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선향 (4)
천뢰기에 이어지는 고혼일검(孤魂一劍).
한때 무림을 호령한 남궁세가의 절학이 남궁진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꽈르르!
하늘의 별을 닮은 강기가 백련교주의 백회혈을 노렸다.
“죽어라!”
남궁진의 검혼이 담긴 일격이다.
이에 백련교주가 백무량에게 펼치려던 쌍장을 급하게 수습했다.
면류관이 거칠게 흔들린다.
반쯤 잘린 구슬끼리 부딪치는 소리, 짧게 끊기는 호흡.
정면에 있던 백무량은 백련교주의 당혹을 느꼈다.
[지금!]
제정신을 뒤늦게 차린 남천이 콧김을 내뿜었다.
그가 운용한 열양지기가 백련교주의 코와 입을 노렸다.
훌륭하기 그지없는 합격이다. 백무량은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백선신검을 쥐었다.
‘내가 펼칠 수 있는 최강의 일격.’
유유무극검은 결국 화산의 절학이다.
평생 동안 배운 곤륜의 무학과 비견하여 부족하진 않지만, 손바닥이 부르트도록 숙(熟)하진 않았다.
무엇보다 곤륜에 마교를 물리칠 검의(劍意)가 있다고 믿었다.
‘의심하지 않고, 흐르는 대로. 얽매임 없이 흘러가도록…….’
천주무극세의 기수식을 취한다.
백무량에게 내재된 삼단전, 천주가 의념에 따라 전신을 연거푸 휘돌았다.
마기로 툭 건드리기만 해도 주화입마가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천만한 상황.
하지만 백무량은 남천과 남궁진을 믿었다. 그들은 이 전장에 자기 뜻으로 왔다.
구천검 백무량이 아니라, 되살아난 백무량이 만든 인연.
그들이 목숨을 걸고서 온 의지를 믿었다.
“……후우.”
구천화우검의 마지막 초식, 유천앙시(幽天仰視).
이 초식을 배울 땐 사부인 주자령조차 구결을 제대로 파자하지 않았다.
그저 하늘을 우러러보라고 하였다. 깊고 그윽한 하늘에 경의를 품고서 곤륜의 무학을 풀어내라고 하였다.
그땐 무슨 헛소리인가 했지만.
‘검해에서 충분히 배웠다.’
곤륜의 무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고, 의심함으로써 얻은 확신.
백무량은 그것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그윽하게 펼친 심상에 일평생 궁구하며 수련한 무론과 무학을 뒤섞어, 또 다른 하늘을 그렸다.
검해라고 봐도 좋았다.
아무려면 어떠냔 백무량의 성미가 깊게 개입하여, 만상에 가까워졌다.
‘천주무극세와 유유무극검의 좋은 점을 섞어서 나아간다.’
백선신검에 담긴 검력이 극에 다다랐을 때.
선천진기와 천주가 공명하였다.
무공의 경계를 돌파하려는 듯, 무한한 힘이 백무량에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초식부터 팔초식, 그리고 백무량이 지금까지 배워 온 타문의 무학까지도.
백무량과 백선신검 자체가 하나의 구결이고 심상이 되었다.
“……놈!”
이변을 느낀 백련교주가 좌수를 휘둘렀다.
바야흐로 칠십여 년 전, 백무량이 도박수로 펼쳤던 초식이 완성되어 가는 걸 느낀 것이다.
쐐액!
백련교주의 마공이 백무량의 내관혈을 노렸다. 절초를 펼치기 전에 손목의 요혈을 노리겠다는 의도가 훤히 보였다.
“어딜!”
그 의도를 읽은 남천이 곧바로 광랑참을 쏟아 냈다.
쿠콰콰!
열양지기로 이루어진 강기가 백련교주의 손목 위를 불사르려는 듯했다.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뼈까지도 시꺼멓게 물들었을 열기였다.
그러나 백련교주는 달랐다.
“흠.”
가벼운 헛기침만으로 열양지기를 짓누르고도 남는다.
내상을 입은 남천이 핏물을 줄줄 흘리는 가운데 남궁진이 끼어들었다.
스르릉!
고혼일검에서 이어지는 제왕검형.
