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35화 (235/275)

무명 (1)

무명의 행적이 적혀 있을지도 모를 서책이라.

백무량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었다.

“먼저 읽어 봐도 되겠나?”

“그러시지요.”

허락을 받은 순간 정혜 신니에게서 서책을 거의 뺏듯이 손을 뻗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걱정과 놀라움이 스쳤다.

“자, 잠깐…….”

가뜩이나 낡은 서책을 험하게 다루었다가는 조각조각 흩어질 것이다.

그걸 모를 백무량이 아니었다.

사라락…….

한계까지 정돈된 정기신은 손끝의 움직임까지 자기 의지대로 정확하게 움직이게끔 한다.

하물며 낡은 종이에서 나오는 부스러기마저도 검해의 의념으로 감싸 안았다.

“……허.”

저렇게 고등한 무위를 자연스럽게 이어 갈 수 있다니.

정혜 신니가 백무량의 경지에 감탄하는 가운데, 정작 장본인은 서책의 내용을 훑느라 여념이 없었다.

“흠.”

처음에 든 감정은 실망이었다.

‘아무래도 헛다리를 짚은 것 같은데……?’

무명협행.

어딘가 저잣거리에서 나돌 만한 제목의 서책에 담긴 내용은 ‘아미산의 무명 협객’에 대한 기록이었다.

가장 멀게는 수백 년부터, 가깝게는 팔십여 년 전까지.

공통적인 건 고대의 복식이었다는 것뿐이다.

백무량의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이거, 아미산을 터 삼은 신비 문파가 아니겠나?”

“저도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제가 조금씩 추가한 각주를 봐 주세요.”

“각주?”

시선을 슬그머니 아래로 내리니, 유려한 필체로 쓰인 각주가 있었다.

한데 중간중간에 쳐져 있는 빗금이라니.

“허허.”

“어, 음, 그건…… 워낙 무명을 자칭한 도사가 많아서 자주 수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손으로 빨개진 뺨을 누르는 정혜 신니.

그녀의 어려진 모습을 보니 자연스레 궁금한 점이 떠올랐다.

“그나저나 무공을 좀 회복했나?”

“아, 그건 보타문주께서 보내 주신 것 덕분에 반 정도는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워낙 신묘한 기운이 감돌기에 무엇인가 했더니 영약이었나?’

백무량은 진심으로 다행이라는 듯 웃었다.

“좋아, 그동안에 사천당가가 시비를 걸진 않았나?”

“선배님께서 돌봐 주신 덕분에 아미를 재건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언제 돌봤지?’

당문천에게 나대지 말라고 꾸짖은 것뿐인데, 그게 아미의 재건을 도운 행동은 아니다.

아무래도 무림맹과 송우현이 도움을 준 것 같았지만, 굳이 진실을 말하고 싶진 않았다.

‘좋게 생각해 줄 때 가만히 있지 뭐.’

백무량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곤 검해의 무명에게 물었다.

‘한데 선배, 선배는 언제 검해에 기거하게 되었소?’

[……정확한 시간은 잊었다만, 아마 팔십 년 정도 됐을 거다.]

‘팔십 년이라면 여기 서책에 적힌 마지막 기록 아니오?’

[…….]

더는 말할 것이 없다는 듯, 무명이 입술을 꾹 다물었다.

백무량이 보기엔 마치 자기를 꾸짖는 것 같았다.

어째서 중요한 것까지 잊고 말았나 하는 자책.

혹은 후배를 보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아쉬움인가.

무명이 곤륜의 선배들을 보고 부러워했던 것을 떠올리며, 백무량은 시선을 서책으로 돌렸다.

사라라락.

다짜고짜 서책의 후반부를 펼치자, 정혜 신니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선배님……?”

“원래 이런 건 마지막부터 봐 주는 거야.”

말을 아무렇게나 주절거리는 가운데, 아주 익숙한 도사의 별호가 눈에 보였다.

‘백노(白老)?’

이십삼 대 장문인이자 검해의 망령 중 한 명.

그의 별호가 왜 여기서 나온단 말인가……?

백무량은 잠시 눈을 감고서 검해의 심상으로 의념을 집중했다.

환영진이 펼쳐진 동굴이 있던 터.

그곳에 무명과 백노가 서로를 믿을 수 없다는 듯 쳐다보고 있었다.

[네가……?]

[난 기억에 없다.]

