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20화 (220/275)

흑도 (3)

백무량이 심천검과 농담을 떠드는 사이.

제갈경은 서둘러 백무량과 만날 채비를 마쳤다.

이곳에서 가만히 있기에는 몸이 달았다.

‘강호의 소문이 조족지혈이었다……! 저렇게 터무니없는 무공을 지니고 있을 줄은 몰랐다!’

제갈세가가 바보도 아니고 진법을 펼친 산에 조처를 하지 않았겠는가?

화포를 쏜다고 한들 무너지지 않도록 설계하고 늘 보수해 온 제갈세가였다.

한데 백무량의 일 초에 중턱이 무너지고 말았다.

“강호십대고수라고 일컬어지는 강호의 노괴조차 저렇게 쉬이 와룡산의 중턱을 무너뜨리진 못하거늘.”

한 장로가 백무량이라는 걸출한 고수의 등장에 아쉬움을 표했다.

“아쉽도다! 제갈세가에 저러한 고수가 있었다면…….”

왜 오대세가라는 이름에 연연하겠는가?

강호에서 홀로 자강(自强)할 절대적인 힘이 없어서다.

무림맹주인 남궁진이 아무리 문무를 겸비한 지낭(智囊)일지라도 절대적인 고수 앞에서는 무력한 것이 강호.

하물며 백무량이 칠십여 년 전 구천검의 부활이라는 소문이 사실이라면?

장로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가주.”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고 있소.”

제갈경의 표정도 장로와 다르지 않았다.

아들의 배신이 가슴을 찢어 놓은 와중이지만, 가주로서 행해야 할 것은 잊지 않았다.

“약관의 가죽을 입고 있다지만, 백련교주와 싸운 백전노장이오. 괜한 수를 써서 분노를 사느니 호의를 사도록 노력하겠소.”

제갈경은 그 말을 하고서 결박되어 있는 아들, 제갈유를 보았다.

“못난 놈.”

제갈경의 말에 제갈유가 고개를 슬며시 들었다.

엉망진창으로 얻어맞은 얼굴이라도 울거나 웃으면 알 수 있는 법.

한데 제갈유의 얼굴에는 아쉽다는 감정만이 있었다.

“아쉽소, 아버지.”

“……정녕 그 말이 전부더냐?”

“어차피 살긴 글렀는데 울면서 빌어 봐야 무슨 소용이오!”

제갈유가 씨익 웃었다.

“백무량이라고 하였던가? 그놈만 아니었다면 계획대로 되었을 텐데…… 그것이 아쉬울 따름이오!”

“얼마 남지 않은 시간마저 혀 놀림으로 날리는구나.”

제갈경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장로에게 말했다.

“꼴도 보기 싫으니 당장 뇌옥에 가둬 놓으시오!”

“알겠소, 가주.”

장로가 결박된 제갈유를 질질 끌고서 가주실에서 나갔다.

그러나 제갈유의 눈빛은 여전히 형형했다.

“그놈이 온다면 나와 잠깐 만나자고 전해 주시오!”

“…….”

“백련교주께서 남긴 말이 있으니까!”

그 말에 제갈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

한편, 백무량은 산을 오르며 검해의 망령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흑도와 싸우다가 이렇게 된 거니까 양해해 주겠지요?’

[언제부터 네가 양해를 구했다고 그러느냐?]

심천검의 핀잔이 백무량의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사실, 여태껏 백무량이 일을 저지르고서 무림맹이나 개방, 송 노야에게 수습해 달라고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럴 때마다 둘러댈 ‘대의’라는 만능의 단어가 있었다.

[너 말고 누가 마교들과의 싸움에서 선두에 서겠느냐? 그럴 용기가 없으면 입이나 다물라고 해야지.]

심천검은 현 강호를 날카롭게 직시했다.

백무량만 한 고수가 현재는 몇 있지도 않으며, 그들조차도 마도 고수에게는 통용되지 않으리라는 것을.

[천하를 평화롭게 하는 것과 네가 호구처럼 구는 것은 다른 문제다. 하물며 오대세가는 마교와의 싸움에서 뒷방 노인네처럼 구경만 하지 않았더냐?]

‘하지만 무림맹주는…….’

[그자야 나름대로 움직였다지만, 과연 최선을 다했을까?]

심천검은 낮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네가 겪은 백련교의 난과 마찬가지다. 일선에 서고 싶은 문파나 세가는 아무도 없고, 싸움이 끝나고 나서 새롭게 재편될 판도에서 정점에 서고 싶어 하는 놈들이 태반일 것이다.]

‘이미 수없이 말하지 않았습니까?’

백무량은 갑자기 치켜든 불쾌감을 욱여넣었다.

되살아나고부터 이때까지.

