 이용한 무공에 정통할 거고, 팔씨름도 당연히 강하겠지……. 그걸 알면서 나한테 제안하지 않았냐?”
“승낙한 건 선배요.”
“아니, 참. 그, 내가 후배 기 좀 살려 보겠다고 그랬는데… 그 배려를 모른단 말이냐?”
“지고 울지나 말라고 한 것도 선배요.”
폐부에 칼이 박힌 기분이었다.
백무량은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거야…… 재미있으라고 한 소리고…….”
“선배, 선배는 그래도 도문의 대선배 아니오? 했던 말에 책임이 따른다는 건 알 텐데.”
위문엽이 승자의 미소를 짓자, 백무량도 이판사판이었다.
“이놈! 너와 나의 배분 차이가 얼마나 나는데!”
“미안한데 난 도문의 제자가 아니오.”
“네가 익힌 무학의 원류가 불가다! 도문과 불가는 서로 친하게 지내는 걸 모르느냐!”
“아니, 글쎄 난 모르겠다니까.”
위문엽의 어조에 슬슬 짜증이 스몄다.
그걸 알아차린 백무량이 한숨을 내쉬었다.
“재미로 한 내기에 죽자고 달려드네. 미안하다, 잘못했다. 네 무학을 무시해서. 됐냐?”
“……소문이랑 참 다르군.”
위문엽의 떨떠름한 혼잣말에 심천검과 주백천도 공감했다.
[후배야…….]
[사제야…….]
뒷말은 차마 덧붙이지도 못하고 측은한 감정만 남았다.
백무량은 차마 화도 내지 못하고 본론으로 들어갔다.
“아미복호검은 수경과 팔첨이라는 초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수경은 흐름을 조율하고 과거를 되짚으며, 팔첨은 심검을 통해 여덟 개의 송곳에 각자 다른 결을 담지.”
“…….”
“원류는 이렇다는 거다. 어떠냐?”
“다르오.”
위문엽이 잠시 고민하다가 턱을 매만졌다.
“하지만 흐름을 조율하고 송곳 형태로 결을 담는다는 건 얼추 맞군. 혹시 누구한테 듣고 온 건 아니오?”
위문엽은 며칠 전에 지켜 준 아녀자를 떠올렸으나, 백무량의 표정을 보고서 생각을 고쳐야 했다.
“아닌 모양이군.”
도문의 대선배다운 풍모.
저런 모습을 처음부터 보였다면 좋았을 거라는 말이 턱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말하지는 않았다.
위문엽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선배의 말대로 내 무학이 아미복호검과 비슷한 것 같소. 사실…… 무학의 안정성이 워낙 떨어져서 고통이 컸는데, 고칠 방도가 있겠소?”
“존대.”
“……?”
“사부를 모시는데 아직도 편하게 말씀하시겠다?”
“허.”
이것 참 골 아픈 스승이 될 것 같다.
위문엽은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투를 고쳤다.
“앞으로 스승님이라고 하지요.”
“그래.”
“단, 아미복호검을 배울 때까지만요.”
“……뭐야?”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지만, 어쩐지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검해에서 처음 만났던 때의 무명.
그 모습이 위문엽에게서 보였다.
***
위문엽에게 아미복호검을 가르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근본 없는 심법을 익힌 거냐?”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마구잡이로 익히게 됐지요.”
불가와 도가가 반쯤 섞인 내공심법.
그것이 온유한 심법이었다면 다행일 텐데, 확고한 금과 목인지라 금극목(金克木)의 형세가 되어 버렸다.
백무량은 참으로 딱하다는 표정으로 팔뚝을 보았다.
“이상한 심법을 익힌 탓에 팔뚝이 그리된 것이야. 아미복호검도 모든 구결을 알아야 조화를 이뤘을 텐데, 조술(操術)만 전해졌으니…… 쥐는 법만 알고 푸는 법을 몰랐을 테고.”
“면목이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곤륜파에 입문한다면 둘 다 살릴 수 있는 신공을 가르쳐 주마.”
