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36화 (236/275)

무명 (2)

[백노는 청해성 출신의 신비한 도사였다.

누구와도 친하게 지내지 않았으며, 부자의 별점을 봐 주는 것으로 끼니와 잠자리를 얻었다고 했다.

그러다 어느 부자가 그의 학식에 감탄하여 출신을 물었는데.

“만금을 주어도 말할 수 없습니다.”

“그으렇소?”

부자는 토라진 속내를 돌려 말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도사님께 부탁이 하나 있소.”

아미산에 있다는 귀신.

반쯤 터줏대감이 된 무명을 성불시켜 달란 부탁이었다.

신기가 있던 백노는 부자의 심기를 알아차렸으나, 순순히 아미산으로 떠났다는데…….

그는 알았을까?

자기가 한 귀신과 함께 사라질 운명이었다는 것을.]

백무량은 책장에서 눈을 떼고서 정혜 신니를 바라보았다.

서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든 의구심.

이제는 그것을 물어야 할 차례였다.

“이 서책은 누가 쓴 거냐?”

“어느 저잣거리에서 우연치 않게 구했습니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말했지요.”

정혜 신니가 마른 입술을 핥으며 말했다.

“선배님에게만 말씀드리자면…… 선대 장문인들의 위패를 모신 금정원(金頂院) 지하에 있었습니다.”

“허.”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매화자가 쓴 것처럼 보이는 이 서책을 사실은 아미파의 지체 높은 여승이 썼다는 뜻이니까.

‘자기가 쓴 것을 감추기 위해서였겠지.’

그렇게 마음을 먹었다면 바깥에 반출하는 것이 당연했을 텐데, 왜 금정원에 남아 있었을까?

지금 알 수 있는 사실은 없다.

백무량은 약간의 아쉬움을 담아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때.

[후배야, 아무래도 두 놈이 기억을 떠올린 모양이구나.]

‘……!’

자신의 심상 안, 검해.

그 중앙에서 무명과 백노가 가부좌를 튼 채 정좌하고 있었다.

검해를 다스리는 주인, 백무량은 직감적으로 알아차렸다.

그들이 눈을 뜨면 이 서책에 대한 답을 알 수 있으리란 걸.

또한…… 둘 중 하나가 원한(怨恨)을 풀고 승천하리라는 것을.

***

“지겹지도 않나, 또…….”

뒷머리를 벅벅 긁으며 다가오는 귀기의 형상.

얼마나 많은 음기를 취하고 제삿밥을 받아먹었으면 눈 코 입의 자세한 윤곽이 드러나 있다.

백노, 송현(宋晛)은 가벼운 마음으로 왔던 생각을 고쳤다.

“귀하는 누구기에 영산에 눌러앉아 이런 행패를 부리는 것이오?”

낮은 목소리로 도호를 중얼거리며 내기를 끌어 올리니, 태연자약하던 귀신이 다가오던 것을 멈추었다.

뒤이어 그놈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는데.

“시골 노인네 돈이나 뜯는 말코도사는 아닌 모양이다. 그러는 너야말로 누구냐?”

“참으로 기이하다. 아미산에 자리한 여승들이 이런 귀신을 두고도 가만히 있을 리가 없거늘.”

“우리 도사님께선 귀가 들리지 않나?”

“‘아미산이야말로 천하제일의 명승’이란 말도 이제는 끝났구나! 해악을 끼치는 귀신 놈이 있어서야 멀쩡한 사람도 걸어 다니기 어려울 터이니.”

일문불답(一問不答).

귀신이 아무리 물어도 송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단순히 저놈을 무시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다.

‘말에는 힘이 담긴다.’

하물며 그것이 사람이 아니라, 귀기가 응집된 형체라면 더더욱 그러하다.

‘저놈이 다가오다 멈추고 질문을 던져 대는 것도…… 나를 가늠하고 음기로 억죄어 보기 위함이겠지.’

귀신의 영악함에 피해를 입은 도사가 한둘이 아니라고 하였다.

기이한 것은 누구도 죽지 않았다는 것이고, 아미파의 여승을 피해 다녔다는 것인데…….

필시 무언가 사연이 있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송현이 제자리에 풀썩 주저앉았다.

“무슨 짓이냐?”

귀신이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물음에 자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여기 오기 전에 네 행적을 조사하니, 영악하긴 하나 사악하진 않다고 들었다. 하면 이곳에 있는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대화를 하자.”

“…….”

“곤륜산 도맥의 백노라고 한다. 이래도 안 되겠는가?”

송현은 귀신에게 자신의 도명을 밝혔다.

그러자 그놈도 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이름을 밝혔다.

“난 무명이라 한다.”

“무명? 너만 한 놈이 이름이 없을 리가 없을 텐데.”

그 말에 무명이 푸하, 웃고는 자기 가슴을 툭툭 쳤다.

“이름은 죽었을 때 버렸다. 이 몸뚱이에 남은 건 살았을 때 가지고 있던 망념이나 집념, 혹은 후회 같은 것이지.”

