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23화 (223/275)

흑도 (6)

“이게 무슨…….”

조화란 말인가.

제갈경은 뒷말을 잇지도 못한 채 입을 꾹 다물었다.

백무량의 삼단전이 자신의 공력을 잡아당기는데, 그 힘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가주님!”

이변을 알아차린 제갈세가의 무인 몇몇이 서둘러 다가왔다.

이에 제갈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다가오지 마라.

그 뜻을 어렴풋이 알아차린 무인들이 뒤로 물러나는데, 개중에 기감이 뛰어난 자가 돋아난 닭살을 매만졌다.

“처음에는 흡성대법 같은 사특한 술수인 줄 알았더니만…….”

물을 나무가 빨아들이듯(水生木).

백무량이 화룡신단의 화기와 제갈경의 공력을 조화롭게 조율하는 것이 보였다.

정확하게는 천주가 화기와 수기를 자연스럽게 조율하고 있었다.

장엄한 광경에 누군가가 감탄사를 터트렸다.

“수생목, 목생화(木生火)라!”

백무량의 하단전이 빨아들인 와룡경의 공력이 기해혈과 거궐혈을 거쳐 상단전으로 향하니.

백무량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던 회색 연기가 백회혈을 통해 퍼져 나갔다.

그것이 점차 고리를 이루기 시작하여…….

[오기조원!]

검해의 망령, 무명이 깜짝 놀라서 외쳤다.

목소리에 적잖은 질시와 감동이 숨겨져 있었다.

무인이라면 누구나 저런 반응을 보였을 터였다.

전설로 치부되던 현상이 눈앞에서 벌어질 줄이야!

이 충격은 검해의 망령들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던 제갈세가의 무인들도 마찬가지였다.

“맙소사!”

“대체 구천검 선배는 어떤 경지에 오르신 건가……!”

와룡경이 아니면 먹으면 즉사라고 여겨지던 화룡신단을 먹고도 멀쩡한 데다, 제갈경의 공력까지 자기 것처럼 다루고 있었다.

화룡신단을 취하기 전부터 고등한 경지에 있었다는 뜻!

많은 무인이 동경과 질투를 표하는 와중에도 백무량의 삼단전은 끊임없이 순행하고 있었다.

‘차갑고, 뜨겁다.’

수생목, 목생화.

오행의 이치가 천주를 세차게 두들겼다.

대장간에서 더욱 단단한 철을 만들기 위해서 연단하듯, 천주 또한 마찬가지였다.

쿠르르…….

백무량의 임독양맥이 계속해서 물을 머금고, 불을 틔웠다.

조금이라도 치우치면 와르르 무너질 균형이었으나 태청신공이 조화롭게 했다.

‘이 모두가 곤륜의 은혜다.’

집 잃은 아이를 주워다 기른 사부 주자령의 공덕이요, 선배의 무덤을 파서라도 생명을 구한 현노윤의 덕행이라.

태청신공의 공력에 성긴 안온함.

오장육부가 타 버려도 이상하지 않을 화기 속에서도 백무량의 표정은 평온했다.

그도 그럴 것이, 천주로 무한한 만상(萬象)을 펼치고 있었으니까.

‘화기를 일천세맥에 걸쳐서 퍼뜨리고, 수기로 천주의 뿌리를 강건하게 만들며…… 태청신공으로써 균형과 조화를 이룬다.’

각기 다른 세 기운을 다루는 일.

평범한 무인이라면 진즉 주화입마에 빠졌거나 임독양맥이 무너져 죽었을 터였다.

하지만 백무량은 달랐다.

경파와 수경.

바깥에서 찾아온 외력(外力)에 두 무학이 힘을 합하는 것이 무척 자연스러웠다.

처음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혹은…… 합쳐지기 위해 만들어진 것처럼.

‘설마 망검과 동시대를 살았던 도사들의 유산이 바로 이게 아닐까?’

까마득하게 먼 후대에 다시 나타날 사교와 마물.

그들과 맞서 싸울 무공을 남긴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백무량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순행을 계속했다.

콰르르르……!

보리 줄기처럼 가늘던 일천세맥에 활력이 돋으니 천주 또한 더욱 무겁고 깊게 자리를 잡았다.

말 그대로 자강(自彊).

백무량이 화룡신단의 기운을 완전히 흡수할 때쯤.

“허어…….”

제갈경이 감았던 눈을 반개하고 백무량의 등에서 손을 떼었다.

그리고는 잠깐 동안 허공을 바라보았다.

“하아…….”