그 말에 위문엽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럼 앞으로 스승님한테 존댓말을 꼬박꼬박 붙여야 한단 겁니까?”
“그래야지.”
“그건 좀…….”
“자존심이 그리 중요하냐?”
백무량으로선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어찌 보면 금모도왕 남천보다도 기막힌 놈이었다.
“너 남 말 죽어도 안 듣는단 소리 많이 들었지?”
“역시 저를 조사하신 거 아닙니까?”
위문엽의 인상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고통을 견디다가 얼굴이 저렇게 변했다는데, 표정 가지고 뭐라 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백무량은 그저 허허 웃고 말았다.
“그래, 그냥 존댓말 하지 마라.”
“정말?”
“정말은 반말이고.”
“정말이오?”
“오냐.”
“그러면 곤륜파에 정식으로 입문하겠소.”
위문엽이 싱글벙글 웃고 있는데 아무래도 한 가지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지금 곤륜파에 입문하면 자기 사형이 수백 명은 된다는 걸.
그리고 현종휘를 대사형으로 모셔야 한다는 사실을.
‘지금 마음껏 웃어 둬라.’
철유를 통해 팔뚝이 마를 때까지 부려 먹으리라.
백무량의 생각을 알아차린 심천검이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대체 곤륜파가 어찌 될는지 모르겠다.]
[하아…….]
주백천의 한숨 소리가 깊었다.
***
“강호십대고수가 이제 넷밖에 남지 않았다는데, 나 청라(靑羅)도 그만한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오.”
남궁진은 피곤한 눈으로 청라를 바라보았다.
가뜩이나 밤새워 척준환의 복귀와 무영조사의 행적 보고를 듣느라 피곤했는데 이건 또 무슨 놈인가 싶었다.
“어디 출신이신가?”
“강함을 증명하는 데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의 직함이 필요하오?”
대답만 들으면 상승 고수나 다를 바 없다.
청라가 보인 자신감에 공감하진 못하겠고, 가볍게 눈을 비비적거렸다.
“자신 있는 절기가 무엇인가?”
“음…… 너무 많은데, 맹주님께서 한번 봐 주시오.”
그 말에 남궁진은 청라가 젊은이다운 허장성세를 부렸다고 생각했다.
“허허, 어디 펼쳐 보시게.”
“그럼.”
철없고 가볍게만 보이던 청라의 기도가 갑자기 위협적으로 치솟았다.
긴장을 잔뜩 풀고 있던 남궁진마저 검에 손을 가져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떻소?”
“허어…… 이럴 수가 있나.”
백련교주와의 싸움 이후로 자존심을 많이 내려놓았다고 생각했건만.
가슴까지 다가온 주먹을 보자니 울컥하는 감정이 들었다.
무인다운 혈기와 진심으로 붙으면 다를 것이란 호승심.
그마저도 청라의 일수를 인정하는 것이기에 남궁진은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겠네.”
“에이, 설마 그걸로 끝이오?”
“……?”
“방금 말했잖소. 나는 십대고수와 비견될 자격이 있다고.”
“진심으로 생사결이라도 하잔 건가?”
“……흐흐, 그러면 안 될 것 같으니, 내 손목을 잡아 보시오.”
‘손목을 잡아 보라니? 설마 탐색이라도 하란 건가?’
남궁진의 표정이 굳었다.
아무리 사문이 없고 성격이 자유분방하대도 그렇지 어찌 자기 몸을 남에게 보여 준단 말인가?
평생 축적한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청라가 허락한 일이니 거절할 수도 없었다.
텁.
남궁진은 청라의 맥을 잡고서 자그마한 공력을 운용했다.
그러자 소우주가 보였다.
“……!”
운용에 신중해야 했기에 목소리는 내지 못하고 눈을 크게 뜨기만 했다.
완전히 합일한 삼단전과 전신에 걸친 세맥.
남궁진이 아는, 한 고금제일의 고수를 떠올리게 했다.
