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26화 (226/275)

취선향 (2)

쩌정!

하늘이 무너졌다.

불야성의 밤을 밝히던 등불이 휘청거리다 떨어지고, 별과 달의 색채가 불똥과 마기의 어둠에 먹혔다.

세 무인과 백련교주가 부딪치는 순간이었다.

“크윽…… 썅!”

상대적으로 공력이 부족한 남천이 신음을 흘렸다.

태산검문의 무공엔 부족함이 없으나, 내단이나 영약에 인연이 없었던 탓이다.

그렇게 남천의 상반신이 기우뚱하게 넘어가려던 그때.

“뒤로.”

찰나의 공백을 남궁진이 채웠다.

그가 배운 남궁세가의 절학은 태산검문의 것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으며, 어렸을 적부터 받은 대법과 먹은 영약이 적지 않았다.

무엇보다 남궁진의 제왕검형은 본가보다 드높다.

남천이 만든 열풍(熱風)이 제왕검형에 휘감겨 상승의 효과를 일으키니.

“놈……!”

백련교주가 우수를 위에서 아래로 내리쳤다.

꽈르르릉!

검붉은 번개가 불야성을 한순간 낮처럼 환하게 밝혔다.

그와 동시에 많은 무인들이 백련교주의 등 뒤를 보았다.

검해의 파도를 칼날에 담은 채 휘두르는 도사 백무량을.

“허!”

사교의 진언을 중얼거린 백련교주가 내관혈에 한가득 마기를 담았다.

그 기운은 요사스러운 뱀처럼 움직였다. 마치 살아 움직이듯이 백무량의 목덜미를 향해 송곳니를 드러냈다.

백무량이 일찍이 본 적 있는 무공이다.

‘좌호법의 마공인가!’

청성산에서 마주하였던 이화겸.

그의 마공을 백련교주가 펼친다고 해서 놀라울 건 없었다.

단지 그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높을 뿐.

탐랑(貪朗).

달빛의 아름다운 빛을 탐하는 사마(邪魔)의 일 초.

백무량은 얼굴을 굳히고는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천주가 강렬히 공명하며 대맥이 쿵쿵 울리는 듯했다.

“무량청정!”

평소답지 않게 도호를 중얼거린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비스듬하게 들었다.

그와 동시에 충격이 백무량의 전신을 때렸다.

꽈아앙!

화포의 탄환이 터지는 듯한 충격, 그 뒤에는 열두 갈래의 강기가 요혈을 절묘하게 노렸다.

[기감을 넓혀라!]

심천검의 조언에 백무량은 숨을 훅 내쉬었다.

그러자 백련교주의 마기가 오감을 자극했다.

검해에서 상단전을 단련하지 않았다면 단숨에 정신을 잃었으리라.

‘무명 선배한테 고마움을 느낄 때가 있군.’

천중수 아래에서의 고련이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백무량은 무명이 씩 웃는 것을 느꼈지만, 애써 무시했다.

찰나를 아무리 쪼갠다고 한들 백련교주가 상대여서야 틈을 낼 수가 없다.

‘여기서 단숨에 밀어붙인다.’

적당한 고양감과 자신감.

백무량의 운공에 여러 가지 향취가 섞였다.

공동의 경파, 화산의 화검, 그 중심에 뿌리박힌 곤륜의 구름이라.

소합향과 같으나 세 묘리에 어느 하나 부족함이 없다.

“……과연.”

본질을 꿰뚫어 본 백련교주가 쌍장을 휘둘렀다.

오만하기 그지없는 행동이다.

남궁진의 제왕검형과 백무량의 구천화우검을 동시에 막겠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백무량은 한쪽 입술을 비틀었다.

“마공에 너무 심취한 게 아니냐?”

백무량이 일으키고자 하는 구름.

청운의 경파는 검해와 닮아, 많은 것을 담고자 한다.

백선신검의 검극에 와류를 닮은 검경이 실렸다.

“……!”

백련교주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다운 것이 잡혔다.

당혹인가 혹은 방심했다는 후회인가.

아무렴, 상관없다.

마공을 익힌 마교도가 무슨 생각을 품든 알 바가 아니다.

백무량은 검해에서 떠올렸던 금강경의 법문을 떠올리며 천주에 담긴 공력을 일제히 해방했다.

콰르르……!

태청신공의 공력으로 이루어진 파도, 분연히 소용돌이치는 거품.

그 안에 만상(萬象)이 있었다. 백련교주가 어떠한 형세를 취한다고 한들 마땅히 받아칠 수 있는 무쌍의 태(態)였다

그와 동시에 입술을 달싹였다.

[놓치지 마시오.]

태산검문의 열양지기를 등에 업은 제왕검형이라면 백련교주에게도 통할 것이다.