제갈경은 재차 한숨을 내쉬고서 백무량의 등을 바라보았다.

자기가 다다를 수 없는 봉우리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보면 어떠한 마음이 들까?

자기는 그 마음을 안다고 여겼다.

강호십대고수 몇몇을 만나 보고는 자긴 승복할 수 있는 그릇을 지녔다고 생각했다.

“그러리라고 믿었는데…….”

아니었다.

제갈경의 눈동자에 맑게 갠 하늘이 보였다.

지금이야 해가 밝아 보이지 않겠지만, 저 너머에는 별이 존재하고 있을 터였다.

백무량은 그곳에 있었다.

무슨 부활이냐며, 무슨 천의냐며 비웃는 사람들이 그의 진가를 가리고 있었다.

초고수를 넘어선 경지.

그곳에서 찬란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그의 내력을 체감해 본 제갈경으로선 몇 마디 말을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부럽구나, 부러워. 내 그릇은 이토록 좁았구나.”

진정한 강자.

백무량의 성장을 눈앞에서 지켜보니, 눈이 부셔서 감히 뜰 수 없었다.

***

백무량이 끊임없이 순행하는 동안.

검해의 망령들은 그것을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었다.

아니, 단 한 명.

‘오기조원’을 외쳤던 무명은 일찍이 심천검에게 입이 틀어막힌 채로 붙잡혀 있었다.

“이게…… 으읍…….”

“너 때문에 후배의 심기가 어지럽혀져서 주화입마에 빠지면 어쩌려고 그러냐?”

심천검은 무명의 귓가에 자그맣게 속삭이면서 백무량의 성장을 지켜보았다.

가슴 한쪽이 감동으로 벅찼다.

백련교주에게 패배하였던 과거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던 그 녀석이 누구도 오르지 못하였던 곳으로 향하고 있다.

등봉조극.

이름만 붙여졌을 뿐인 전인미답의 경지로 사문의 후배가 향하고 있었다.

“높구나.”

심천검, 아니 한때 무인이었던 망령이 중얼거렸다.

“저렇게도 높은 곳이 있었어.”

자신이 가지 못한 곳에 대한 동경심인가, 혹은 아쉬움인가.

어느 쪽이든 이제는 늦었다. 검해에 얽매인 몸으로는 도달할 수 없다.

하지만 지켜볼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족한 것이 아닌가.

심천검은 어린아이처럼 반짝거리는 눈으로 그것을 지켜보았다.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이라는 말로도 모자라다.”

만일 이곳에 망검이 있었다면 뭐라고 말했을까?

눈물을 흘렸을 것이다.

곤륜의 뿌리를 만든 그라면, 백무량이 천주로써 빚어낸 거목을 보고 감동에 찬 눈물을 보였을 것이다.

찬란하지 않은가.

각기 다른 색을 지닌 도문의 무학을 가지마다 틔워 내, 화기와 수기로 훌륭하게 키웠으니.

“곤륜의 무학으로 시작하여 독보적인 완성을 이루었구나.”

심천검의 찬미에 백노 또한 고개를 끄덕였다.

백무량의 사형인 주백천에 이르러서는 눈물을 보이고 있었다.

“무량이가 저런 성취를 이룰 줄이야…….”

어린 사제가 어느새 저렇게 장성하였다.

외강내유한 백무량에게 무거운 짐을 억지로 떠맡겼기에 내심이 어두웠던 주백천이었다.

‘그런 때가 무색하게도.’

천의를 이은 도사라고 말해 주었다.

부족한 사형의 짐을 덜어 주기 위해서일 것이다.

떠맡겨진 무게일지라도 책임을 다하려고 한 것이다.

주백천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던 백무량이 조금씩 일어서는 모습을 보았다.

발로 대지를 딛고.

시선은 하늘로 향하고서.

신령한 기운을 갈무리하는 도사의 모습을.

***

며칠 뒤.

소규모의 행렬이 호광성의 불야성에 뒤섞였다.

이를 본 무인 몇몇이 혀를 쯧쯧 차 댔다.

“부잣집 도련님인가?”

“허! 풍류라도 즐기러 왔나 보군! 이 판국에 말이야.”

무공을 배우지 않은 듯 얇은 손목.

새하얀 혈색의 얼굴.

탄탄한 체형을 제외하면 별것 없는 사내가 무인들 사이에서 걸음을 터벅터벅 옮기고 있었다.

한데 무인들이 모두 처음 보는 외지인이지라 지나가는 거리마다 길이 양옆으로 갈라졌다.