하늘을 닮은 검강의 빛무리를 백련교주를 향해 쏟아 냈다.
일견 장대비 같았으나 파괴력은 폭풍과 함께 휘몰아친 우박과 다르지 않았다.
“귀찮게 구는구나!”
흑광(黑光).
백련교주의 좌장에서 새어 나온 마기가 검붉은 번개처럼 휘몰아쳤다.
쩌저저적!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굉음이 불야성 전체를 울렸다.
항상 번잡하던 거리가 고요해지고, 웃음과 싸움으로 시끌벅적하던 소리가 비명으로 화했다.
마교가 천하를 지배하면 모든 이가 고통받으리라.
그 생각이 두 고수의 머리를 스쳤다.
정의감이나 협의라곤 조금도 없는 남천조차도 인상을 찌푸렸다.
“시팔!”
이럴 줄 알았다면 예전부터 영약이라도 하나씩 처먹어 둘걸.
이런 후회가 머릿속을 스쳤다.
그러나 이제 와서 애새끼처럼 징징댈 순 없었다.
찰나의 방심이 사선(死線)으로 향하는 지름길이다.
“후욱!”
숨을 한가득 몰아쉰 남천이 공력을 집중시켰다.
시뻘겋게 달궈진 도가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았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단 한 번.
백련교주의 좌장을 쳐 내고 부러진대도 상관없다.
그 간절함이 남천의 열화신공을 전보다 높은 곳으로 향하게 했다.
한껏 고양된 상단전에 하나둘씩 늘어나는 균열.
조금만 흐트러져도 무너질 듯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그가 쥔 도는 하얗게 백열하고 있었다.
성화교도가 보았다면 그 즉시 무릎을 꿇었으리라.
“……위험하도다.”
백련교주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단 말인가.”
백무량만 조심하면 될 줄 알았건만, 남천까지도 ‘벽’을 넘어 천애의 영역에 달하였다.
백련교주에게 있어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었다.
“충분히 지켜보았다고 생각했거늘…….”
흑도에서 암약하면서 무인이란 것들이 어떻게 강해지는지 지켜보았다.
일부러 약한 척하기도, 한 중소 문파를 찾아가 사형제의 목숨을 위협하기도 했다.
그 시간 동안 무림인에 관해 이해했다고 여겼다.
한데…….
“너희는 끝끝내 바짓단을 잡고 늘어지려느냐.”
백련교주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지금 당장은 알지 못했지만, 생전 처음으로 느낀 짜증이었다.
“귀찮다. 둘 다 죽음으로 사죄해라.”
백무량에게 흩뿌리려던 흑광의 마기를 남천과 남궁진에게 펼쳤다.
좌수, 좌장에서 터져 나온 마공이 열양지기와 선천진기를 뒤덮었다.
“이 무슨…….”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듯, 남궁진의 입가가 가늘게 벌어졌다.
“괴력난신이란 말이냐. 어떻게.”
두 상승 고수의 공력을 피라미처럼 짓밟는단 말인가.
절망을 느꼈지만 눈을 감지는 않았다. 남궁진은 발바닥과 맞닿는 대지의 강건함을 느꼈다.
거기서 기력을 얻은 남궁진이 입을 크게 벌렸다.
“도왕, 합세하시오!”
“오냐!”
어깨를 맞댄 두 고수가 각자 절초를 펼쳤다. 기수식에서부터 물처럼 이어지는 절학이 백련교주의 사혈을 노렸다.
그 합격은 물거품처럼 흩어졌다.
쩌저적!
“커헉!”
피를 한 됫박이나 토한 남궁진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얘졌다.
남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이런…… 씹!”
다리가 휘청거리는 것을 애써 붙잡았지만, 이미 늦었다.
백련교주의 우수(右手)가 장절하게 휘둘러졌다.
꽈드드득……!
도와 검이 얽혔다.
어떻게든 백련교주의 우수를 막으려는 발버둥이었으나 큰 소득은 없었다.
너무나도 지쳤다.
“젠장! 언제까지 막아 줘야 하는 거냐!”
남천이 백무량에게 한가득 불만을 터트리는 순간.
“오래 기다렸어.”