금방이라도 싸울 것만 같은 긴장감 속.

둘 사이에 심천검이 나타났다.

[그만.]

이미 사라진 망검 대신 망령들을 중재하기 위해 나선 듯했다.

뒤이어 하늘, 백무량을 향해 말했다.

[무량아, 처음 내용부터 시작해라.]

‘하지만 무명 선배가 검해로 들어온 건 이때지 않습니까?’

[처음에 답이 있을 것이다.]

그의 목소리가 평소와는 다르게 몹시 진지했다.

이에 백무량은 천천히 첫 장부터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

“몹쓸 놈들! 어찌 아미산에서 이런 행패를 벌인단 말이냐!”

나이가 이립을 넘은 나무꾼이 애꿎은 땅을 내리쳤다.

피로 물든 대지에 벌거벗겨진 가족이 널브러져 있었다.

나무를 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벌어진 비극.

심지어 걸치고 있던 옷까지 싹싹 벗겨 간 산도적 놈들의 잔악한 행동에 치를 떨었다.

“하늘은 왜 이리 무정하단 말이냐! 차라리, 나까지, 나까지 데려갈 것이지 왜 나만 지옥에 두냔 말이냐!”

삶을 살아갈 원동력을 잃었다.

‘아미파의 여승에게 부탁했다가는 제대로 된 복수를 하지 못할 거다.’

남은 가산을 전부 팔아서 낭인이라도 고용할 생각에 나무꾼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나 주먹을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이 찢어지고, 눈에는 핏발이 가득하다.

그렇게 하늘을 원망하며 아미산 아래로 내려가는데, 희끄무레한 사내 하나가 나무에 기대어 있다.

복수심마저 순간 잊을 정도로 신비한 형체인지라 나무꾼의 목울대가 꿀렁였다.

“누, 누구시오? 사람이라면 응당 목소리를 내어 이름을 말씀하시오!”

“…….”

“뉘시오!”

“하늘을 원망하는 소리를 들었다.”

사내가 한쪽 입술을 비틀며 오른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그토록 모멸에 찬 비웃음은 평생 처음 보는 것이었다.

나무꾼이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

“그렇소! 무정함에 욕하고, 삐뚠 눈을 가졌다고 하여 욕했소!”

“삐뚤다?”

“악인이 아니라 아무런 죄도 짓지 않은 가족을 데려간 눈이오! 어찌 하늘을 존경할 수 있겠소?”

“말 한번 시원하다. 그래, 모진 놈이 천상에서 낄낄거리면서 웃고 있겠지.”

그 말에 잠깐 누그러졌던 분노가 치솟았다.

나무꾼의 인상이 험악하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며 사내가 껄껄 웃었다.

“화가 그렇게 나던가?”

“……피를 보지 않고서는 풀 수 없소.”

“그래서 가산을 모두 챙겨서 내려왔나?”

“무공을 배운 인간 백정 놈 하나 데려오는 것쯤이야, 내 재산을 모두 쏟는다면 가능하지 않겠소?”

독기를 한가득 담아서 말했건만, 사내의 비웃음은 더더욱 짙어졌다.

“하하, 하하하…….”

“뭘 그리 웃으시오? 내가 그리 우습게 보이시오?”

“나를 만난 것을 천운인 줄 알아라.”

“그게 무슨 말이오?”

“그 돈으로 인간 백정을 고용해? 네 가족을 해친 산도적 놈을 죽이겠다?”

사내의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언뜻 보기에 눈가에 피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

나무꾼의 등골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이, 인간이 아니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희끄무레한 것도 그렇고, 하늘을 비웃는 태도 또한 일반적이지 않다.

그 생각을 읽은 것인지 사내가 느린 걸음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저벅, 저벅.

조금씩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나무꾼의 숨이 가빠졌다.

그러나 사내는 멈추지 않고 다가왔다.

혹여나 누가 듣기라도 할까 봐, 귓가까지 다가와서는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본디 네 운명은 가족을 해친 산도적을 못 알아보고 돈을 건네고서, 인적 드문 숲에서 죽는 것이었다.”

“……예?”

깜짝 놀란 나무꾼은 그 자리에서 두 무릎을 꿇었다.

가족을 잃은 것으로 모자라, 마지막 발악까지 허무하게 무위로 돌아간다는 소리가 너무나도 구슬펐다.

