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도 (4)
[뭘 그리 감상에 젖어서는, 언제는 네 마음대로 행동한다고 하지 않았더냐?]
심천검의 핀잔에 백무량은 속으로 크게 웃었다.
‘하기야 그렇지요. 제가 언제부터 도사 놈이었다고.’
과거 구천검이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백무량은 하고자 하는 것을 모두 했다.
자유롭고 살고자 하여 강호를 방랑하였고, 백련교와 싸워 영웅으로 남은 것.
그 모두가 백무량의 선택이었다.
이제 와서 다른 마음을 품어 봐야 자신답지 않다.
백무량의 시선이 제갈경에게 향했다.
“혹시 불만이라도 있나?”
“아, 아닙니다. 제가 어찌 그러겠습니까?”
제갈경은 잠시 당황하여 말을 더듬었다.
그가 보기에는 백무량이 잠시 허공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시비를 걸어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적으로만 엮이지 말자.’
마음을 다잡은 제갈경이 백무량에게 은근슬쩍 물었다.
“제가 듣기로는 소림도 현재 백련교와 흑도의 습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찌하실 생각이십니까?”
“벌써 딴생각이냐?”
백무량의 나직한 한마디에 제갈경이 찔끔하여 되물었다.
“예?”
“제갈 가주가 주변을 정리하는지 지켜볼 거야.”
백무량은 여전히 무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소림이 괜히 소림이고, 무림맹이라고 가만히 있을까? 걱정하지 말고 함께 호광성의 혹도나 정리하러 가지.”
“……그러지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백무량의 태도에 제갈경도 불만이 솔솔 피어올랐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있을 마교와의 전쟁.
그때가 머지않았는데 백무량과 척을 진다는 것은 불을 뒤집어쓰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호광성의 불야성.
밤이 되어도 낮처럼 환하고, 술 냄새와 웃음소리 가득한 곳.
그곳에서 한 남자가 화려한 의관을 갖춘 채 수많은 무인을 굽어보고 있었다.
“백무량이 제갈세가에 나타났다?”
그 말에 눈앞에 있는 무인은 대답하지 않고, 염소수염이 대신 말했다.
“무당산에서 교인을 공격한 뒤, 제갈세가와 함께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 합니다.”
“……음.”
무인의 보고에 남자는 침음성을 흘렸다.
구천검 백무량.
그가 팔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을 줄이야.
남자, 백련교주가 형형한 눈으로 방금 대답하지 않았던 무인을 바라보았다.
극도의 마공으로 인해 변질된 눈동자.
보랏빛 광망을 마주함에 무인, 흑마가 치를 떨었다.
‘겨우겨우 천마신교로부터 도망쳤더니, 이제는 백련교라…….’
마교에게 벗어났으나 다른 마교에게 얽매인 꼴이라.
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인가!
‘흑백쌍마라는 이름이 참으로 우습게 되었구나!’
흑마는 살기를 가까스로 참고서 백련교주에게 물었다.
“저에게 대체 무엇을 바라고 곁에 잡아 두는 겁니까?”
“…….”
“무공을 빌리고자 했다면 진즉 그리하실 수 있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침묵하던 백련교주가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뒤이어 백련교주가 입술을 달싹였다.
“우스워서 그랬다.”
“뭐?”
“무림의 가장 높은 법식이 강자존이라고 들었다. 한데 너는 왜 나에게 반항심을 품느냐?”
그저 날파리 수준에 불과하다는 듯.
흑마를 바라보는 백련교주의 눈이 무가치하기만 했다.
그것이 흑마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왜 나한테 시비지?’
바야흐로 사 년 전.
화산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친 백련교주가 흑도의 중추까지 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강호를 알아야겠다.
백무량에게 패배한 것이 그렇게도 충격이었던 걸까?
백련교주는 다짜고짜 흑도 전체를 힘으로 무릎 꿇리고, 초야에서 살고 있던 흑백쌍마를 불러들였다.
마도의 절대자가 자신에게 물었다.
-강호란 무엇이냐?