곤륜이 이곳에 있다고 말하였으며, 마교의 부활을 경고했고, 그들이 뭉치리라고…… 사형이 남긴 책까지 공유했다.

하지만 그것마저도 부족할지도 모른다니?

백무량의 심기를 알아차린 심천검이 혀를 가볍게 찼다.

[쩝, 아직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몇 번을 강조해도 이상하지 않다. 강호의 생리라는 것을 너도 알잖느냐?]

‘그거야 그렇지요.’

그렇게 대답하면서 백무량은 속에서 반골 기질이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 곤륜은 비주류였고, 고독하게 무언가와 싸워 왔다.

망검과 검을 섞으면서 알았다.

대부분의 도가가 성지와 얽혀 있는 ‘뜻’을 잊었을 때, 곤륜만은 검해로써 이어 갔다는 것을.

광인과 도사 사이에서 줄다리기하며 버틴 망검의 일생을.

백무량의 눈동자에서 분기가 일어났다.

‘망검을 비롯해서 다른 선배들은 불합리를 좌시하지 않고, 일선에 기꺼이 홀로 뛰어드셨겠지요. 선배도 마찬가지지요?’

[……그렇지.]

심천검과 백노가 동시에 대답했다.

다른 망령들 또한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었다.

시대는 각기 다르지만 마교와 싸웠던 영웅들.

그들은 옳은 뜻에 몸을 던졌고, 기꺼이 마교의 수장과 싸우다가 검해로 인도되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언제까지고 곤륜만 희생할 순 없습니다.’

그 말에 주백천이 입을 열었다.

[무량아.]

단 세 음절이었지만, 자신을 부르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다.

마음이 상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지만 양민의 죽음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기로 하지 않았느냐는, 그 말.

백무량은 주먹을 쥐었다.

‘나 혼자 이길 수 있는 싸움이었다면, 능히 그리하였을 겁니다. 저 이전에 다른 선배가 해냈을지도 모르지요.’

검해에서 만났던 망령, 선배들을 떠올렸다.

유성백, 무명, 심천검, 백노나 망검에 이르기까지.

백무량과 비교해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들의 강함은 생전에도 분명 당대의 최강, 혹은 고금제일이라고 불렸을 터였다.

그러나 그들 모두 실패했다.

백무량은 한 음절마다 힘주어 말했다.

‘지금은 그때보다 더욱 심합니다. 모든 사교가 모습을 드러냈고, 몇몇은 격퇴했다지만 가장 강력한 세 사교가 남아 있습니다.’

칠성교, 천마신교, 백련교.

그들 중 백련교는 뜻이 다른 것 같았지만, 천하를 혼란케 한다는 점에서는 똑같은 사교였다.

백무량은 주백천과 시선을 맞추며 물었다.

‘과연 저 혼자서, 곤륜파 홀로 가능하겠습니까?’

[…….]

주백천은 잠시 침묵했다.

사제의 말을 듣고 나서야 생각했다.

자신의 뜻이 얼마나 자줏빛이고, 박애에 가까웠는지를.

모든 것이 순리대로 흐르지는 않는다. 옳은 일을 한다고 하여, 하늘은 어여삐 굽어보지 않는다.

[천지불인이라고 하였지.]

이 뜻을 돌이켜 본 지가 얼마나 되었던가?

주백천은 잠시 묵상하여 생각을 정리하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영웅담 중에서도 꾀가 많은 주인공이 있지 않더냐?]

‘그렇지요.’

백무량은 다른 망령들과 각각 시선을 맞추며 뜻을 밝혔다.

‘제가 실패하면 마지막이 될 겁니다. 이 싸움에서…… 확실한 승기를 잡을 겁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양민의 죽음을 도외시하진 않을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 곤륜파를 되살렸고 많은 인연을 맺었으니까요.’

백무량이 자신감 있는 표정을 지은 그때.

저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을 느꼈다.

“처음 뵙겠소. 구천검 선배.”

까마득한 선배를 마주했음에도 굽히지는 않겠다는 명가의 자존심.

백무량은 그 자존심과 마주하자마자 태청신공을 운용했다.

천주와 공명한 기파의 울림이 주변을 강하게 울렸다.

쿠르르…….

가공할 만한 기세에 명가의 무인 또한 낭패를 감추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내가 누구인지 알았다면 그렇게 나와서는 안 되지.”

백무량은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들과 떨어진 거리가 상당했지만 검해에서 단련한 오감이 산세를 훤히 보이게 했다.

잘 정돈된 의복과 수염, 몸에 자연스레 밴 품위.

그걸 보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온 남자의 정체야 뻔했다.

“제갈세가의 가주로서 자존심을 지키고야 싶겠지만, 내 배분이나 현 상황을 생각하면 고개를 숙여야 할 것이 아닌가?”