‘구천신검……! 여기에 백무량과 비견되는 고수가 있었단 말인가?’
강호십대고수가 될 자격이 있다고 한 까닭이 단숨에 이해됐다.
상태가 이러니 청라의 일수에 반응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물며 하단전에 담긴 공력의 색은 무색무취.
순수하기 그지없는 기운에 남궁진의 얼굴에 안도가 흘렀다.
이에 청라가 히죽 웃었다.
“어떻소, 이제 이견은 사라진 것 같은데.”
그 말에 남궁진이 손을 떼었다.
“출신은 불명확하나 마교가 천하를 혼란하게 하니, 그대와 같은 고수가 힘을 보태 준다면 무림맹주로서 도움을 아끼지 않겠네!”
“그거야 뭐…… 무림에 적을 둔 남자라면 도와야지요.”
“열흘 안에 구파일방의 장로와 장문인이 모일 테니, 무림맹의 빈객으로 지내 주지 않겠나?”
청라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야 영광이지요! 강호의 영웅들을 만날 생각에 벌써 가슴이 떨립니다.”
‘……그때 이 무인의 내력을 자세히 알아볼 기회가 되겠지.’
남궁진은 이런 속내를 드러내지 않은 채 웃었다.
천하가 혼란한 때 나타난 상승 고수.
공력이 정순하고 깨끗하나 경계심까지 지워선 안 됐다.
어쩌면 칠성교와 천마신교가 무림맹에 들인 세작일지도 모르니까.
‘가장 확실한 건 백 선배를 불러서 판가름하는 거다.’
구천신검 백무량.
그라면 청라를 아군으로 삼아도 될지 확신을 줄 수 있었다.
***
공동파.
곤륜의 영원한 아군이길 천명한 도문에 울적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대체 어쩌다가 이런 상처를…….”
현천신검 척준환.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가 다시 모습을 드러냈을 땐, 빈사에 가까운 상태였다.
아껴 둔 영단으로 치료에 성공했지만, 언제 깨어날진 요원한 일.
고성진과 양청교가 병석 옆에서 자리를 지켰다.
“흉수는 밝혀졌습니까?”
“아니, 아직이다.”
“젠장…….”
양청교의 눈가에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장로가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다.
제자 앞에서 착잡한 마음을 드러내기보다 발로 더 뛰겠다는 의지였다.
이에 고성진은 주먹을 꽉 쥐었다.
“칠성교주가 장문인을 노린 게 아닐까?”
“하지만 사형, 그놈이 나타났다면 진득한 마기 때문에 주변이 다 뒤집혔을 겁니다.”
“그렇겠지.”
고성진이 눈을 꾹 감았다.
칠성교주를 제외하고 척준환을 이렇게 만들 수 있는 고수는 한 손으로 좁힐 수 있었다.
구천신검, 야차, 무영조사, 낙매신검.
그 외엔 구파일방의 장로가 서넛 모여서 합공하는 건데,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뜩이나 마교도가 횡행하는데 장문인을 해하겠다고 전력을 뺄 순 없다. 그럴 천치가 있을 리 없지.’
하물며 척준환이 말없이 자리를 비웠던 것도 이상하다.
고성진은 발만 동동 구르며 훌쩍거리는 양청교를 달랬다.
다만 억울한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반드시 천벌을 받을 것이다!’
까드득.
고성진이 이를 가는 소리에 양청교도 애꿎은 하늘을 원망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장문인이 이렇게 다치셨는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사형?”
“……나도 잘 모르겠구나.”
두 도사가 대화를 나누는데, 척준환의 손가락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그저 습격자의 정체를 알려야 한다는 본능일 뿐.
그가 마침내 한 단어를 완성했을 때, 고성진이 발견했다.
“알겠습니다! 장문인, 어서 무림맹과 곤륜에 전서구를 보내겠습니다!”
척준환이 남긴 단어는 가면(假面).
고성진은 선풍인을 극성으로 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