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선향 (3)
떼구르르…….
세 고수의 귓가에 자그마한 소리가 들렸다.
백련교주가 쓴 면류관의 구슬이 바닥에 구르는 잡음.
강기가 부딪치고 담벼락이 무너지며 나는 굉음에 비하면 사소한 것에 불과하나, 세 고수에게는 중요했다.
-저놈도 결국 인간이다!
마도 고수.
무적인 줄만 알았던 백련교주가 강한 인간으로 격하되는 순간이다.
백무량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맺혔다.
“닿는군. 그것도 꽤 가까이.”
“……놈.”
백련교주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감정이 희미한 그에게 저만한 모습이라.
백무량은 백련교주의 지실혈을 타고 솟구치는 마기를 보며 전음을 보냈다.
[주의하게.]
[누가 할 말을!]
[……!]
남천이 자신감 있게 씩 웃는 와중에 남궁진의 얼굴에 식은땀이 흘렀다.
잠시 뒤로 빠졌던 남천에 비해 남궁진은 백련교주의 마기를 체감했으니까.
[금모도왕, 같이 움직이지.]
[뭐야? 내가 왜…….]
꽈르르릉!
거대한 전각이 무너지는 도중에 빨간색 처마가 보랏빛 마기로 물드는 광경.
인지를 벗어난 백련교주의 마공에 남천이 재빨리 말을 바꿨다.
[맞군. 역시 무림맹주 아니랄까 봐 전략적이야.]
남천의 시선이 정면으로 향했다.
백련교주가 마기를 운용하면, 백무량 또한 태청신공와 천주를 공명시킨다.
그 강렬하고도 장중한 울림이 무인들을 보호했다.
무림맹과 제갈세가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백련교도를 제압하고, 진법을 펼치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남천이 헛웃음 지으며 백련교주에게 도를 휘둘렀다.
그러면서 남궁진과 담소를 나누었다.
[누군 둘이서 아등바등하는데, 참으로 대단한 놈이다.]
[놈은 무슨…… 선배요.]
[선배? 생긴 것은 젖비린내 나는…….]
[직접 한번 그렇게 말해 보십시오.]
[그랬다가 지랄 같은, 오만불손한 후배라고 한 소리 듣게?]
전음으로 대화를 나누면서도 백련교주에게 휘두르는 절초의 기세는 꺾이지 않는다.
백무량이 선두에 서서 백련교주의 기세를 꺾으면 남천과 남궁진이 틈을 노렸다.
굴강(屈强)의 연격.
그것이 백여 초를 넘어가자 백련교주의 앞섶이 길게 찢어졌다.
[손목 아래, 내관혈에 닿았을까?]
백무량에게 묻는 남천의 전음에 초조한 음색이 담겼다.
아무리 강호십대고수고, 태산검문의 극의를 익혔다고 한들 공력의 양이 적었으니까.
시간이 지나면 백무량이 백련교주와 홀로 싸워야 한다.
적어도 그 전에 치명타를 입히고 싶은 것이 남천의 절실한 마음이건만.
[얕았어.]
피부를 조금 베었을 뿐이라고, 백무량은 구천화우검을 연거푸 펼치며 대답했다.
남천의 손등 위로 핏줄이 도드라지는 순간이었다.
‘젠장.’
이래서야 낭인의 왕이라면서 거들먹거린 시간이 아깝다.
남천의 자존심에 깊은 상처가 남았다.
아무리 상대가 백련교주라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는 건 성격에 맞지 않았다.
그러니까.
[뒤를 봐 주시게.]
[……예?]
남천의 느닷없는 부드러운 어투에 남궁진이 순간 당황했다.
그러나 길지는 않았다. 싸우는 도중에 틈을 보일 만큼 경험이 짧은 무인은 아니었다.
[마음껏 해 보시오!]
[좋다.]
남천은 제자리에 우뚝 섰다.
얼마 남지 않은 공력을 차분하게 다스렸다. 주변에서 청운과 마기가 치열하게 부딪치고 있음에도 그러했다.
사실상 일평생 처음.
동공이 아닌, 좌선좌공의 방식으로 공력을 다스려 본다.
‘역시 나랑은 정말 안 맞는구만.’
미간에 인상이 깊어졌지만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러는 데엔 이유가 있었다.
‘하필이면 도문이었다니.’
