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9화 (219/275)

흑도 (2)

“백련교주가 모습을 드러냈군요.”

청룡대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심려가 가득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무언가 심상치 않았다.

그것을 의아하게 생각한 백무량이 물었다.

“모두 정리가 되었는데 뭐가 그리 걱정인가?”

“무당산 말고 다른 곳에도 흑도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작정하고 움직였군.”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눈가를 쓸어내렸다.

눈이 감긴 사이에 백련교의 난 때 보았던 불길과 무너지는 대들보가 떠올랐다.

그것이 어찌나 실감나던지, 상단전을 극도로 단련한 게 잠시나마 후회가 될 지경이었다.

그러나 마음을 다잡고 갈 길을 정하기에 좋았다.

“칠성교의 동향은 어떻던가?”

“흑도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점거한 곳은?”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모두입니다. 그만한 세력을 언제부터 준비했는지…….”

청룡대주가 여러 설명을 했다.

백련교주의 준비가 철저했다. 오래전부터 준비한 것처럼 동시에 일어났다. 곤륜파의 상황은 자기도 아직 알지 못한다.

백무량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게끔 조심스러운 어조였으나, 그는 아무렇지 않았다.

검해.

그곳에서 있었던 수련이 곧 백무량의 수양이 되었다.

또한, 천의를 이은 도사로서 무엇을 해야 할지 알았다.

“그쯤 들었으면 됐어.”

“……예?”

청룡대주의 얼굴이 순간 멍청하게 변했다.

그러나 백무량은 하려던 말을 무덤덤하게 꺼냈다.

“가장 가까운 곳이 어디지? 그쪽으로 먼저 갈 테니, 무당파 장문인에게 잘 있다 간다고 전해 주게.”

“소림사와 제갈세가입니다. 한데…… 곤륜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백무량은 자신감 있는 표정으로 씨익 웃었다.

“그곳엔 내가 직접 가르친 제자들이 있으니까.”

그 말을 끝으로 백무량이 등을 돌리는데, 청룡대주의 눈에 존경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

[정말로 괜찮겠어?]

대지를 질주하는 도사의 상단전에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울렸다.

주백천의 전언이었다.

곤륜파에 흑도가 진을 치고 있을 터인데, 정녕 괜찮겠냐는 뜻이었다.

-어쩌면 백련교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 뒷말을 삼키고 있다는 걸, 백무량도 알았다.

아예 걱정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제가 지금부터 출발한다고 하여, 때를 맞출 순 없습니다.’

[……그러냐.]

‘하물며, 저는 강해지고 싶다고 말한 종휘와 다른 제자들을 믿습니다. 그곳에 있는 장문인 또한 곤륜의 뜻을 이은 도사입니다.’

만일 백련교주가 있다고 한들, 도망쳐서라도 생존해 줄 것이다.

검해에서 단련한 백무량의 정신은 굳건했다.

식물을 넘어서 금강(金剛).

아침에 해가 뜬다는 현상이 달라지지 않듯, 백무량은 섣부른 불안 따위에 무너지지 않았다.

‘내가 이곳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하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백무량은 빙긋 웃으며 상단전에 의념을 흘려보냈다.

‘이제 나의 뜻을 천하에 펼칠 때입니다.’

구천검 백무량의 부활.

그 사실은 개방과 무림맹에 의해 많이 전해졌다. 멸마척사의 뜻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아직 믿지 않는 이도 적지 않았다.

부활이라는 게 쉽게 믿어지지도 않을 테고, 사교들 뒤에 마물이 있다는 것도 사실상 뜬소리처럼 들릴 테니까.

‘이제는 직접 보여야겠지요.’

백무량이 발걸음에 힘을 더했다.

***

복룡산(伏龍山).

본래 이름인 융중산보다는 제갈량의 은거지로 유명하여 후예들이 산에 터를 잡고 살기를 자처했다.

이른바 제갈세가.

그들은 융중산의 산세가 깊고 빽빽하여 기문진법을 펼치기가 좋다는 것에 초점을 맞췄다.

당가가 거미의 집이라면, 제갈세가는 은림(隱林).

