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22화 (222/275)

흑도 (5)

출정의 상대가 백련교주라니!

제갈경은 속마음을 주절거리고 싶었지만, 상대가 백무량임을 깨닫고는 절망했다.

자신이 어떠한 말을 하여도 싸우게 될 걸 아니까.

제갈경의 번민은 자연스레 뒤따라오는 무인에게 향했다.

[과거에는 저렇게까지 꽉 막힌 도사가 아니었다고 하지 않았나?]

[사문의 원수는 어쩔 수 없지요.]

[허, 그래도 백련교주는 가당치도 않지!]

많은 것을 보고 듣는 제갈세가의 가주이기에 제갈경의 번민은 이곳에 있는 누구보다도 컸다.

[단신으로 구파일방을 멸문시킬 수 있는 놈. 그게 바로 백련교주란 말이다……!]

왜 백련교주가 흑도를 차지한 게 뒤늦게 알려졌겠는가?

단순히 말해서 강해서였다.

성마다 찾아가서 흑도의 주인을 죽이고, 모두의 합공을 막아 냈다.

그것이 서넛이 넘어갈 때쯤.

백련교주를 목표로 다섯 고수가 모였었다.

천살(擅殺).

일보무흔(一步無痕).

칠절도(七絶刀).

암검군(暗劍君).

선환신검(旋環神劍).

구파일방의 장로와 어깨를 겨룰 만한 흑도의 고수들.

그들은 모두 백련교주에게 살아남지 못했다.

여기까지 들으면 당연한 소리를 하냐며 핀잔을 주겠지만, 제갈경이 본 광경은 상상을 초월한 것이었다.

[한 손가락으로 흑도의 머리를 죽인 놈에게 덤벼서 우리라고 무사할 것 같더냐?]

일지(一指).

백련교주의 손가락 하나를 버티지 못하고 흑도 전체가 무너졌다.

상대가 백무량이라면?

두 손을 걷어붙이고 전력으로 마공을 펼칠 것이 뻔했다.

함께 온 제갈세가 또한 마찬가지리라.

제갈경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와중, 옆에 있던 백무량이 나직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두려우냐?”

“……예?”

“본문은, 청해의 곤륜은 마교가 발호할 때마다 도리를 다하였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제갈경을 꿰뚫어 보는 듯했다.

“제갈세가는 도를 모르는가?”

“…….”

제갈경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부아가 치밀어서, 무언가 말이 떠오르면 반박하거나 쏘아붙이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하여도 변명이고, 얕은 바닥을 드러내는 셈이었다.

그래서 제갈경은.

“두렵지 않습니다, 다만…….”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내었다.

“가문에 피해가 가지 않기를 원합니다.”

가주로서 대답했다.

이기적이라고 손가락질받아도 좋았다. 하지만 제갈경은 한 가문의 큰어른이었다.

아들의 배신에 분노를 느끼면서도 피해를 셈하고, 어떻게 막을지를 먼저 생각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백련교주와 싸워서 얻을 명예와 피해를 가늠했노라고, 제갈경은 죄를 고백하듯 솔직하게 말을 덧붙였다.

“…….”

백무량은 그것을 차분히 듣기만 했다. 고개를 끄덕이거나 눈을 깜빡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이렇게 되니 불야성으로 향하던 걸음이 멈췄다.

아직 초겨울조차 오지 않은 가을임에도 한기가 흐르는 것 같아, 맨살에 닭살이 돋았다.

저마다 눈동자를 굴리는 판국에 백무량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당연한 일이다.”

“……?”

“가주로서 가문을 걱정하는 것이 뭐가 이상하냐? 그걸 가지고 뭐라고 하면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거지.”

백무량은 언제 분위기를 잡았냐는 듯 씩 웃었다.

“하지만 이제는 청해의 곤륜이 홀로 힘쓴다고 해서 끝날 일이 아니야. 힘을 합하지 않으면 막을 수는 있을지언정 아물지 않는 상처가 남을 거고.”

“…….”

제갈경은 감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범접할 수 없는 격 같은 것을 백무량에게서 느낀 까닭이었다.

-죄를 묻지 않겠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무인이 몇이나 될까?

