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선향 (5)
쩌억!
공력이 한껏 담긴 주먹질이 백련교주의 턱을 후려쳤다.
‘우직’ 하는 소리와 함께 턱 아래가 부풀었다. 뼈에 금이 간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도 백련교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 목이 날아가고 싶지 않다면.”
백무량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칠십여 년 전의 원한과 후회가 알알이 맺힌 육성이었다.
“백련교주, 네가 죽인 곤륜 동도의 숫자는 기억하느냐?”
“……어찌 알겠느냐!”
백련교주가 큭큭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길을 걷다 개미를 짓밟았는데, 그 숫자를 어찌 헤아릴까! 이곳에 있는 놈들도 마찬가지다. 여기서 몇이나 죽었대도, 나는 전혀 괘념치 않았을 것이다!”
괴력난신으로 불렸던 인간의 본모습이었다.
백련교주의 힘은 천의마저 부수고 강호십대고수조차 찢어 죽일 정도였으나, 본질은 마공에 얼룩진 무언가에 불과했다.
그가 어떠한 연유로 마공에 입문했는지 모른다.
아니, 사실은 알 필요도 없다.
악한에게 사연이란 불필요했다.
그것이 사파도 아니고 천하를 불태울 뿐인 마도라면 더더욱.
백무량은 무정한 눈으로 백련교주를 노려보았다.
“남길 말은?”
“아쉽다.”
백련교주가 혀를 쯧 차며 웃었다.
“칠십여 년 전, 도망친 놈까지 확실하게 죽였어야 했는데.”
“…….”
백무량의 시선이 잠시 먼 곳으로 향했다.
마기로 인해 어두워졌던 불야성의 등불이 다시 빛을 발하고 흔들린다.
그것만으로 없어졌던 활기가 되살아나는 듯했다.
‘역시나.’
앞으로 살아갈 무림에 마도란 없어야 한다.
백무량은 그 사실을 가슴속에 되새겼다.
그들을 물리치기 위해서 검해에 있는 선배들이 망령이 되어서까지 남은 것이다.
‘보고 계십니까, 선배들?’
[…….]
‘제가 이루겠습니다. 수백, 천에 이르는 세월 동안 곤륜파가 이루지 못한 것을. 다른 도문이 잊어버리고 만 것을 이루겠습니다.’
백무량은 진심을 담아 검해에 고했다.
‘선배들은 고독하게 싸웠을 테지만, 저는 그러지 않을 겁니다. 이번에 남천과 남궁진이라는 고수와 함께 싸웠듯, 다른 이들과 함께 마도를 이 천하에서 지울 겁니다.’
이것이 바로 주백천이 그린 그림이고, 백무량이 가고자 하는 길이다.
그것을 위해서 구파일방에 다시 이름을 올리고…… 장로들과 얼굴을 익혔다.
그동안 고단하기만 했던 백무량의 행적이 마침내 우화하였다는 것을 느꼈을 때.
[……역시, 좋은 뿌리에서 튼튼한 가지가 뻗는 법이지.]
심천검이 실없는 소리를 던지는 동안 주백천은 그저 웃기만 했다.
백무량에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천간투.”
호천풍연에서 이어지는 파형(波形)의 변초.
검경의 파도가 백련교주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
“쉽지 않겠구나.”
멀리서 백련교주의 죽음을 지켜본 칠성교주가 가면을 고쳐 썼다.
‘언제 저렇게 강해졌단 말인가.’
백무량과 마지막으로 마주한 것이 봄.
지금이 가을임을 생각하면 해를 넘긴 것도 아니다.
칠성교주는 백무량이 펼쳤던 세 초식을 떠올렸다.
단순한 무공이 아니라 의념에 심상을 실어서 펼친 것 같았다.
“내가 상대했다면 어땠을까?”
칠성교주가 턱을 매만지며 고민에 잠긴 그때.
백무량의 시선이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눈빛이 마주친 듯했다.
‘……설마 내 위치를 알아챘다고?’
칠성교주는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가면에 담긴 권능, 성류(星類)는 무인의 기감 따위로 알아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높은 이능.
천이통과 같은 신기가 아니고서야 불가능할 터인데.
‘천의를 이은 도사를 지금까지 너무 우습게 본 건가.’
아무리 되살아났다고 한들 겨우 약관을 조금 넘었을 뿐.