누구의 침입도 금한다고 알려진 곳이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네가 세작이었다니…….”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경은 침울한 표정으로 아들의 목을 내려다보았다.

혹시나 칠성교도인가 싶어서 얼굴을 매만졌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아들이 순수하게 칠성교에게 충성했다는 뜻.

그 의미는 제갈경에게 더더욱 무겁게 다가왔다.

“네가 너를 그렇게 키웠더냐, 네 짐이 그리도 무거웠더냐?”

차기 가주로 내심 점찍었던 아들 제갈유.

배신의 충격은 영민했던 제갈경의 머리를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충언과 고언이 귀에 들려오지 않았다.

“진법이 무너지고 있습니다!”

“화공에 대비한 것이 해체되어…… 지금이라도 대피하지 않으면 산 전체가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가주!”

주변에서 들려오는 모든 것이 공허했다.

제갈경의 눈이 텅 비었다. 아들의 뺨과 눈가를 더듬는 손짓만이 느릿할 뿐이었다.

그나마 내뱉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오직 하나.

“……두고 가라.”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나를 두고 가라. 아들을 잘못 키운 죄는 나 혼자 안고 갈 터이니, 너희는 가문의 보물과 재산을 들고서 떠나라.”

제갈경의 명에 좌중이 침묵했다.

그러나 누구도 눈알 하나 굴리지 않았다.

평소 제갈경이 얻었던 신망은 제쳐 두더라도 그의 능력, 재지를 생각하면 두고서 가기가 어려웠다.

사실상 그가 없으면 무림맹주와 누가 실랑이를 할 것이며, 가문의 토지를 바로 세울 것인가?

그들 중 일장로가 침통한 표정으로 제갈경에게 다가갔다.

“자네가 없으면 와룡경(臥龍經)과 화룡신단을 누구에게 맡긴단 말인가!”

“…….”

“감정에 휘둘려서 모든 것을 그르칠 텐가!”

그 말에 제갈경이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홱 돌렸다.

“백부!”

“경아, 나라고 해서 이런 말을 꺼내고 싶을까! 생각해라!”

일장로는 제갈경의 두 어깨를 붙잡고서 억지로 일으키려고 힘을 쏟아 냈다.

“이곳에 있으면 개죽음이다! 아들을 저렇게 만든 놈에게 복수하지 않고서 여기서 죽겠다면, 내가 너를 잘못 본 것일 테지! 그러고도 공명의 후예라고 할 수 있겠느냐?”

“끄윽, 끄으으…….”

제갈경은 속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그러나 정신을 고통에 내던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제갈경의 수양이 얕지 않았다.

뒤이어 제갈경의 입술이 열렸다.

“모두…… 부족한 가주를 믿고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갈경이 속에 독을 품고서 마교에게 증오를 불태우던 그때.

바깥을 살피던 무인 하나가 서둘러 나타났다.

“가주님!”

“무슨 일이냐?”

“진 바깥에 한 도사가 나타났습니다!”

“누구인지는 파악하였느냐?”

그 말에 무인이 침을 꿀꺽 삼키고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구천검 백무량입니다!”

“……뭣이?”

제갈경은 서둘러 책상으로 향했다.

그 위에는 모래나 자갈 같은 것이 뒤흔들려 진법의 형세와 사람의 숫자를 표시하고 있었다.

한데 한쪽이 뻥 뚫려 있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 흑도가 많이 존재하였거늘.’

심지어 불길마저 잡혀 있다.

제갈경의 눈가가 가늘어졌다.

“괴이한 소문이라고 여겼던 것이 정녕 사실이었다?”

구천검 백무량의 부활.

그것이 정녕 사실인지 궁금했던 제갈경은 곧바로 주술을 펼쳤다.

뒤이어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어째서 여기에?”

“무당파에 있어야 하지 않나?”

격동하는 눈들이 많았다.

그들은 한 도사를 중심으로 선 채 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구천검 혹은 곤륜검선이라고 불리는 백무량.

그가 한 걸음을 걸을 때마다 두려움이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기이한 소리였지만, 주술을 펼친 제갈경의 눈은 그런 것들을 읽을 수 있었다.