백무량이 두 고수의 어깨를 양손으로 부드럽게 밀어 냈다.
“……!”
“아, 아니!”
남천과 남궁진은 옆으로 밀려 나면서 큰 충격에 빠졌다.
양손으로 자기들을 밀어 내면 검은 어떻게 쥔단 말인가?
하물며, 백련교주가 마공을 그대로 휘두르면 무방비 상태가 아닌가!
“이런 미친!”
남천이 눈을 사납게 뜨는데, 백무량의 모습은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것처럼 편안하기만 했다.
“곤륜의 검해를 아나?”
“……내가 알아야 하느냐?”
백련교주가 가볍게 반문했다.
그의 얼굴에는 여유로움이 가득했다.
상반신을 훤히 펼치고 있는 상대를 보면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하지만 백무량 주위에 넘실거리고 있는 게 있었다.
곤륜의 검해.
예전에는 그저 무명식(無名式)으로, 미완의 일 초로 끝났지만…… 지금은 달랐다.
“균천관일.”
“……뭣?”
백련교주답지 않게 당황했다.
본래 펼치려던 절초가 아니라, 구천화우검의 첫 초식이라니.
완전히 자포자기한 게 아니라면 자기를 무시한 것이리라.
백무량에게 휘두른 우수에 마기를 더욱더 불어 넣는 순간, 이변이 나타났다.
쏴아아…….
백무량의 일 검에 담긴 것은 수십 겹으로 이루어진 파도였다.
공동파의 경파, 무당파의 태극, 유유무극검…… 백무량이 익히고자 노력하고 체득한 무학이 켜켜이 쌓였다.
그것을 단지 찌르기, 충(衝)의 형태로 담았을 뿐이다.
“곤륜검해의 균천관일이다.”
백무량의 음색이 백련교주를 상대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을 정도로 평온했다.
“받아 내 보아라.”
콰콰콰콰……!
층운을 이룬 청운이 곧 검해의 파도가 되어 몰아쳤다.
얼핏 보면 유유무극검과 형세가 비슷했으나 균천관일에는 찌르는 형상 안에 만상이, 금강이, 화검이, 태극이 있었다.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곤륜의 검이라.
“이것이 너의 답이냐.”
백련교주의 입술이 고집스럽게 비틀어졌다.
무림에 괴력난신으로 임하겠다는 뜻.
마공으로 얼룩진 인간의 망상이 검해와 부딪쳤다. 그가 쓰고 있던 면류관은 일찍이 가루가 된 지 오래였다.
그것을 본 백무량이 느긋한 몸짓으로 백선신검을 쥐었다.
“창천명월.”
좌에서 우로 휘둘러지는 실선.
하나의 선에서 검해의 파도가 세차게 휘몰아쳤다.
“……!”
츠츳!
그것을 막아 낸 백련교주가 뒤로 밀려 나갔다.
백선신검에 담긴 검력도 만만치 않았지만, 태청신공을 한껏 머금은 파도가 마기를 정화하고 있었다.
이것이 천의를 이은 도사인가.
백련교주는 백무량이 예전처럼 녹록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일향만천(一晌滿天).
무계봉신술 안에 갇혀 있을 때 만들어 낸 절초.
그 구결이 백련교주의 쌍장 안에서 빚어졌다.
“어디 한번……!”
백련교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백무량이 선공을 취했다.
호천풍연.
백무량은 초식명을 소리없이 입에 담았다.
빙긋 웃으며 백선신검을 휘두르는 행동에서 전에 없던 품위와 여유가 있었다.
“……!”
백련교주의 오감이 순간 지워졌다. 시야가 새하얗게 밝아지고, 피부엔 닭살이 돋았다.
육감은 가히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수십, 수백의 강기가 전신을 겨냥하고 있는 것처럼.
백련교주가 식은땀을 흘리는 가운데 백무량이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죽이기 전에 화는 풀어야지.”
저게 대체 무슨 소리인가 좌중이 지켜보는데, 백무량의 오른팔이 크게 움직였다.
짜악!
백련교주의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어찌나 강하게 후려쳤는지, 얻어맞은 뺨이 빨갛게 부풀었다.
“……허업!”
모두가 경악하여 어떠한 말도 내뱉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