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확 (5)
“혈채?”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칠십여 년이나 지난 일을 지금에서야, 그것도 백련교주가 죽은 뒤에야 듣게 되다니.
백무량의 노림수가 이것이었나?
모두가 그렇게 생각할 찰나에 송우현이 먼저 흐름을 끊었다.
“뭘 그리 당황하시나들? 당연히 정산했어야 할 일인데.”
“이보시오, 그게 무슨……!”
“아직 얘기 끝나지 않았네.”
묵직한 목소리가 분위기를 장악했다.
태어날 때부터 타고난 재능.
송우현의 점잖고 엄숙한 태도는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게끔 했다.
“과연.”
그걸 본 상왕 조원양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상단주를 두고 다퉜을 때 가장 부러워했던 재능이다.
자기가 남을 복속시키기 위해 상대의 약점을 쥘 때, 송우현은 자연스럽게 상대의 위에 섰다.
평소에 말 많고 욕 많은 태도와는 전혀 다른 반전.
그 모습이야말로 송우현이 가진 전가의 보도이자 자리를 휘어잡는 위엄이다.
“여전하구만, 녀석.”
“…….”
송우현은 조원양의 혼잣말을 의도적으로 무시했다.
지금은 저놈의 방해에 휩쓸릴 것이 아니라, 자리를 휘어잡을 때였다.
“강호에 강자존의 법식이 있다지만, 여기 있는 양반들은 도의라는 걸 안다고 믿네. 멸마척사의 기치를 위해서 왔으니까 말이야.”
“…….”
“그래서 곤륜파와 백무량을 대신하여 나온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느냐.”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서두를 떼고서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러면서 이곳에 자리한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을 살폈다.
웃지만 손가락으로 탁자를 두드리는 놈, 사천당가.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는 놈, 공동파.
무슨 요구를 해도 들어줄 것 같은 아미파까지.
그들을 샅샅이 살피던 송우현이 순간 인상을 찡그렸다.
‘저놈…….’
구석의 조원양이 은근슬쩍 한쪽 눈을 찡그리는 게 아닌가?
엮이면 불편해질 것이 뻔했기에 고개를 홱 돌렸다.
이번 자리가 끝날 때까지 눈길 하나 주지 않으리란 생각으로 아예 몸까지 틀고서, 입을 열었다.
“백무량이가 백련교와 싸우는 동안, 자네들은 무얼 했나?”
“……이보시오!”
“하물며 칠십여 년 전에는 곤륜파가 망해도 비석 하나 세워 주는 게 끝이었지. 그게 자네들이 말하는 영웅의 결말인가?”
말을 끝내고 주위를 둘러보니 불만이 많은 눈치였다.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은 건, 자신이 백무량의 대리인이기 때문이다.
송우현은 더더욱 강하게 나가기로 했다.
“강호의 후배들이 보기에 좋은 과거라고 생각하나?”
“…….”
“고칠 기회를 주겠네. 뭐, 고치지 않겠다면 곤륜에 가서 고하지.”
일부러 모호하게 말했다.
남들에겐 이렇게 들렸을 것이다.
-충분한 성의를 보이지 않으면 언젠가 백무량이 찾아갈 것이다.
천하제일인의 대리인.
완장이 가진 힘이 이렇게도 무섭다.
송우현이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기다리는데, 조원양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한 가지 묻겠소.”
“……?”
“정녕 백무량 선배가 그렇게 말씀하셨소? 혹시 노야의 독단적인 행동은 아니오?”
그 말에 의심하기 시작한 눈들이 많아졌다.
“성품이 아무리 자유분방하다 해도 도사신데…….”
“맞아, 협박을 대리인을 통해서 했겠나?”
한둘이 조잘거리기 시작하니 시끄러워지는 건 금방이었다.
송우현이 조원양을 표독스러운 눈으로 노려보는 순간.
바깥에서 한 줄기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하, 협박이라?”
“……!”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림과 동시에 좌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구천신검 백무량.
백련교주를 베고서 고금제일인이라 불리기 시작한 고수에게 모두가 경의를 표했다.
다만 사천당가의 표정이 고약하여, 백무량이 그에게 터벅터벅 걸어갔다.
“표정이 더럽군. 불만 있나?”
“……아무리 대선배라도 이런 식으론 안 됩니다.”
“이런 식이 뭐냐?”
백무량의 고개가 삐딱하게 기울었다.