송현이 작은 감탄성을 흘렸다.

“호, 그래도 자기가 지박령인 건 아는 모양이로다!”

“인정하지 않는 게 더 추하지 않나?”

무명이 어깨를 으쓱였다.

전신에 서린 귀기가 아니었다면, 일견 사람처럼 보일 정도로 자연스러운 움직이었다.

그렇기에 송현의 내심에 경계심이 한껏 더해졌다.

“하면 이곳에 지금까지 남아 있는 이유가 무엇인가?”

“방금 말하였다, 죽어서도 남은 망념이 있다고.”

“혹시 마교와 관한 것이 아닌가?”

“……허.”

무명이 금방 일어날 것처럼 한쪽 무릎을 굽혔다.

“말코가 아니라 마교의 주구였나? 내가 사람을 잘못 본 모양이군.”

“단정하지 마라. 내 묻고자 하는 것이 있으니까.”

송현은 그렇게 행동할 줄 알았다는 듯 담대하게 말했다.

사실, 부자는 자기가 함정을 팠다고 생각했겠지만…… 여기까지 온 까닭 모두 송현의 뜻이었다.

아미산에서 시체로 발견된 마인.

자신이 줄곧 쫓아다녔던 백련교도가 이곳에서 죽었다기에, 그 사실을 알 만한 부자에게 접촉했을 뿐이다.

무명을 바라보는 눈빛에 힘을 더했다.

“다시 앉아라. 네 망념을 해결할 길이 있을지도 모르니.”

“…….”

송현의 눈동자에서 느껴지는 아득한 정광(正光)에 무명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나 불쾌하다는 표정은 여전히 지워지지 않았다.

“너나 눈에 힘 풀어라. 나 성불시키려고 온 게 아니라면.”

“흘흘.”

심지 없는 웃음을 터트린 송현이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했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처음엔 네가 마교와 관련된 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뭐?”

“까놓고 말해서 마인을 죽일 수 있는 귀신이라니, 그게 말이 되느냐? 귀신으로 위장한 또 다른 마인이라고 여겼지.”

“…….”

그 말에 무명이 잠시 침묵하고, 송현은 하려던 말을 계속했다.

“네가 평범한 귀신이 아니라는 것은 잘 알았다. 그런 몸으로 마인을 죽일 정도라면, 생전에 고강한 고수였겠지. 한은 그보다 더 깊을 것이다.”

“도사가 아니라 포쾌였느냐?”

“말 돌리지 마라.”

송현이 품에서 그림 하나를 꺼냈다.

눈이 펑펑 내리는 산에 존재하는 깊은 굴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 아래에 적힌 백연곡(白煙谷).

중요한 것은 그림이나 제목 따위가 아니었다.

“……너, 뭐 하는 놈이냐?”

무명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으나, 겉으로 드러내지 않기 위해 왼 손목을 꽉 움켰다.

송현의 그림, 백연곡.

그곳에 무한한 선기가 있었다. 닿기만 하면 귀기가 녹아내릴 정도로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에 송현이 점잖은 어조로 말하니.

“네가 평범한 잡귀였다면, 혹은 마인이었다면 바로 꺼냈을 것이다.”

“이제 볼 장 다 보았으니 없애 버리겠단 거냐?”

“그게 아니니까 보여 준 것이다. 아직도 모르겠느냐?”

송현의 눈이 무명을 꿰뚫어 보듯 했다.

“옛 아미의 공부를 수학한 귀신아, 나와 함께 마교에 대항할 생각은 없느냐?”

“……네가 뭘 안다고 지껄이느냐.”

낮게 말하는 무명의 목소리가 마치 늑대가 으르렁거리는 듯했다.

‘무언가 곡절이 있는 걸 망각했구나!’

자신이 성급했음을 깨달은 송현이 온후한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래, 잘 모르니까 네가 말해 다오. 무슨 망념이 있어 이곳에 그토록 오래 남아 있었느냐?”

“……그건.”

무명의 형체를 유지하는 귀기가 한순간 휘청거렸다.

옛이야기를 입에 담으려는 것만으로 아미복호경(峨嵋伏虎經)의 진기가 꿈틀거렸다.

***

무명은 포목점의 외아들이었다.

애석하게도, 무공과는 연이 없었다.

명절에 가끔 아미파의 여승이 펼치는 검무를 보고서 잠자리에 떠올리는 것이 전부인 평범한 남자였다.

‘앞으로도 연은 없겠지.’

그의 나이가 스물 하고도 셋.

무공을 익히기엔 적합하지 않은 나이다. 포목점 일을 도우며 힘을 기른 것이 전부였다.

다만 아쉽기는 했다.

어릴 적, 검을 쥐었을 때 느낀 고동과 본능적으로 펼친 삼재검법.

자신에게 재능이 있다고 확신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무명은 자신의 재능을 재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끓었다.

“스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무슨 말씀이신지요?”

