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도 (7)
주변이 문득 고요해졌다.
강호의 모든 무인이 모인다는 불야성.
이곳에 백련교가 존재한다는 것쯤이야 누구나 유추하고 있다.
단지 누구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을 뿐이다.
“허…….”
한데 백무량이 그것을 꼬집었다.
어찌 그뿐일까?
그들의 교주를 화산에서 개처럼 도망쳤다고 했으며, 칠성교의 눈치나 보는 잡것이라고 매도하였다.
백무량의 진의를 깨달은 무인의 얼굴이 새하얗게 변했다.
“저, 아니, 나, 나는…….”
“술이 깨니 제정신이 드느냐?”
“이런 미친놈이!”
무인이 발악하듯 외친다.
“나는 못 들은 걸로 하겠소!”
어디에 있을지 모를 백련교에게 목숨을 구걸하기 위해, 무인이란 놈이 저렇게까지 구차해진다.
저놈에겐 햇살보다는 무덤가가 어울린다.
백무량은 싱글벙글 웃으며 말했다.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는 안 무섭고, 백련교는 무섭더냐?”
“죽으려거든 너 혼자 죽어라! 왜 나까지 사지로 끌어들이느냐!”
무인의 말에 백무량의 웃음소리가 커졌다.
“하하하……!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놈처럼 굴더니, 백도와 마도의 차이는 아는 모양이구나.”
백도한테는 몇 대 얻어맞으면 그만이지만, 마도가 나타난 자리엔 주춧돌 하나 남지 않는다.
당장 칠십여 년 전 곤륜파의 몰락을 보라.
백련교가 곤륜산에 날렸던 수백 대의 화전(火箭 : 불화살)은 백무량의 뇌리에 뜨거운 상처로 남았다.
그놈들이 백련교를 모욕한 자리에 있던 무인을 멀쩡히 둘 리가 없다.
그 사실을 백무량도, 무인도 알았다.
“누군가의 방패가 되기 싫다고 했지? 이제 자기 몸을 지킬 방법을 찾아보면 되겠구만!”
뒷짐 지고 지켜보는 꼴은 절대로 용납하지 못한다.
백무량의 진의를 눈과 귀로 확인한 무인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네가 뭐라고 이런 짓을 벌이느냐? 왜…….”
“자격 같은 걸 따질 때가 아니야. 마도가 강호를 제패하면 가만히 관망하고 있던 놈들한테 감사 인사라도 할 것 같나?”
백무량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야.”
손가락을 들어 한쪽을 가리켰다.
갑자기 말을 하다 말고 무슨 행동인가 싶어 좌중의 시선이 손끝을 따라갔다.
백련교도였다.
이곳을 감시하고 있다가, 백련교주의 욕을 참지 못하고 모습을 드러냈을 것이다.
“사교의 주구란 늘 그렇지…….”
백무량은 차가운 웃음을 머금었다.
“타인의 죽음은 시선조차 안 주면서 자기들 주인님의 욕은 가만히 듣지 못하겠더냐?”
“너 같은 미물이 논할 분이 아니시다.”
미물.
자기네 교주 말고는 사람 취급도 않는 그들의 행태에 백무량의 웃음이 짙어졌다.
“어디 한번 개미한테 짓밟혀 죽어 봐라.”
탁.
소리를 놓고 왔다. 백무량의 신형이 사라진 뒤에야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극상승에 오른 고수의 풍모일까?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숱한 고수를 미행하고 싸워 왔던 백련교도들에게도 백무량의 성취는 궤가 달랐다.
쩌억!
‘미물’이라는 단어를 나불거렸던 백련교도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어찌나 강하게 때렸는지 뺨에 피멍이 들고, 반쯤 쓰러질 듯한 모습.
“……이!”
백련교도가 분노로 이빨을 꽉 앙다물었을 때에, 다시 한번.
쩌억!
정면에 선 백무량이 따귀를 날렸다.
그 충격으로 부서진 이빨 조각 따위가 부스럭거리고, 뺨 내부를 찢었다. 피와 침이 섞인 것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백무량은 그것을 무정한 눈으로 보았다.