“최전방에서 백련교와 싸우다가 멸문당했는데 누구 하나 돕지 않은 거? 아니면 마교에게 당할 뻔했던 네 가문을 도운 거 말이냐?”
“선배!”
“소리치는 것 봐라. 여기 구환신수가 있었다면 목숨이 성치 않았을 거다.”
당문천의 별호가 언급되자 그놈이 입을 꽉 다물렸다.
그걸 본 백무량은 만인을 향해 말했다.
“과거에 멸문하여 받지 못했던 합당한 보상을 받고자 하는데, 불만 있는 사람 있나?”
“……불만이라니요.”
가만히 침묵하고 있던 공동파의 고수가 술잔을 매만졌다.
“선배는 도문을 대표하는 고수로서 명성을 드높였습니다. 하물며…… 공동은 운산보의 부정(不正)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요. 할 말이 없습니다.”
깔끔하게 잘못을 인정하는 언동이라.
백무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문인과 성진, 청교는 잘 지내나?”
“장문인이야 건강하시지만, 두 녀석은 요즘 두문불출합니다. 선배와 감히 말을 트고 지내서 놀림을 당하고 있으니까요.”
“……앞으로 더 놀려 주게.”
곤란해하는 두 도사의 표정을 상상하니 저절로 흥이 돋는다.
뒤이어 시선을 아미파의 여승에게 돌렸다.
“내가 아미에 보낸 전서구는 잘 도착했나?”
“정혜 신니께서 조사하고 계십니다.”
“장문인이?”
백무량의 어조가 저도 모르게 높아졌다.
그저 아미복호검과 무명의 과거를 알아봐 달란 부탁이었건만, 장문인이 손수 나섰을 줄이야.
잠깐 생각을 정리하는데 여승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선배께서 부탁한 일에 흠결이 없도록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 성격이 그렇게 더러워 보였나?’
혹여라도 기분이 상하면 사문에 큰 벼락이라도 떨어질 것처럼 행동한다.
백무량은 잠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는 반성했다.
“돌아가면 직접 알아봐 줘서 고맙다고 전해 주게.”
“예, 알겠습니다!”
여승이 소리가 쩍 울리도록 강하게 포권했다.
그게 몹시 부담스러운 나머지, 시선을 만만한 놈한테 돌렸다.
“어이, 이런 식.”
“저,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 너 말씀이시다.”
사천당가 놈이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무, 무슨 일이신지요?”
“내가 무슨 일이 있어야 말을 걸 수 있었나…….”
“아, 아닙니다! 편하게 말씀하십시오!”
그 말에 주변에 있던 무인들이 실소를 터트렸다.
아니, 한 명은 아니었다.
“푸하하, 꼴좋다!”
예전에 사천당가와 불편했었다고 하더니만, 송우현의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릴 정도였다.
백무량은 한쪽 귀를 막고서 사천당가 놈한테 물었다.
“네가 생각하기에 강호십대고수 중에 가장 강한 사람이 누구냐?”
“낙매신검이지요!”
“하면 제일 강해질 가능성이 큰 무인이 누구냐?”
기대를 하고 던진 물음은 아니었다.
낙매신검이나 남천처럼 같이 등을 맞대고 싸울 수 있을 만한 전력이 있을까, 의문이 들었을 뿐.
한데 그놈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그야 도광(道狂) 위문엽이지요!”
도사로서 적잖이 당황스러운 별호인지라, 자연스럽게 되물었다.
“도광……? 왜 도광이냐?”
“도가의 무공을 익힌 것 같은데, 행동하는 것에 법식이나 도리가 없고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고수인데 나이가 어립니다!”
사천당가 놈의 말에 검해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심천검이 큭큭 웃었다.
[듣고 보니 너 아니냐?]
‘이야기 중에 끼어드는 거 아닙니다, 선배.’
[너 같은 놈이 더 있을 리가 없는데…….]
백무량이 인상을 찡그렸다.
그 화는 자연스럽게 눈앞에 있는 놈한테 옮겨졌다.
“어디 있는 줄 아냐?”
“그게…… 문파 없이 하염없이 떠도는 고수인지라, 행방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그 어려운 일을 내가 해야 할까?”
“아닙니다. 사천당가에서 맡아서 하겠습니다.”
“됐다, 무림맹이랑 같이 움직여라.”
“며, 명심하겠습니다!”