“저한테 검의 재능이 있다고 보십니까?”

“가, 갑자기? 저한테요?”

항상 도복을 찾으러 오는 여승.

그녀에게 어릴 적에 아버지 몰래 연습했던 삼재검법을 보여 주었다.

가죽을 다듬는 칼을 가지고서 허우적거린 것이 전부였지만, 잘 웃어 주었다.

“……하하, 무공을 익히지 않은 몸이라곤 믿기지 않네요.”

“정말입니까?”

“제자로 가르치고 싶어질 수준이에요.”

“그, 그러면 삼재검법이라도 가르쳐 주시면 안 됩니까?”

“맨입으로요?”

“품삯을 깎아 드리겠습니다! 아버지 몰래요!”

“……호호.”

이 대화를 계기로 무명과 여승은 친분을 쌓았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무명은 자기 주제를 알았고, 여승은 정을 통하면 안 된다는 규율을 알았다.

그 사실이 조금씩 아쉬워질 때쯤.

여승은 도복을 받아 오지 않아도 될 신분이 되었다.

‘……잘된 일이야. 괜한 마음을 품는 것보다 나은 게지.’

무명은 가죽을 다듬으며, 조금씩 삼재검법을 연습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났을까?

“허!”

대명절에 여승 몇몇이 내려와 마을에서 검무를 추는데, 자신이 연습한 삼재검법과 몹시 흡사했다.

정확하게는 그녀가 가르쳐 준 삼재검법의 변형.

아미파의 검법을 배우고 있었다는 사실에 무명은 속으로 약간의 희열과 큰 부담을 느꼈다.

그것이 삼 년이 되고, 육 년이 되었을 때.

아미파의 심부름꾼이 무명의 포목점을 찾아왔다.

[이것을 맡길게요. 살아 주세요.]

다급하게 쓰인 짧은 편지와 동봉된 서책 하나.

무명은 감히 펴 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의문에 잠겼다.

‘왜? 왜 나한테? 게다가 살아 달라니?’

다음 날이 되고 나서야 편지의 의미를 깨달았다.

“……아미파가 칠성교에게 공격당했다고?”

서둘러 달려갔다.

달려가는 동안에도 똑똑히 보이는 광경이 있었다.

아미산에 크게 번진 불, 그보다 넓게 퍼져 가는 탁한 연기.

무명의 표정이 자연스레 일그러졌다.

“아미타불!”

“이럴 수가!”

“…….”

무명은 뒤늦게 도착한 아미파의 속가제자들과 함께 움직였다.

그러나 이미 늦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장문제자께서는…….”

“제가 그분을 찾으러 온 것은 어찌 아십니까?”

“평소에, 시주님에 대한 이야기를 자주 말하셨으니까요.”

“…….”

눈시울이 붉어진 여승에게 아무런 말도 붙일 수 없었다.

그저 하염없이 불탄 흔적을 뒤적거리다가, 산 아래로 내려갔다.

‘포목점을 정리하자.’

그렇게 생각을 정하니 마음도 똑같이 따라갔다.

무명은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서 포목점을 정리하고, 무공을 진지하게 익히기 시작했다.

여승이 가르쳐 주었던 검법…… 편지와 함께 동봉되어 있던 내공심법, 아미복호경.

그것을 익히고 나서 아미산을 올랐다.

솔직하게 이실직고하고 벌을 받겠다는 마음이었다.

한데 전에 마주했던 여승이 손목을 붙잡았다.

“사저께서는 시주의 근맥이 끊기길 원하지 않으실 거예요.”

“하지만…….”

“서책만 돌려주고 가세요. 제가 우연히 찾았다고 할게요.”

“…….”

무명은 여승에게 예를 표하고서 아미산에서 내려갔다.

그 이후, 칠성교도를 찾아서 구주를 떠돌기 시작했다.

상처가 늘고.

두 손가락을 잃고.

경험이 부족하여 죽을 뻔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이립의 나이가 되었을 때쯤, 재능은 조금씩 개화하여 강호제일의 고수와 견줄 만큼 성장했다.

가끔 아미파를 찾아가 자신을 말렸던 여승의 안부를 묻기도 했다.

“이제 네가 장문인이라고?”

“예.”

“그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참으로 좋아하셨을 텐데.”

무명은 여전히 자신을 가르쳤던 그녀를 그리워했다.

그만큼 백련교도를 증오하는 마음이 커졌고, 향상심 또한 들불처럼 퍼졌다.

아마 천하제일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한 남자와 마주치지 않았다면…….

“칠성교주…… 네놈을 평생 잊지 않고 증오하겠다. 반드시,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발목을 잡고 말겠다!”

인적 없는 곳.

달빛마저 비추치 않는, 고요하고 쓸쓸한 아미산 구석에서 무명은 죽음을 맞이했다.

***

“한낱 귀신이 아니라 동병상련의 지우였구나.”

무명의 옛 이야기를 경청한 송현이 비애 젖은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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