“아프지는 않더냐?”
“전혀!”
단순한 허세 같지는 않았다.
광신(狂信)에 물든 눈.
백련교 특유의 사특한 기운이 골수까지 치밀었을 놈이다.
백무량은 아무 거리낌 없이 수도를 휘둘렀다. 쩍 하는 소리와 함께 백련교도가 바닥에 뒹굴었다.
“그사이에 늘었군.”
백무량의 기감에 여러 마인이 잡혔다.
사방팔방.
백무량과 제갈세가를 중심으로 불야성에 있던 백련교도가 집결하는 듯했다.
주변의 무인들은 오금이 저려 벌벌 떨고 있었으나 백무량은 그렇지 않았다.
조금도 떨지 않았다.
‘익숙한 일이군.’
백무량의 속내에 검해에 있던 망령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곤륜파를 둘러싼 마교.
그 굴레는 먼 옛날부터 이어졌다.
지면 멸문하였고, 이겨도 명맥을 이어 가는 것이 힘겨울 정도였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지금은 제갈세가가 옆에 있다는 것일까?
백무량은 헛웃음을 지었다가 얼굴에서 지웠다.
“나, 나는 관련이 없소…….”
“오불관언하겠소.”
스리슬쩍 자리를 피하려는 불야성의 무인들.
그들을 보니 옛 무림이 떠올랐다.
백무량의 주먹이 꽉 쥐어졌다.
“제갈가주는…… 저들의 얼굴을 기억하시오.”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주변을 휘어잡았다.
도망을 치려던 몇몇의 발걸음이 멈추는가 하면, 부리나케 달려 나가는 놈도 있었다.
이에 지체가 높은 듯한 백련교도 하나가 껄껄 웃었다.
“주변을 겁박하는 꼴이 우습다! 강호의 대선배라는 놈이 말이야!”
“하하하!”
기를 꺾어 놓으려는 듯 웃어 젖히는 백련교도들.
그들이 일제히 운용하는 마공에 주변의 공기가 순식간에 탁해졌다.
“크윽……!”
“모두 공력을 운용해라!”
제갈경의 목소리가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모두가 정순한 공력으로 사특한 기운을 막아 내는 가운데, 백무량이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저벅.
겉으로 보기에 평범한 사내가 발을 옮기는 것 같았으나, 그 소리가 나무로 쇠를 내리치는 듯 장중하게 울렸다.
뒤이어 백무량의 불타는 듯한 눈동자가 백련교도의 심력을 불태웠다.
어디 그뿐일까?
쿠르르……!
백련교가 사방팔방을 점하였다면, 검해의 구름은 공간을 점한다.
이를 뒤늦게 깨달은 백련교도가 주변을 경계하는 순간.
백무량은 한 음절, 한 음절, 목소리에 공력을 담아서 말했다.
“과거의 곤륜은 너희 같은 마교에 패하거나, 동귀어진을 각오하며 싸웠다. 그러나.”
이제는 다르다.
백무량의 뒷말은 소리로 이어지지 않았다.
꽈르르릉!
검해의 파도, 청운의 경파가 백련교도를 일제히 휩쓸었다.
“끄아악!”
“이, 이 무슨!”
곤륜의 무학, 아니 백무량의 무학으로 이루어진 파도.
완전히 조화를 이룬 검해의 바다가 경파의 묘리를 머금은 채 백련교도를 내리쳤다.
백무량은 그 광경을 검해의 망령들과 함께 지켜보았다.
그들은 이 모습을 함께 공유하고 기뻐할 자격이 있다.
[허허…….]
[개미는 네가 아니라 저놈들이었구나!]
한평생 마교와 싸우며 고독하게 살았을 선배들.
그들에게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백련교를 비롯한 마교가 무너지는 모습을, 마물이 현세에 나타나지 못한 채 몰락하는 결말까지…….
그렇게 되고 나서 백무량은 검해마저 가르리라.
그곳에서 주백천의 넋을 꺼내 와,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드리라.
백무량이 마음을 다잡는 와중에, 주백천의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다른 이들은 없구나. 텅 비었구나.]