백무량의 전음을 들은 남궁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 고수의 합공은 상서롭지 않은 일이었으나, 상대가 백련교주인 이상 세속의 상식은 무의미하다.

백무량은 이곳에서 백련교주를 무찌르고자 했다.

그 마음을 은연중에 깨달은 것인가, 백련교주가 찰나에 입술을 달싹였다.

“홍복이로다.”

“……?”

“가장 골치 아픈 놈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백련교주의 시선이 백무량을 관통하는 듯했다.

[널……!]

노리는 것이다.

심천검이 말하는 것을 백무량도 알았다.

시선이 교차하는 것과 동시에 백무량의 몸 전체가 허공에서 휘돌았다.

완벽에 가까운 운룡대팔식.

허공을 자유롭게 누비는 경공에 백련교주의 공세도 계속해서 빈자리를 때리거나 찢을 뿐이었다.

이 모습을 본 남궁진의 이마에 실핏줄이 도드라졌다.

“감히!”

‘제왕검형을 눈앞에 두고도 관심조차 주지 않는 것이냐.’

본가에서 밀려났을지언정 남궁세가의 무공에 대한 자긍심은 여전한 남궁진이었다.

쿠구궁!

제왕의 검형이 분연히 모습을 드러내니 주변에 있던 무인이 게거품을 물며 쓰러졌다.

남궁세가의 자존심이 한가득 담긴 일격.

그것이 천하를 부술 기세로 휘둘러졌을 때, 백련교주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라면 그리할 줄 알았다.”

사문의 무공을 무시하면 자연히 분노하는 것이 무인의 생리.

남궁진이라고 다르지 않으리라 여긴 백련교주의 술책이다.

백무량은 뒤늦게 운룡대팔식을 밟으며 검을 내질렀다.

그보다 먼저 운해가 백련교주의 마기를 잡아끌었으나, 의념만으로는 백련교주를 막을 수 없었다.

“죽어라.”

백련교주가 펼친 마공, 태벽(颱劈)의 일 초가 남궁진을 분쇄하기 직전.

뭉뚝한 도가 고개를 들이밀었다.

취이이……!

강렬한 열양지기가 마기를 끓여서 날렸다. 영성을 가진 게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었으나, 하나의 문파는 가능했다.

“자신만만하게 뒤로 비키라더니만, 눈을 뗄 수가 없는 후배구만!”

태산검문의 무맥을 이은 남천.

길게 기른 금모(金毛)를 끈으로 묶은 장년의 초고수가 호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뜨거운 대가리는 충분히 식혔겠지?”

“……물론입니다.”

마음이 동요한 찰나에 몸이 분쇄될 뻔했다.

남궁진이 남천에게 고개를 슬쩍 숙이고는 기수식을 취했다.

이에 백련교주가 안타까운 속내를 드러냈다.

“끈질기군.”

“내가 할 말이다.”

뒤늦게 따라붙은 백무량이 옛 선배의 무공을 떠올렸다.

매화동인 진무월.

그가 마지막에 알려 주었던 성명절기, 유유무극검(幽幽無極劍).

백선신검이 천변만화하는 순간에 백련교주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깟 변화 따위, 통째로 부수면 그만!”

압도적인 힘으로 짓누른다.

수많은 변화와 환검을 경험했을 백련교주에게 아주 쉬운 해답이었다.

그것이 통한다면 말이다.

“……그윽함에 끝이 없음이라.”

백무량의 눈이 둥글게 휘었다.

***

무인이라면 누구나 추구하는 무적(無敵)의 일 초가 있다.

누군가는 쾌(快)일 것이며, 환(幻)을 거론하거나 중(重)을 갈고닦는 검사도 있을 것이다.

진무월은 사문의 무학을 궁구하여 극단까지 닦는 도사였다.

흔하다면 흔하지만, 그의 문파가 화산파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매화검법!

천변만화하는 검법으로서 가히 강호제일의 독보적인 무공.

그 무공을 완성한 진무월은 매화비원에 들어갔다.

이를 두고 누군가가 말했다.

“개파조사가 남긴 성지에 마지막 가르침을 남기려는구나!”

또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뭔진 몰라도 남한테 보이고 싶지 않은 구석이 있으니까 들어간 거겠지.”

……후자의 남자는 화산파에게 사소한 경고를 듣고서 칩거에 들어갔다.

한데 화산파에게는 불운하게도, 그의 말이 옳았다.

“한계가 있다.”

진무월은 천이통의 이능으로 보았다.

모든 도문이 힘을 합하여 싸웠던 사교들과 마물.

그들이 미래에 다시 나타날 것과…… 천의를 이은 도사가 크나큰 짐을 짊어지리라는 것을.