하물며 그가 백련교에 의해 멸문당한 도가의 후예고, 다른 문파나 세가가 그 도가를 돕지 않았다는 것을 안다면?

증오를 불태워도 이상하지 않았다.

한데 백무량은 그걸 덮어 두고서 말하고 있으니.

‘대범하시구나.’

백무량에게 존경심을 품은 제갈경이 입술을 뗀 그때.

“대답이 늦다?”

“…….”

제갈경은 존경심이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

무림맹주.

남궁진은 불야성을 눈앞에 두고서 천으로 잘 닦은 검을 바라보았다.

어딘가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쇳덩이에 비쳤다.

차갑게 느껴졌다. 지금 당장 백련교와 부딪칠 고수의 얼굴이라고 보기 어려웠다.

“……후우.”

차가운 쇳덩이에 뜨거운 입김을 불어 넣듯이.

남궁진은 지극한 호흡으로 길어 온 숨을 하단전 끝까지 밀어 넣고서, 다시 내뱉었다.

그러고서 천천히 장검을 들었다.

“…….”

칼날을 들어 올리면서 심상에 많은 표상(表象)을 떠올렸다.

‘이런다고 하여 본가가 나를…….’

오래된 망념을 베었다.

‘백련교주에게 일초지적도 되지 않을 내가…….’

두려움을 베고 또 베었다.

그렇게 정수리 위까지 들어 올렸을 때, 남궁진의 눈동자엔 망설임이 없었다.

“전원, 나를 따르라.”

그 말에 청풍대와 흑룡대가 한 걸음을 내디뎠다.

쿵!

미약한 진동이 강호 전체를 뒤흔드는 순간.

“잠시만 기다려 주게!”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세력이 무림맹에 합류했다.

***

“멀리서 칠성교와 천마신교가 지켜보고 있을 거다.”

백무량이 툭 던진 말에 제갈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무당산, 그리고 와룡산에도 칠성교도 몇몇이 숨어 있었다. 백련교로 변모한 흑도가 어떤 결과를 낼지 궁금했겠지.”

“……과연.”

제갈경이 턱수염을 매만졌다.

활동이 융성했던 칠성교가 왜 갑자기 조용해졌겠는가?

“흑도에서 암약하고 있을 백련교주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렸다는 겁니까?”

백련교주와 직접 맞서 싸우는 건 칠성교주조차 부담스러웠을 가능성이 크다.

백무량은 제갈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칠성교주가 가면을 통해 온갖 잡신의 힘을 빌려 쓴다고 하나, 백련교주에 비할 바는 아냐. 그놈은 괴력난신이 맞다.”

“선배께서 그놈을 이기실 수 있겠습니까?”

제갈경의 심유한 눈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이번 문답을 통해 의지를 확고히 정하겠다는 눈빛이라.

백무량도 이번에는 쉬이 비웃지 않았다.

“나도 모른다.”

솔직한 답을 이어 갔다.

“화산에서 힘을 잃었을 때라면 모를까, 지금이라면 승리를 확신할 순 없다. 그래도 한 가지는 약속하마. 네가 데려온 이들이 전멸하진 않게 해 주겠다.”

백무량이 원하는 것은 그저 홀로 싸우지 않는 것이지, 방패막이로 삼는 게 아니었다.

하물며 백무량은 백련교에게 수많은 동문을 잃은 경험이 있었다.

“패색이 짙어지면 떠나도 좋아. 물론 그 전에 움직이면…… 알지?”

마지막에는 농담을 덧붙여서 칠했다.

백련교주와 싸우러 가는 와중에 기를 꺾어 놓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한데 제갈경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그것이 선배의 뜻이라면…… 제가 최선을 다해서 돕는 것이 맞겠지요.”

“……?”

저게 무슨 말인가 싶어 백무량이 의아해하고 있는데, 주변의 제갈세가 일행이 시끌벅적했다.

“가주님!”

“재고해 주십시오!”

[저게 무슨 짓거리냐?]

심천검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말하고, 백무량이 고개를 슬며시 끄덕였다.

그런데 제갈경이 그걸 보고서 자기한테 하는 줄 알았는지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선배께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어냐?”

“와룡경과 화룡신단이라는 것입니다.”