오불관언(吾不關焉).

이 행렬이 일으킬 어떠한 일에도 관여하지 않는다.

그 분위기가 불야성의 거리마다 팽배했다.

강호에서 오래 살기에 딱 좋은 모습들이었다.

하물며 그 모습은 무림의 고수라는 것들도 마찬가지였다.

“인피면구인가?”

“인피면구를 쓴 고수들에 평범한 사내라?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군.”

이곳에서 고수라고 거들먹거리는 이들조차 시선을 거두니, 행렬의 중앙에 있는 사내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사내의 웃음소리는 거리마다 흘렀다.

현 강호를 조롱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모든 강호인이 모여 있다는 불야성의 호기(浩氣)가 이 정도에 불과했냐는 실망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다 가끔씩 옆에 있는 무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래서야 내가 여기까지 끌고 온 보람이 없군! 여기 있는 잡것들도 술이나 처마시고 노는데, 어찌 자네 탓을 하겠어?”

“…….”

무서우리만큼 정련된 기도를 지닌 무인조차 사내의 무례에 대꾸하지 못했다.

사내의 신분이 생각보다 더 높으리라.

그렇게 생각한 무인들은 더더욱 거리를 벌렸다.

그때 한 명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당신은 누군데 우릴 함부로 말하시오?”

주취가 옷과 입술에 덕지덕지 붙은 무인이었다.

그 행동을 보고 많은 이들이 무인들에게 얻어맞으리라 생각했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았다.

무인들 중심에 있는 사내.

그가 호기심 어린 눈빛을 드러내며 되물었다.

“술을 그렇게 처마시는 이유가 뭐냐?”

“그걸 왜 물으쇼?”

“마교가 사방에서 날뛰고, 제갈세가나 소림조차도 흑도에게 공격받는데…… 무인이라면 누구나 손을 도와야지!”

“가서 죽긴 싫소.”

무인은 딱 잘라서 말했다.

“딱 까놓고 말해서 구파일방이나 무림맹, 관군만 움직이지, 오대세가는 가만히 있지 않소? 그들이 언제 태도를 달리할지 모르는데, 당신이 말한 것처럼 나 같은 잡것이 목숨을 내놓을 이유가 뭐요?”

“……호오.”

“고귀하신 핏줄이 어쩌다 여기까지 행차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일장 훈계를 하려거든 부하한테나 하시오!”

무인의 일갈에 주변에서 환호가 들렸다.

속 시원한 소릴 잘 긁어 줬단 칭찬과 아까운 놈이 죽겠다는 핀잔이 얼핏 들렸다.

사내는 그걸 가만히 듣고서는 껄껄 웃었다.

지금까지 남을 조롱하듯 웃었던 것과는 달리 유쾌한 음색인지라, 두 부류 모두 의아해했다.

바로 그때.

사내가 입을 열었다.

“네가 낫다.”

“……?”

“도리를 다하여 외면받았던 문파보다 낫고, 그걸 방치하고 실리를 취했던 세가보다 낫다!”

그렇게 말한 사내의 얼굴이 언제 웃었냐는 듯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어리석구나. 너 혼자 살아서 잘 먹고 잘 살 줄 아느냐?”

“하면 오대세가의 방패라도 되란 말이오?”

“아직 술기운이 안 가신 모양이군.”

그 말에 무인이 분기탱천하여 외쳤다.

“하, 그래! 취했다! 죽일 테냐?”

“아니.”

사내의 신형이 흐릿해졌다.

“취해서 현실을 못 보니, 내가 깨워 줄 참이다.”

“……!”

쩌억!

사내의 장심이 무인의 가슴팍을 때렸다.

그러자 술 냄새 가득한 분무가 그의 입가에서 토해졌다.

“푸웃!”

주취를 비롯하여 주정(酒精)까지 토해 내는 데 일 초식.

무인이 내공을 익혔을 것을 생각하면, 가히 신기에 가까운 운용이었다.

술에서 깬 무인이 손을 덜덜 떨며 물었다.

“어, 어디에서 온 고인이신지요?”

“나? 나 말이냐?”

사내는 씨익 웃고는 기상천외한 대답을 흘렸다.

“백련교주다.”

“……예?”

“화산에서 개처럼 기어 도망치고 흑도의 뒷구멍에서 연명하고 있지. 칠성교 몰래 물놀이나 하려고 나왔다. 너도 같이 놀 테냐?”

사내, 백무량이 천연덕스럽게 백련교주의 욕을 해 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