심유한 물음이었다.
어떠한 호사가가 와도 쉽게 답하지 못할 것이었다.
하지만 무인은 달랐다.
강호에 몸담은 무인에게 있어 강호란, 아주 간단했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답한 이래로 지금까지.
흑백쌍마의 신병은 백련교주에 의해 질질 끌려다녔다.
초야에 묻혀서 자연히 흙으로 돌아갈 거라 여겼거늘, 강호의 중심인 호광성으로 다시 오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런데 뭐?’
반항심을 품은 것이 우스워서 그랬다?
흑마는 백련교주에게 쌍장을 날리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그랬다가는 자신의 동생인 백귀가 개죽음당할 터였다.
“왜 그러느냐, 덤비지 않고?”
백련교주가 즐겁다는 듯 흘린 웃음을 거두고서 진지하게 물었다.
이에 흑마는 평소처럼 퉁명하게 답하였다.
“이제는 싸우다 죽으라는 겁니까?”
“그래, 그 반응이다.”
“……?”
갑작스러운 말에 흑마가 무슨 개소리를 하냐는 표정을 지었다.
뒤이어 자연스럽게 인상을 찌푸리는데, 백련교주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홑몸이었다면 나에게서 진즉 도망쳤거나 덤볐겠지. 한데 지금의 네 꼴이 어떻더냐? 부아가 터질 것 같지만 가만히 있는 꼴이 말이다.”
“지금 날 놀리는 거요?”
“한 가지 묻겠다.”
백련교주는 흑마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았다.
이제는 팔십여 년 전이 되어 버린 백련교의 난, 바로 그때.
이기지 못할 걸 알면서도 덤벼 오던 도사가 있었다.
당장이라도 도망칠 여력이 있으면서, 뒤를 흘낏 쳐다보던 놈이었다.
백련교주의 전신에 살기가 감돌았다.
“내가 만일 네 앞에서 동생 놈을 죽이겠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흑마가 단언했다.
“그야 죽이겠지.”
그것이 가능하느냐는 따지지 않는다.
오로지 전심전력을 다하여 부딪칠 뿐.
흑마의 결연한 의지가 곧 삼단전의 합일로 이어졌다.
백련교주가 은연중에 흘린 살기와 비견되는 공력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휘르르르!
불야성을 밝히는 등불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가 울렸다.
고개를 숙인 채 있던 흑도의 무인들이 저마다 침을 꿀꺽 삼켰다.
이번에야말로 흑마를 죽이리라.
흑마의 죽음을 저마다 떠올리는 가운데, 백련교주의 장포가 바람에 흔들렸다.
“진심으로 싸우려느냐?”
백련교주가 물었다.
이에 흑마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가만히 있다가 죽을 성미는 아니어서 말이오.”
진원진기까지 끌어 올리는 모습이 애처롭기까지 하다.
모두가 백련교주의 일수를 떠올리고서 치를 떠는데, 정작 장본인이 조용히 웃었다.
“그것이 내가 궁금한 것이었다.”
“무슨 헛소리를…….”
“강호는 무정하다고 하였다. 정을 갈구하면 베인다고, 너희가 말하는 세외에서 그렇게 가르쳐 주었다.”
백련교주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았다.
“한데 내가 직접 본 강호는 그러하지 않았다. 약하면서 달려드는 놈, 길을 열기 위해 남는 놈, 끝끝내 되살아나는 놈까지…… 내가 배운 강호가 아니었다.”
“당연한 것이 아니냐?”
흑마는 어이없다는 듯 백련교주를 흘겨보았다.
“무림에서 문파는 같은 무맥을 이은 가족이요, 나에게 백귀는 피를 이은 형제거늘.”
“나에게는 당연하지 않았다.”
“…….”
말문이 막히는 듯했다.
흑마는 백련교주의 얼굴을 보면서 저도 모르게 가면을 떠올렸다.
‘이놈이야말로 가장 위험한 놈이다!’