‘기이하다. 흑도는 강호십대고수일지라도 패기를 잃지 않거늘, 겨우 약관이 되거나 넘었을 백무량에게 저리 겁을 집어먹는단 말인가?’

제갈경이 의문을 계속해서 품던 와중에, 백무량이 자그마한 입술로 호흡을 골랐다.

한데 그 광경이 무척이나 기이했다.

‘……연기인가?’

물을 끓이면 김이 피어오르듯.

작게 열린 백무량의 입가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연기가 너울 치는 모습이 어쩐지 파도와 같으니.

제갈경이 의구심을 품던 차에 백무량이 목소리를 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 생각이냐?”

신묘한 기운을 도사답지 않은 가벼운 말투.

그 목소리에 열이 끓은 흑도가 몇몇 달려들었다. 백련교의 무공을 태운 탓인지 탁기가 가득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백무량의 대응은 간단하기만 했다.

스윽.

칼을 뽑지도 않았다. 그저 단순히 흑도를 노려본 것만으로 허공에서 검기가 일렁였다.

제갈경은 그 광경을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었다.

‘진자충의 어검술인가? 아니…… 그것보다 몇 수는 위에 있다!’

화산파에서 백무량이 진자충의 죽음을 지켜보았다고 하였는데, 무공을 이어받기라도 한 것일까?

제갈경이 흠모하는 감정을 품는 가운데, 백무량의 발이 땅을 후려갈겼다.

꽈광!

산의 대지가 길게 갈라졌다.

“허억!”

“진법이……!”

진법을 가까스로 수복하던 진법가 둘이 피를 토했다.

이쯤 되니 제갈경도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이, 이보게, 산을 무너뜨리면 진법이……!]

제갈세가의 술법에 육합전성을 더하니, 제갈경의 육성이 백무량에게 닿는 것이야 시간문제였다.

문제는 백무량의 인내심이 그만큼 길게 기다려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제갈경의 육합전성이 닿기도 전에 백무량이 먼저 움직였다.

쩌저적!

백무량의 주먹질이 흑도를 향해 휘둘러졌다.

그러자 이번에는 나무가 와르르 무너졌다.

개중에는 제갈세가가 붙인 부적이나 표식 같은 것이 있었다.

백무량이 그것을 뒤늦게 보았지만.

“음?”

사소한 의문을 떠올리는 것으로 끝이었다.

백련교가 무언가 사특한 수작을 부려 놨겠거니, 그렇게 생각했다.

자연히 백무량이 칼을 뽑았다.

“뭔지는 몰라도…… 저것까지 제거해야겠군.”

구천화우검의 이초, 창천명월.

그 초식에 경파와 천주부동세의 묘리가 조화를 이루니.

콰콰쾅!

폭음이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무당산 아래에 진을 치고 있던 흑도가 그러했듯, 이곳에 있는 흑도 또한 사지를 유지하지 못했다.

그건 주변에 있는 자연이나 진법도 마찬가지였다.

“허억!”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제갈경의 눈이 부릅떠졌다.

책상 위.

진법의 형세를 표시하던 모래가 모두 바스러졌다.

흑도를 뜻하던 자갈 또한 흔적도 없이 먼지가 되고, 흩날렸다.

“맙소사…….”

다시 처음부터 진법을 구성해야 할 일이다.

제갈경이 백무량의 무위에 경이를 느끼는 사이, 백무량의 귓가에 육합전성이 닿았다.

“산을 무너뜨리면 진법이 무너진다……?”

제갈경의 전언이 닿았음에 백무량은 주변을 쓱 살펴보았다.

누가 보아도 훌륭하게 산의 중턱을 망가뜨렸다.

할 말이 없어서 눈을 끔뻑거리는데, 상단전에서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흑도도 무너뜨리고, 오대세가까지 견제하였구나! 훌륭하다, 후배야!]

심천검이 놀리는 소리에 백무량은 헛웃음을 머금었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앞으로 제갈세가는 저를 의심하지 않겠지요.’

[허, 그야 그렇겠지!]

심천검이 껄껄 웃는 소리가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메아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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