제갈경이 가져온 것은 화려한 장식이 달린 나무 상자였다.

척 보아도 귀한 물품이었기에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것을 왜 나에게 주느냐? 설마…….”

“뇌물로 가보를 주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가보?”

백무량이 놀라서 되물었다.

제갈세가의 가보라면 공명이 남긴 보물이란 뜻!

단순히 무인이 취할 것이 아니라, 귀중히 보관하기만 해도 가치가 무궁무진하게 뛸 물품이었다.

그것을 선뜻 주겠다는 말이 의심스러울 정도인지라, 백무량은 검해의 백노에게 물었다.

‘와룡경과 화룡신단에 대해 아십니까?’

[아, 알기만 하겠느냐? 사람이라면 누구나 탐낼 기물이 바로 그 둘이거늘…….]

백노가 말을 더듬을 정도라면 의심할 여지가 없다.

백무량의 시야에 제갈경은 이제 귀한 인재이자 후원자였다.

“든든한 우방이 되리라고 믿고 있었네!”

“…….”

뭔가 속았다는 눈빛을 보낸 제갈경이 함을 열었다.

그러자 적색 단약에서 태청신단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선향이 나와 후각을 때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천주에 기운이 스며들다니……?’

삼단전의 조화.

백무량이 구축한 천주에 단약의 기운이 엉겨 붙었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인 것처럼 움직이니 백무량도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눈동자가 커졌다.

‘선배님들이 보기에는 어떻습니까?’

[무조건 받아야지!]

가장 큰 심천검의 목소리를 비롯해 다른 망령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을 확인한 백무량이 제갈경에게 물었다.

“이게 화룡신단인가?”

“예, 비록 선대께서 만든 것은 유실되었지만, 십여 년 전 제작 기록을 복원하여 만든 신단입니다.”

“오…….”

제갈공명의 제작법을 그대로 적용한 신단이라!

백무량이 감탄하여 화룡신단에 손을 가져가는데, 제갈경이 극구 말렸다.

“그냥 가져가시면 안 됩니다!”

“백련교주와 싸우고 난 뒤에 주겠다는 건가?”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화룡신단을 제대로 단전에 안착시키려면 와룡경의 행공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백무량은 묘한 웃음을 머금었다.

“글쎄……?”

백무량이 지금까지 익힌 무학들.

천주 이전에는 태청신공이 있었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곤륜의 호흡이 있었다.

하물며 검해의 수련까지 마친 자신에게 특별한 행공이 필요할까?

“대충 먹어도 될 것 같은데.”

“……!”

제갈경이 제지하기도 전에 백무량이 화룡신단을 집어삼켰다.

꿀꺽.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삼단전과 일천세맥에 강한 열기가 몰아쳤다.

그제야 백무량은 와룡경의 행공이 필요한 이유를 깨달았다.

‘이 열기를 가라앉힐 방법이 와룡경에 있었겠구나.’

평범한 무인이었다면 삼단전이 타 버려 폐인처럼 지냈을 터.

하지만 백무량은 달랐다.

강철의 기둥과 같은 천주에 아무리 강한 열기를 가한다고 한들, 뜨겁게 달구는 정도에 그쳤다.

하물며 백무량의 내공이 어디에서 출발했던가?

곤륜산의 정상.

구름으로 이루어진 바다.

운해를 닮은 태청신공의 공력이 화룡신단의 열기를 덮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그와 동시에 백무량의 전신에서 회색 연기가 치솟았다.

산불에 폭우가 내리면 수증기가 생기는 것과 비슷한 이치.

그것을 모르는 제갈경으로선 손발이 덜덜 떨릴 지경이었다.

“왜 제대로 듣지도 않고……!”

이대로 백무량이 죽어 버린다면 그 원망을 어찌 감당하랴!

제갈경은 백무량을 억지로 잡아 앉히고선 등에 두 손을 댔다.

선대가 남긴 절세의 신공, 와룡경.

그 행공을 따라서 화룡신단의 화기를 가라앉히고 조화를 이룰 생각이었건만.

“……!”

와룡경으로 축기한 내공이 백무량의 삼단전으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가!

제갈경의 뺨에 식은땀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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