칠성교가 아님에도 인간의 정을 잃었고, 천마를 믿지 않으면서 경천동지할 마공을 익혔다.
하물며 언제인가 자기가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천리(天理)를 끊는 괴력난신이 현세에 임한 것이 바로 자기 자신, 백련의 교주라고.
흑마는 백련교주에게 궁금한 것을 물었다.
“그래서 그게 왜 궁금하였느냐?”
“너도 나도 남을 위해서 필사의 각오로 달려드는데, 그것이 나의 목에 닿을 뻔했다.”
백련교주는 저 멀리 있을 백무량을 떠올리면서 하려던 말을 이었다.
“당연히 그 이유를 배워야 하지 않겠느냐?”
***
동정호.
호남성 동북쪽에 있는 호수.
그곳을 중심으로 불야성이 형성되어 가히 모든 무인이 모인다고 할 수 있었다.
한데 동정호로 향하는 백무량의 발걸음이 조금씩 이상해져 갔다.
‘이게 무슨 일이지……?’
동정호에 가까워질수록 상단전이 뒤흔들리는 것이 아닌가!
백무량은 검해의 망령들에게 조언을 구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제갈 가주가 하독이라도 한 것이 아니더냐?]
[그냥 속이 안 좋은 것이 아니고?]
주백천과 심천검의 대답이 저러했고 나머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백무량의 육감만이 경종을 울릴 뿐이었다.
‘설마…… 백련교주가 근처에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럴지도 모르지. 손등에 있는 운룡이 위험할 때마다 신호를 보내왔으니까.]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는 사라진 운룡의 문양.
아무것도 없는 손목이 이제는 허전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그것이 아예 없어졌다고 하기도 애매했다.
백무량의 심상, 검해.
전에 있었던 여섯 연꽃의 자리에 운룡이 그려진 바위가 육중한 무게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이건 소화하면 안 될 것 같지 않느냐?]
무명이 우려하는 목소리를 내었다.
[운룡의 문양은 사실상 천의의 표상(表象). 검해에 녹였다가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도문의 가르침인 여섯 연꽃과는 달리 운룡은 천의.
인간의 것이 아니라 하늘의 의지였다. 검해에 녹였다가는 뜻하지 않은 일이 벌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백무량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지금은 저것의 힘을 빌릴 때지요.’
세 마교, 그리고 마물.
대적을 상대로 무기를 꺼릴 생각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는 걱정스러웠다.
‘제가 만일…… 백련교주와 마주하여 또다시 패한다면…….’
그때야말로 천하가 어둠에 물들게 되리라.
백무량의 걱정에 심천검이 평소처럼 유쾌하게 웃었다.
[세상 무서운 것 없는 놈이 백련교주한테는 꼭 애처럼 구는구나!]
‘하지만 선배.’
[걱정 마라. 너는 이미 칠성교주와 맞상대한 경험이 있지 않느냐?]
심천검의 든든한 응원에 백무량도 피식 웃었다.
천의를 이은 도사.
영웅담의 주인공.
그 무게가 백무량의 걸음에 중심을 잡았다. 마땅한 이유 없이 강호를 방랑하던 과거와는 달랐다.
[그래, 바로 그거다.]
[너라면 백련교주와 마주하더라도 능히 이겨 낼 수 있을 거다.]
주백천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내심 걱정스러웠다.
백련교주란 괴력난신.
마물의 부활과는 전혀 상관없는 마도 고수였고, 천의에 갑자기 끼어든 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천검이나 무명, 백노의 조언을 기대할 수도 없는 상황.
그러나 백무량의 심상은 전보다 견고했고, 강해졌다.
마음을 다잡은 백무량은 제갈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갈 가주.”
“예.”
“우리가 가는 곳에 백련교주가 있을지도 몰라.”
“……!”
제갈경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백무량은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면서 말했다.
“백련교주를 상대하라고 하지 않으마. 다만 주위에 있는 흑도와 백련교도를 무림맹과 함께 상대해.”
“……알겠습니다.”
제갈경의 입술이 긴장으로 바싹 말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