“하나…….”

“내가 바란 호의가 아니다. 그렇게 말할 생각이다?”

“서, 선배께서 망가뜨린…….”

“어허.”

양심이 찔리는 구석은 사전에 차단했다.

백무량은 제갈세가의 가주가 듣기 싫어할 말을 그대로 말했다.

“어차피 생문이 훤히 열린 상태지 않았나? 그대로 뒀으면 흑도와 백련교도가 팔자걸음으로 걸어 들어갔을 텐데, 감사 인사가 부족하군.”

“……그걸 어찌.”

“내 비록 도문의 공부는 부족하나, 경험이 쌓이다 보면 아는 것이 많아지기 마련이지.”

솔직하게 말하면, 검해 안에 있는 백노가 말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모든 것을 밝힐 순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진법을 망가뜨렸다고 미안해해서야 백무량의 자존심이 상할 일이었다.

무엇보다 천의를 이은 도사로서 기선을 제압해야만 했다.

“세가 내에 안 좋은 일이 생겼나?”

“……선배에겐 죄송하나 밝히고 싶지 않소.”

제갈세가의 가주나 되는 사람이 평정을 유지하지 못하고 얼굴을 붉히는 걸 보니 사안이 큰 문제인 것 같았다.

‘하기야, 산 전체에 설치한 진법을 열 정도면 지체가 높은 사람 짓이겠지.’

세가 사람이 아닌 백무량이 건드릴 문제는 아니었다.

백무량은 캐묻고 싶은 마음을 참고서 가주에게 한 가지를 물었다.

“앞으로 제갈세가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진법을 고치고 나서 무림맹에 합류할 작정이오.”

언제 얼굴을 붉혔냐는 듯, 막힘없이 대답을 내놓는 가주.

그는 여러 말을 이어 나갔다.

“백련교와 흑도가 선을 넘었소. 제갈세가의 땅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무림맹에 적극 지원하여 흑도를 발본색원하여 본을 보일 것이오!”

그 말을 잠자코 들은 백무량이 운을 뗐다.

“준비한 말 말고.”

“……?”

“정답을 줄줄이 말한 것은 좋았지만,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정파에 불신이 생겨서 말이야.”

백무량은 히죽 웃고는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백련교의 난 때도 곤륜파를 돕겠다며 손을 걷어붙이는 척했던 문파가 한둘이어야지.”

“하지만…….”

“그때의 가주가 지은 죄를 자기한테 따지는 게 억울하긴 하겠지. 뭐, 나도 묻진 않아. 하지만 그 당시에 얻은 교훈이 있어.”

“그게 무엇입니까?”

백무량이 드러낸 도발이나 감정에도 가주의 표정은 여전히 편안했다.

그것이 참 무림맹주 남궁진과 비슷했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인지, 가주나 맹주쯤 되면 속에 어떤 감정을 품고 있든 가면을 쓰고 있는 것이다.

백무량은 그러한 사람을 싫어하는 편이었다.

“일단은 움직여. 진법을 수습하는 것보다 주변의 중소 문파를 먼저 다스리게.”

“그건…….”

“왜, 자리를 완전히 보전하기 전에는 움직이기가 싫어?”

백무량은 방긋 웃었다.

살기가 담기지는 않았지만, 위협처럼 느껴질 만큼 의도가 보이는 웃음.

검해에서 얻은 무력이 웃음에 힘을 더했다.

“당한 게 많은 사람인지라, 주변에 민폐를 끼치곤 하지.”

“…….”

“이번 기회에 나한테 신뢰를 사는 게 어때?”

진법을 수복하지 않은 채 전력을 다해서 주변을 청소하는 데 힘써라.

백무량은 여러 말하지 않고 가주를 압박했다.

-내 말을 듣지 않아도 괜찮다. 나중에 어떻게 대화할지만 각오해라.

이 뜻을 제갈세가의 가주가 알아채지 못할 리가 없었다.

[후배보다는 똑똑하겠지.]

‘시끄럽습니다, 선배.’

심천검과 한두 마디 농담을 나누고 있자니, 숙고를 마친 가주가 입을 열었다.

“생각이 길었습니다. 방금 있었던 무례를 사죄하지요.”

“답은?”

“총력을 다해서 주변에 잔존하는 흑도의 세력을 척결하겠습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백무량은 가주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나?”

“……!”

가주 주변에 있던 무인 몇몇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아무리 백무량의 배분이 높다고 한들, 제갈세가의 가주에게 줄곧 무례를 저지르고 있었으니까.

그 사실은 백무량도 알고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경입니다.”

“기억하지.”

천의를 이루고 천하가 평안해진다면, 자신의 이름이 더렵혀져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런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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