백무량에겐 불만을 토했지만, 약속을 지키기 위해 태산검문의 내력을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렇게 얻은 결과는…… 비급의 유실된 일부가 좌선좌공을 통해 펼치는 방식이라는 것.
‘성질에 맞지 않아도, 시도는 해 봐야겠지.’
남천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백무량의 태청신공을 모방하듯, 열화신공을 삼단전에 걸쳐 휘돌렸다.
한 바퀴, 두 바퀴…….
공력이 흐르는 길이가 길수록, 깊은 집중이 더해질수록.
“……후우우.”
남천의 입가에서 허연 입김이 나왔다.
대맥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당장이라도 좌공을 멈추고 열기를 토해 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 초조함과 절박함을 연료로 삼는다.
열화신공의 내기를 불로 이루어진 강으로 펴 내는 심상.
그곳에 무엇을 담느냐면은…….
‘눈앞에 강한 선배가 계시는데, 따라가야지.’
백무량에게 듣기로 자기는 곤륜의 무학이 담긴 바다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땐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낭인처럼 굴더니만 결국 도사구만.’ 하고서.
그러나 이제는 어렴풋이 알 것 같았다.
‘내 방식대로 가야 했던 거야.’
남천에겐 백무량과 같은 바다가 없다.
유실된 비급을 우연히 얻어서 자기 식대로 익혔다. 그런 자신에게 근본이란 건 없었다.
다만 오래 살아서 얻은 경험과 깨달음이 있었다.
-이렇게 해야 잘 휘둘러지네.
-열화신공의 열양지기를 도에 싣는 게 이런 건가?
태산검문의 가르침과는 조금 다를지 모른다.
그러나 남천이라는 무인이 닦아 놓은 길이 있다. 원류의 무학은 모를지언정 새로운 무류를 만들었다.
‘나라고 못 할 건 아니었던 거지.’
남천은 도를 쥔 손에 힘을 꽉 주고 평소처럼 짙게 웃었다.
‘비급에 적혀 있길, 마지막 초식명은 무정철검(無情鐵劍)이었나?’
초식명을 그렇게 지은 진의는 모른다.
옛 선배가 보면 목덜미를 잡고 쓰러질 일이겠지만,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남천에게는 자기만의 일생이 있다.
그 일생은 무정하지 않았다. 한 낭인을 만나서 죽어야 할 꼬마가 살았고, 우연히 비급을 얻어서 장성할 수 있었다.
‘도리어 유정(有情). 금모인 내가 도를 쓰니 금도(金刀).’
따라서 유정금도.
이름을 정한 순간에 남천이 눈을 반개했다.
***
화르르륵!
뒤에서 솟구치는 열기가 시야를 왜곡한다.
백무량은 남천이 무언가 펼쳤음을 느끼고는 몸을 옆으로 던졌다.
그 직후에 본 건 익숙한 광경이었다.
“……저건!”
염화교의 주구가 이루었던 성신.
불완전한 검해를 완전히 밀어 냈던 열기가 남천의 도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벽을 넘어섰구나, 까딱 여유롭게 굴다가는 너와 가까워지겠어.]
심천검의 말에 백무량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름이 아니라, 그 백련교주가 남천의 도를 피하고 있었다.
“큿!”
“하하!”
목검을 쥔 어린아이처럼 남천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백련교주의 움직임을 압박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얻은 힘에 취한 모습.
백무량은 그 모습을 보고서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털었다.
‘겉은 저래도 속으론 엄청난 집중을 하고 있을 터.’
괜히 말을 걸었다가 깨지면 곤란하다.
다만 실소가 조금씩 나왔다.
남천이 펼치고 있는 형태가 자신을 닮아 있었으니까.
[선배로서 베풀었다고 생각해라, 무량아.]
‘압니다. 치졸하게 굴 생각 없어요.’
그것보다는 여기서 백련교주를 확실하게 제거하는 쪽이 옳다.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꽉 쥐는 그때.
스윽.
남궁진이 앞서 달려 나가서 남천의 공세에 힘을 합했다.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그 뒷모습을 보았다.
“……허.”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마교의 강적과 싸우는 건.
그것도 곤륜의 도사가 아니라 은연중에 무시했던 무림인이 빈자리를 채워 주고 있다니.
백련교주와 싸우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너무나 칠칠찮은 감상이다. 검해에 있는 선배들에게 욕을 들어 먹어도 싸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반성하고 있었는데.