그렇게 판단했던 것이 조금씩 후회로 되돌아옴을 느꼈다.
‘청노를 채근하는 수밖에.’
칠성교주의 가면 아래에 시퍼런 광망이 번뜩였다.
***
뚜둑, 뚜두두둑…….
면류관이 힘없이 떨어졌다.
절대자라고 여겨졌던 백련교주.
그의 죽음은 만인이 예상했던 것보다 초라하고 조잡했다.
“…….”
“…….”
본래 흑도였던 백련교도들은 말없이 백련교주의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이내 그들의 눈동자에 당황과 두려움이 치솟는다.
“나, 나는 이용당한 것뿐이야!”
“난 저자에게 속았…….”
심지 없는 거짓말들이 요란했다.
누구 하나 자기 잘못을 논하는 놈이 없었다.
그저 강해지고 싶었다며, 무인에겐 달콤한 유혹이 아니겠냐며 같잖은 소리를 주절거렸다.
귀가 피로해진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들었다.
“내가 너희를 죽이는 데 얼마나 걸릴까?”
“…….”
흑도는 힘의 논리에 익숙하다.
백련교주에게 충성을 바쳤듯, 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마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백무량은 이들의 처우를 남궁진에게 맡기기로 했다.
“당장 죽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만, 여기까지 온 무림맹주의 면은 살려 주어야겠지.”
“……줄로 모두 묶어라.”
남궁진이 잔뜩 피곤함에 젖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희는 무림맹과 관부에 의해 단전이 폐해지고…… 관노로 살아갈 것이다.”
남궁진의 결정은 단호했다.
백련교를 비롯해, 다른 마교가 벌인 혼란을 저놈들이 정리하게 만드는 수완이라.
백무량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남천에게 물었다.
“너는 할 말 없냐?”
“무슨?”
“뭐라도 할 말이 있다면 지금 하라는 거다.”
“염병.”
남천이 씩 웃으니 피로 물든 앞니가 번들거렸다.
“내가 뭐 공명심이라도 있었으면 문파를 만들었겠지. 태산검문이라는 좋은 간판도 가지고 있으니까!”
“그래서?”
“귀찮소.”
그 말에 백무량도 피식 웃었다.
“내가 선배인데 말이 가볍네?”
“대우받고 싶소?”
그렇게 되묻는 남천의 얼굴에 장난기가 가득해,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내저었다.
“아니다, 내가 낭인한테 예의를 바란 게 잘못이지.”
“나이 어린 선배한테 쓴소리를 들으니 이게 더 힘들구만.”
남천이 자기 허리를 툭툭 두드리곤 한쪽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그 뒷모습이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발목을 다쳤는데도 내색하지 않으려는 듯했다.
“다음에 부를 일 있으면 부르시오.”
“그러지.”
백무량의 말에 남천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무엇을 할지 알 것 같았다.
[수련이겠지.]
[저런 놈의 자존심이야 예나 지금이나 비슷해!]
부족한 공력과 숙하게 익히지 못한 무학.
그 후회가 아른거려서 서둘러 자리를 뜬 것처럼 보였다.
‘녀석.’
보다 보면 옛날의 자신이 떠오른다.
백무량은 남천에게 시선을 거뒀다.
자존심 때문에 서둘러 자리를 떠나는 후배보다 더욱 중요한 것이 있었다.
‘피부가 따가울 정도구만.’
호광성의 불야성.
불 꺼질 날 없는 곳에 많은 이가 들어오고, 떠난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은 아니다.
각자의 밤을 즐기기보다 강호의 역사가 바뀌는 것을 보고자 많은 이들이 모였고, 떠나던 발걸음도 멈췄다.
“저자가…….”
“저자라니 이 사람아! 배분이 얼마나 높은데!”
“…….”
“저렇게 어린 용모로 구천검?”
백무량을 올려다보는 시선에 많은 감정이 있었다.
모두가 존경을 품지는 않았다. 시기하거나 질투하는 시선이야 늘 존재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들을 이해했다.
무인이라는 종자라면 강자를 상대로도 꺾이지 않는 기질이 있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것이 있어야만 마교를 상대로 물러섬이 없다.
무인은 자기 터전을 지킬 때 더더욱 강해진다.
‘내가 그랬으니, 이들 또한…… 모두가 아니더라도 몇몇은 그러겠지.’
백무량의 시선이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향했다.
많은 군상이 모인 자리다.