‘……저 혼자로 충분합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백무량의 입술이 비틀어졌다.
억지로 끌고 온 제갈세가를 제외하면 누가 자신을 돕고 있나?
아무도 없었다. 이곳에서 합류하기로 한 무림맹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백무량은 배배 꼬인 속내를 내색하지 않았다.
‘백련교주가 나타나도 제가 물리치면 그만 아니겠습니까? 하하, 검해에서 한 수련이 얼마나 값졌는지 제가 보여 주지요.’
[…….]
침묵으로 대답하는 주백천의 마음이 너무나도 무겁다.
백무량 말고도 누군가를 남겨 놓았어야 했을까?
그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내가…… 내 능력이 부족하여 연호와 너를 고독하게 만들었구나.]
주연호는 백무량이 모든 안배를 취하기까지의 시간을 희생했고, 백무량은 천의를 잇고서 마교와 마물을 무찔러야 할 운명.
강요된 길.
그 위를 걸으며 얼마나 고독할까?
몇 번을 홀로 싸워야 할까?
주백천이 안타까움과 미안함이 섞인 눈으로 백무량을 지켜보았다.
바로 그때, 백무량이 뜻을 밝혔다.
‘그런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
‘제가 여기서 지면 제갈세가가 백련교에 붙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은 천연덕스럽게 최악을 상정했다.
‘강호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제가 여기서 진다면, 다른 마교도 감당하지 못할 거라고 여기겠지요. 제갈세가가 시작이 되고 다른 오대세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
‘고독한 거야 당연한 거지요. 모두가 저처럼 좋은 선배님들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고, 천의를 이은 게 아니니까.’
그러니까.
백무량은 억지로 웃어 보이며 뒷말을 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사형.’
주백천의 대답은 기다리지 않았다.
스윽.
백무량의 발바닥이 바닥을 부드럽게 파고들었다.
삼단전, 천주에 태청신공의 공력이 깊게 스민 탓이라.
강대한 공력을 이겨 내지 못한 바닥과 대기가 백무량의 존재감에 속절없이 밀려 나갔다.
그 힘이 백무량의 우수(右手), 수양명대장경에 이르렀을 때.
“……온다!”
전선을 겨우겨우 버텨 내던 백련교도가 비명을 외치듯 했다.
꽈앙!
백무량의 보신경이 펼쳐지자, 신형이 허공에 녹아들었다.
극도를 넘어선 무언가.
백무량을 한순간 놓친 백련교도가 두 팔을 교차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익힌 외공을 신뢰했다.
하지만 그것은 시도에 그쳤다.
“끄아악!”
두 팔이 잘린 상흔이 등 아래에 있는 지실혈까지 도려냈다.
아직 백무량이 백선신검을 뽑지 않았는데도 그러했으니, 백련교도의 불안과 공포가 극에 달했다.
“자, 다음은 누구냐!”
백무량이 당당히 서서 외치자 백련교도의 눈빛이 결연해졌다.
이곳에서 죽더라도 상관없다는 눈빛에 백무량의 눈빛이 분노로 일렁였다.
“이곳에 있는 놈들 대부분이 본래 흑도가 아니었더냐? 백련교주에게 그렇게 충성하는 이유가 뭐냐!”
“……백련의 천하가 도래할 것이다!”
선두에 있던 백련교도가 크게 외치자, 나머지가 크게 환호했다.
마공을 익힌 여파가 아닐까?
백무량이 그것을 의심하는 와중에 뒤쪽에서 거대한 무리가 나타났다.
한데 그 숫자가 백련교를 감싸 안을 정도인지라, 형세가 단번에 역전되었다.
“뭐, 뭐냐?”
“칠성교냐?”
백련교도가 당황하여 그들과 거리를 넓히던 그때.
무리의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백 선배, 무인을 모으느라 늦었소!”
무림맹주 남궁진.
그가 많은 무인들과 함께 백련교를 압박하는 진을 형성했다.
이에 심천검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그리고 부럽다는 감정을 담아 말했다.
[네 대의 곤륜은 외롭지 않구나.]
‘예, 그렇군요.’
백무량은 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