사천당가 놈이 고개를 숙이며 은근슬쩍 눈을 흘기니, 백무량의 입술도 자연스럽게 열렸다.
“구환신수와 독연화한테 나중에 들른다고 전해라.”
“알겠습니다!”
백무량은 그것으로 이번 자리를 정리했다.
잠시 후.
“또 나중에 어떤 소리를 들으려고 그렇게 해?”
송우현의 핀잔에 백무량은 가볍게 대꾸했다.
“내가 안 나섰으면 자리가 길어졌을 거 아니오? 도와줘도 난리네.”
“이제 도사는 포기하고 상인이라도 될 테냐?”
“또, 또 마음에도 없는 소리.”
그 말에 송우현이 피식 웃었다.
“고맙다.”
‘이제야 바른말이 나오는구만.’
입 밖으로 말하면 험한 말만 들을 테니, 속으로만 생각했다.
조금 인내해서 송우현을 아군으로 삼을 수 있다면 몇 번이고 참을 수 있었다.
***
그날 이후로 열흘이 지났다.
그동안 백무량은 후배들의 무공을 봐주며 무공을 가다듬었다.
검해에서 눈부신 발전을 이루었지만, 실전에서 숙하게 펼치는 건 다른 문제니까.
상대는 현실의 현종휘이기도 했고 검해의 심천검과 무명이기도 했다.
‘매일매일 이렇게 평안하면 얼마나 좋을까?’
소일거리 하듯 후배를 가르치고 자강(自彊)하기 위해 사문의 무학을 다듬는다.
하루하루가 만족스러웠으나, 그만큼 다가오는 시간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칠성교와 천마신교.
그들이 되살리고 있을 고대의 마물.
“그놈들이야 아무것도 아니지!”
후배들에겐 이렇게 말하지만, 속으로는 초조했다.
수백, 천 년 동안 이어진 천의조차 이기지 못한 적수.
그들을 상대하면서 조금도 오만할 수 없다.
그저 소처럼 우직하게 수련하는 것만이 초조함을 달랠 유일한 방법이었다.
“……흐으으.”
열병 같았다.
겨울에 가까운 칼바람이 전신을 스쳐도 검을 휘둘렀고, 잠이 오지 않아서 운룡대팔식을 수련했다.
가끔 현노윤이 와서 걱정스럽다고 말했지만, 귀에 들리질 않았다.
‘내가 해내지 못하면…… 사형과 사질의 목숨이 무용지물이 되는 거니까.’
그 무게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어깨를 짓누르던 날.
곤륜산에 첫눈이 내리던 날에 아미파의 여승이 백무량을 찾아왔다.
“오면서 깜짝 놀랐습니다. 이제 막 약관이 되거나 되지도 않은 세 동도가 그토록 높은 경지에 올랐을 줄은 몰랐거든요!”
찾아온 이유보다 현종휘와 철유, 유성한의 칭찬이 먼저다.
백무량은 혀를 가볍게 차고는 여승에게 물었다.
“무슨 일로 왔나?”
“전서구를 보내시지 않았던가요? 그 결과를 말씀드리려고 왔습니다.”
“……솔직히 까맣게 잊고 있었네.”
“오래 걸렸으니까요.”
여승, 아니 정혜 신니는 무안하게 들릴 말을 웃으면서 받아 주었다.
“아미복호검의 유래와 무명(武名)이라 자칭한 선배. 그걸 알아봐 달라고 하셨지요?”
“그랬지.”
“전자는 찾기가 어려워서 문제였고, 후자는 너무 많아서 문제였어요. 이름을 숨기고 활동한 협객이 워낙 많아야지요.”
정혜 신니의 말이 길어질 듯하자, 백무량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찾을 수 있었나?”
말을 끊는 순간 후회했다.
너무 성급했다. 수련을 계속하면서 커진 초조함이 행실에 옮겨붙은 것 같았다.
이에 정혜 신니가 부드럽게 웃었다.
“죄송합니다, 선배. 힘들게 찾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나 봐요.”
“……아니야, 내가 성급했어.”
“그보다 이걸 먼저 보시죠. 저도 읽으면서 깜짝 놀랐으니까요.”
스윽.
그녀가 품에서 낡은 서책을 꺼냈다.
그 서책에 네 글자가 적혀 있었다.
[무명협행(武名俠行)]
[저건……!]
서책의 제목을 본 무명이 크게 동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