무림맹, 제갈세가, 낭인…… 하다못해 불야성의 파락호와 호사가 들까지.
백련교주를 죽인 천하제일인이 무슨 말을 할까 궁금해하며 자기 예상을 떠들어 댔다.
이에 백무량은 숨을 지극하게 골랐다.
“후우…….”
호흡은 곧바로 천주와 일천세맥을 휘돌았다.
뒤이어 눈을 크게 뜨니, 밝은 정광이 담긴 눈빛에 만인이 압도되는 듯했다.
“…….”
“…….”
시끌벅적하던 좌중이 금세 고요해졌다.
백무량이 답을 정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들의 예상을 자연스럽게 벗어났다.
“차이를 알겠나?”
“……예?”
“백련교주가 나타났을 때도 지금처럼 똑같이 조용했지. 그 차이를 알겠나?”
호광성에서 가장 유명한 호사가, 주서자가 대답했다.
“대화가 통하는 것이오.”
“또?”
“이렇게 다가갈 수 있지.”
“옳다. 백련교주라면 다 죽이고도 남았을 거다.”
백무량은 고개를 힘 있게 끄덕였다.
“아직도 마교가 남의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 버려라. 내가 구천검의 환생이 아니라고 믿어도 상관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여기 죽은 백련교주 같은 놈이 남아 있다는 거다.”
“…….”
“그놈들에겐 대화가 통하지 않아.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양민이고, 관인이고 모두 죽일 테지. 지금까지 이룬 터전이나 명예 같은 것도 물거품이 될 거야.”
그 말에 많은 이들이 고민에 빠진 듯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저런 말을 할 줄 알았다며 중얼거리곤 자리를 떠났다.
백무량은 그의 얼굴을 기억했다.
언젠가 만나면 시비라도 걸어 줄 생각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백련교도 사이에 있던 무인이 손을 들었다.
“누구냐?”
“……나다.”
백련교도를 밀쳐 대며 나타난 무인은 백무량의 미간을 찌푸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흑마……?”
과거 마교에게 이용당했던 사대악인.
흑마가 이곳까지 나타난 연유가 무엇이든, 백무량에겐 좋게 보이지 않았다.
“아직도 마교의 주구 노릇이었나?”
“아니, 아니다. 나도 백련교주에게 붙잡혀 있었던 거다.”
흑마가 억울하다는 듯 한쪽 손을 내밀었다.
보아하니 자기 내력을 확인하라는 뜻인데, 거절할 이유가 딱히 없었다.
백무량은 그의 내관혈을 붙잡았다.
태청신공의 웅혼한 공력이 흑마의 전신을 투과하니, 흑마가 핏물을 울컥 토해 냈다.
“커헉!”
“백련교의 마공은 익히지 않았군?”
“벽촌에서 은거하고 있던 것을, 백련교주가 끌어냈다.”
“……그렇다고 내가 사정을 봐줄 필요가 있던가?”
백무량의 눈동자가 차가워졌다.
백련교의 마공을 익히지 않았다고 한들, 흑마는 사대악인의 일원이며 사특한 무공을 익힌 놈이었다.
살려 줄 이유라곤 조금도 없다.
그 생각을 읽어 냈는지, 흑마가 다급한 어조로 말했다.
“너, 너도 알다시피 요안의 남자에게 부려 먹히지 않았더냐! 마교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돕겠다! 적어도 그때까지는 살려 다오!”
“……말이 짧아.”
남천이 가벼운 어투를 쓰는 건 봐줄 수 있지만, 흑마에게 그럴 의리가 있던가?
백무량이 내관혈에 공력을 집중시키자 흑마의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얘졌다.
“사, 사죄하겠습니다, 선배!”
‘사실 고개를 숙였어도 어떻게 처리할진 똑같았겠지만.’
백무량의 시선이 제갈경에게 향했다.
[이자는 특별히 관리해. 자기가 말한 대로 가진 바 실력은 있으니 마교와 싸우는 데 도움은 될 거야.]
[어찌하든 상관없겠습니까?]
제갈경의 말에 정파답지 않은 음습함이 있었다.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흑마 정도의 고수를 다루려면 엄청난 제약이 필요할 테니까.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라. 나는…… 곤륜으로 돌아가겠다.]
백련교주를 무찌른 대가가 얼마나 클까?
그것으로 마지막 대전을 준비할 작정이었다.
바야흐로 수확의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