억울함에 펑펑 울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고서 물었다.

“그, 그걸 왜 저에게 알려 주십니까?”

운명이라는 것은.

미래라는 것은 인간이 함부로 담아서도, 들어서도 안 된다고 아미파에게 들었다.

‘하늘이 천벌을 내리리라.’

나무꾼이 속으로 겁에 질려 있는데, 사내가 어깨를 툭툭 두드려 주며 말했다.

“그 돈으로 여기서 제를 지내라. 그리하면 본디 죽었을 네 운명을 비껴 내고, 복수까지 이룰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사내의 눈에 사이한 기운이 맺혔다.

한데 기이한 것은 귀기가 아니라고 하였다.

후에 나무꾼이 말하길, 정명(精明)하고 온화한 기운이었다고 하였다.

남의 복수를 이루고 하늘을 비웃는 자처럼 느껴지지 않았다고 하였다.

그렇게 헤어질 때쯤에야 사내의 이름을 들을 수 있었다.

“나는 무명이다.”

그렇게 무명과 헤어진 뒤, 제를 지내고 사흘.

온몸이 검게 물든 산도적 넷이 산기슭에서 비명횡사한 채 발견되었다고 했다.

***

‘기억이 나시오?’

[전혀.]

무명의 즉답에 백무량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솔직하게 말하면, 저잣거리에 나도는 괴담이나 기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아미산에 나타나는 무명의 귀신이라니.

그의 이야기에 ‘협행(俠行)’이라 붙인 매화자의 취향도 참으로 고약했다.

“……으음, 일단은 더 읽어 봐야겠군.”

사락, 사라락.

책장을 넘기면서 눈을 바삐 움직였다.

혹여나 숨어 있는 행간이 있을까, 무명의 정체를 알 만한 구석이 있는지 찾아볼 요량이었다.

그 과정이 서책 중간까지 다다랐을 때쯤.

‘정혜 신니가 가져온 게 아니라면, 여기서 책을 집어 던졌을 텐데.’

무명이라는 신출귀몰한 아미파의 지박령이 행하는 핏빛 협행.

달라지는 거라곤 정명했던 온화한 기운이 점차 귀기에 물드는 것이 전부였다.

읽어 가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

기이하게도 아미산에 살면서 여승과 마주쳤단 이야기는 단 하나도 없었다.

이에 정혜 신니가 각주를 남기기를.

[무명은 아미파의 여승을 피한다. 오로지 하늘을 원망하거나 복수를 염원하는 사람 앞에만 나타날 뿐이다.]

……솔직히 우스운 소견이었다.

아미파의 수장보다는 매화자에 가까운 각주라 실소를 터트릴 뻔했다.

그러지 않은 것은 후반부에 마교의 후예와 싸우는 묘사가 나왔기 때문이다.

“아미복호검?”

백무량의 혼잣말에 정혜 신니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처음에는 선배님 생각처럼 저잣거리에 나도는 책인 줄 알았어요. 하지만 그 글귀를 보고 나서 알았지요.”

더 주의 깊게 보라는 듯, 그녀가 서책 중간을 가리켰다.

그곳에 자세한 표현이 나와 있었다.

[귀기가 한순간 청아한 기운으로 화했다.

후에 부자에게 듣기로, 무명이 피를 토했다고 했다.

집념이 가득한 눈으로 마인을 노려보는데 주위가 웅웅 울렸다고 하였다.

“수경.”

무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니 청아한 기운이 물처럼 화하여 전신을 휘감았다.

겉보기에는 온몸에 힘을 뺀 것 같은데, 바람에 민들레 씨앗이 흩날리듯 움직였다.

부자가 눈을 감았다 떴을 때 모든 게 끝났다.

무명이 마인의 사지를 베고서 머리를 짓누르고 있었다]

‘……이건 팔첨이다. 그것도 완전히 숙하게 익힌 팔첨.’

저잣거리 잡서처럼 보였던 서책에 적힌 아미복호검의 묘사가 이리도 정확하다면 믿을 수밖에 없다.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장문인의 생각이 맞군. 이건 확실히…… 아미복호검의 기록이야.”

“그렇지요?”

인정받은 게 기쁘다는 듯 정혜 신니가 배시시 웃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것을 보지도 않고서 다음 장으로 넘겼다.

[드디어.]

백노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서책의 마지막 장.

무명과 백노가 서로 교차하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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