“화산파는 그놈들에게 이길 수 없어.”

진무월은 사문의 무공에 한탄했다.

“천변만화하여 무슨 소용일까? 범의 앞발에 나뭇가지를 아무리 휘둘러 봐야 상처 하나 남지 않을 터인데.”

내심에 남은 후회가 있었다.

곤륜파를 비롯하여 많은 도문이 사교와 동귀어진하고 기어이 마물을 꺾었다.

그 과정 속에서 화산파는 힘이 부족해서 살아남았다.

무림의 부활을 위해 전선에서 물러나게 했다.

“이런 굴욕을…… 어찌 후대에게 남기랴!”

그날로부터 진무월은 완성의 무학이라 믿은 매화검법을 부정했다.

구결을 하나하나 깨뜨리고, 공력의 흐름을 바꿨다.

매화비원이 비추는 심상을 존중하는 마음도 지웠다.

‘매화검법을 능가하는 검을 찾으리라.’

진무월은 은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이따금 화산파의 장문인이 찾으러 들어왔지만, 작정하고 숨은 이상 찾을 수가 없었다.

일 년에 한 번 마을에 내려가는 게 전부인, 금욕적인 삶.

잠조차 아껴 가며 매화검법을 파해하고 재창조했다.

“이게, 이러려고 그런 게 아니었는데…….”

“내가 누구였던가?”

가끔씩 치미는 광증이 진무월의 머리를 어지럽히곤 했다.

그럴 때마다 자하신공으로 상단전의 어둠을 씻어 냈다.

우습지 않은가?

사문의 무공을 부정하려는 무인이 사문의 절학으로 목숨을 연명하는 꼴이라니.

그것이 어언 삼십 년.

진무월의 이름이 강호에서 잊힐 때쯤.

“……….”

이름마저 잊은 도사가 찬란하게 흩날리는 매화잎의 춤을 보았다.

천이통의 이능도 이제는 쓸 수 없었고, 총명했던 머리도 흐리멍덩해졌다.

그는 반쯤 폐인이 된 모습으로 망연히 하늘을 보았다.

“……그토록 부정하려고 했던 매화거늘.”

돌고 돌아 매화(梅花).

새로운 검을 찾기 위해 떠돌았던 도사의 길은 만리향(萬里香).

결국 이십사수매화검법에서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그윽하고, 아득한(幽幽) 매화의 검의에는 끝이 없었구나(無極).”

답을 찾은 도사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진무월이 평생 추구한 무적의 무공이자 일 검.

유유무극검은 후대의 누구도 익히지 못한 상승무공으로 잊혔으나…….

***

‘이게 무엇이냐.’

의문을 넘어서 경이(驚異).

백련교주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게 마공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송이를 부수는 것 같구나.”

눈의 결정은 수없이 부수어도 같은 형상을 유지한 채 작아지기만 한다.

백무량이 펼친 유유무극검이 그러했다.

아무리 강한 힘으로 짓누르고, 찢고, 부숴도 매화의 폭풍은 잠시 물러났다가 다시 공간을 점한 채 다가왔다.

그윽하고, 아득하다.

백련교주는 자신이 상정하고 있던 무공의 경계, 저변에 쌓인 상식을 억지로 잊어야만 했다.

“이게 무공이란 말인가?”

무공엔 한계가 있다고 여겼다.

삼라만상조차 부정하는 마도에 비해 무학은 결국 일원이니 태극이니 하는 것에 막혀 있다고 생각했다.

“실로 오묘하다.”

백련교주는 유유무극검의 수많은 천변만화를 보았다. 가끔씩 틈이 보여서 찌를 때면, 이미 변화하여 메운 상태였다.

천변만화함에 끝이 없으니 절대 파해할 수 없음이라.

백무량의 손가락.

두 치에서 세치 사이에서 벌어지는 무한한 변화에 매료될 뻔했다.

‘다른 놈들도 무척 껄끄럽구나.’

백무량이 자신을 맞상대하는 틈에 남천과 남궁진이 틈틈이 의표를 찔러 왔다.

셋이 하나를 상대한다던가?

옛 법문의 구절을 떠올린 백련교주가 입술을 비틀었다.

‘과거에는 하나하나 격파하여 두렵지 않았거늘…….’

태청선 주자령은 강했으나 결국 강력한 하나에 불과했다.

과거의 구천검 백무량도 마찬가지.

가능성은 있었으나 개화하지 못하고 혼자서 덤볐기에 죽었다.

‘고독하지 않은 곤륜은 이리도 까다로웠나.’

서걱!

백련교주가 걸친 면류관에 매달린 구슬이 백무량에게 베여서 우수수 떨어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