[……허.]
[오래 살아서 좋구나, 이런 광경도 보게 되고.]
검해의 선배들도 감상이 깊은 듯했다.
심지어 아미파의 선배로 추측되는 무명마저도 할 말을 잃은 채 두 무인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배들도 혼자 싸우는 건 싫었던 모양입니다.’
백무량은 씩 웃었다.
선배들이라고 좋아서 혼자 싸운 게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 힘을 합하고 싶었을 터였다.
지금은 둘이지만, 또 다른 강호십대고수가 합류한다면 일대 장관을 이루리라.
백무량이 성대 위, 염천혈에 공력을 더했다.
“나를 잊은 거냐!”
“……!”
태청신공을 잔뜩 때려 박은 사자후에 백련교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와 동시에 세 고수가 몸을 날렸다.
유정금도, 제왕검형, 구천화우검의 오초식인 현천부휘까지.
각자 펼친 절초가 백련교주의 세 방위를 점했다.
가장 까다로운 것은 백무량의 현천부휘.
공동파의 경파가 담긴 초식에는 만상이 담겨 있으며, 의념이 물처럼 흘러서 언제든 변화할 수 있었다.
그것을 본 백련교주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세 놈 중 하나는 반드시 죽이리라.”
진득한 살기가 주변을 잠식했다.
세 고수의 골수까지 침식하려는 듯싶었으나, 검해의 파도가 그것을 막아 냈다.
백련교주의 입가가 가늘게 열렸다.
[인정하마, 네가 나를 위협할 수준에 다다랐다는 것을.]
전음과 비슷하나 듣는 사람의 상단전을 통째로 으깨려는 수법이 무척 흉악하다.
백무량은 인상을 찡그리는 것으로 막아 냈다.
상단전에 기거한 검해의 존재가 그걸 가능하게 했다.
하지만 나머지 둘.
남천과 남궁진의 몸이 찰나 동안 우뚝 멈췄다.
그 시간은 촌각을 수십 차례 쪼갠 것보다 짧았으나, 백련교주에겐 차 한잔을 마시고도 남을 여유였다.
“자, 선택하라. 누굴 살려 두는 게 좋겠느냐?”
백련교주의 목소리가 느슨하게 울렸다.
뒤이어 공간을 점한 마기가 남천과 남궁진을 동시에 노렸다.
까득.
백무량은 이빨을 꽉 앙다물며 검강을 흩뿌렸다.
양천대소에 이은 주천암성.
검강으로 만들어진 벽력과 벽력 안에 숨겨진 칼날이 남천과 남궁진을 노리는 마기를 쳐 냈다.
이에 백련교주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욕심이 많군. 둘 다 구하려고 했다면, 그 생각을 꺾어 주겠다.”
백련교주의 살기가 남천에게 닿았다.
남궁진의 제왕검형이 까다로운 것에 불과하다면, 태산검문의 무학은 위협적이다.
“죽어라.”
백련교주가 손가락으로 남천을 가리키자, 백무량은 두 초식을 펼쳤던 자세에서 몸을 뒤틀었다.
쿵, 쩌적!
평지에서 펼친 운룡대팔식은 허공에서 펼친 것처럼 자유롭진 않았다.
하지만 그 현묘함만큼은 사라지지 않으니.
‘지극한 호흡부터 곤륜의 무학은 시작됨이라.’
백무량의 눈동자에 시퍼런 광망이 깃들었다.
그 순간.
백련교주가 쌍장을 정면으로 휘둘렀다.
남천을 죽이려다가 백무량의 기해혈을 노리려는 듯했다.
“네 단전을 부수고 나면 천의도 끝나겠지.”
“……!”
백무량이 재차 운룡대팔식으로 몸을 비틀었으나 이미 늦었다.
이대로라면 백련교주의 노림수대로 하단전이 부서지고 말리라.
“……썅.”
백무량은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의념을 집중시켰다.
의념과 천주를 공명시켜 수경을 펼치면 운룡대팔식보다 빨리 대응할 수 있다.
‘물론 가슴팍이 좀 찢어지겠지만…….’
단전이 부서지는 것보다 훨씬 낫다.
백무량이 뒤이어 펼칠 심상을 떠올리던 그때.
“나를 물로 봤겠다.”
남궁진이 충혈된 눈으로 백련교주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선천진기까지 끌어낸 강기가 별빛을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