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8화 (218/275)

흑도 (1)

검해의 주인이 바뀌었다.

망검이 그 말을 꺼냄과 동시에 물이 고요해졌다. 물속 깊이 일던 파문마저 멈췄다.

천중수의 폭포, 백노가 만든 동굴 또한 조용하게 무너졌다.

호흡하고 눈을 감았다 뜨는 찰나에도 검해가 바뀌어 갔다.

그때, 망검이 허심탄회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이때를 후회했었다.”

그의 시선이 먼 곳으로 향했다.

옛 기억, 혹은 추억을 회상하고 있는 듯한 모습.

백무량은 그것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침묵했다.

이에 망검이 감사하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말할 수 있는 시간이 길지 않았다.

“검해를 잇는다는 것은…… 천의를 이루지 못하는 한 검해에 계속 남는다는 뜻이다. 실패한다면 홀로 후회나 망념, 집착을 저수(貯水)할 것이다. 때때로 범람하여 광증이 일겠지.”

이번에 사교를 막는 걸 실패하면 마물이 부활하고, 검해가 후대에 이어지지 않은 채 끊길지도 모른다.

그리되면 검해의 주인만 홀로 이곳에 남게 된다.

그것이 몇 년이나 지속될까?

영영, 세세토록 고통받을 터였다.

“그래서 내가 남으려고 했네. 검해를 만든 장본인으로서, 책임을 지려고 했지.”

그런데 후배가 그것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며.

망검은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자신 있는가?”

“…….”

백무량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변해 가는 검해를 보았다.

대화의 상대가 그러하니 망검도 시선을 돌렸다.

그 모습을 본 망검이 입가를 조금씩 벌리다가, 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군. 이게 후배의 검해로군.”

망검의 눈.

그의 망막에 새롭게 바뀐 검해가 비쳤다.

파문 하나 없이 고요한 호수.

구름으로 만들어진 정자와 매화로 흐드러진 나무.

처마에는 금강의 진기가 어려 있어 천년을 지탱할 것 같았다.

여러 도학의 무학이 선경(仙境) 안에 녹아 있었다.

“이것을 천주가 지탱하니…… 먼저 올라간 유 씨 후배가 흐뭇하게 지켜보고 있겠구나.”

망검은 웃다가 불현듯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곤륜의 무학에만 집착하여 오로지 바다만을 빚어내었지만, 후배는 다르구나. 부디 사문의 오랜 악연을 끊어 다오.”

백무량은 강인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러기 위해 검해를 이어받았으니까.”

“……믿겠다.”

망검의 말에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에 망검의 신형은 어느새 사라지고, 백무량의 머리에 많은 양의 정보가 쏟아졌다.

검해의 주인으로서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망검이 지니고 있던 기억과 무학의 수련치였다.

“크으윽……!”

한참 동안 머리를 감싸 쥐던 백무량은 선배들의 부축을 밀어 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이 있었다.

“지금이라면 연호를 이곳에 불러낼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주백천의 눈이 동그래졌다.

***

“백 선배께서 보이지 않는다고?”

무당파의 장문인, 무극 진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지객당을 비롯하여 정문을 지키던 도사 모두가 그렇다고 답했다.

벌써 머리가 지끈거리는 듯했다.

“대체 이런 때에 어디로 가셨단 말인가……!”

호광성의 북쪽.

속칭 호북성이라 불리는 지역의 흑도 모두가 무당산 아래에 집결한 상태였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다만 ‘백련교’와 결탁하고 있다는 소문에 신빙성이 더해졌을 뿐.

흑도의 대규모 이동에 무림맹도 빠르게 반응했다.

[무림맹은 사나흘 내에 청룡대와 흑룡대를 차출하여 보낼 수 있도록 하겠소.]

전서구의 다리에 묶여 있던 남궁진의 친서.

불안하던 무당파의 분위기를 단번에 잠재울 수 있었다.

따라서 무극 진인은 모든 제자와 빈객을 소집하여 무림맹이 올 때까지 방어할 작정이었건만.

“골치가 아프구나.”

무극 진인의 말에 장로인 무의 진인이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구천검 선배라면 홀로 다녀도 무탈할 겁니다.”

“무탈한 거야 문제가 아니지만…… 구천검 선배라면 나중에 이를 두고 뭐라고 하겠느냐?”

T3T

“…….”

그 말엔 무의 진인도 할 말이 없었다.

강호의 새로운 신성이라 불리던 백무량이 사실은 칠십여 년 전의 영웅이라니?

그것도 심성이 괴팍한 것으로 유명한 선배라고 하니 도문의 후배로서 매우 대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다른 화제로 말을 돌리기로 했다.

“일단은 여기까지 온 흑도의 목적과 백련교가 얼마나 침범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겠습니까?”

“으음…….”

깊은 침음성을 흘린 무극 진인이 한 가지 가능성을 거론했다.

“흑도는 무섭지 않으나, 혹시라도 있을 백련교주의 존재가 무섭다.”

백련교주!

칠십여 년 전 곤륜파를 멸문시켰으며, 성치 않은 몸으로도 낙매신검과 백무량을 떨쳐 낸 마도 고수.

만일 그가 무당산 아래에 있다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몰랐다.

무극 진인은 백련교주의 강함에 몸서리치며 입술을 달싹였다.

“무림맹의 조력이 도착할 때까지 빈객을 지키는 것이 옳다. 무의 진인을 비롯해 다른 장로들은 백 선배를 찾아보시오!”

그 말에 일대제자 이상의 도사들이 온 봉우리를 뒤졌다.

그러나 백무량은 그들이 생각지도 못한 곳에 있었다.

***

달이 밝은 날.

백무량은 무당산에서 천천히 내려갔다.

무당산 아래에 흑도가 모였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듣지 않았는데도 자연히 이끌리듯 걸어갔다.

그러다 백무량의 시선이 손등에 닿았다.

“……사라졌군.”

항상 손등에 자리하고 있던 운룡의 문양.

그것이 검해의 주인이 된 후에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깊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어쩌다가 조금씩 거슬린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라도 사라진 것이 오히려 기꺼웠다.

시선을 거둔 백무량이 걸음을 재촉하여 마침내 흑도와 가까워졌을 때.

한 남자가 백무량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

“대화를 하려고 왔다.”

그렇게 말하는 남자의 얼굴에 하얀 가면이 씌워져 있었다.

정체야 뻔했다. 필시 칠성교의 주구일 것이 분명했다.

백무량은 가볍게 팔짱을 끼고는 고개를 까딱였다.

남자는 그런 불손함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준비한 말을 꺼냈다.

“교주께서 제안을 한다고 하셨소.”

“무슨 제안을?”

“천의란 결국 하늘의 독선. 반드시 따라야 할 이유가 없지 않소?”

“…….”

백무량은 잠시 침묵했다.

이것을 호의적이라고 착각하였는지, 남자의 마음이 들뜬 듯했다.

“그렇소! 교주께서 그대에게 걸맞은 자리를 마련한다고 하셨소!”

“……별생각 없다고 하던가?”

“그게 무슨 소리요?”

“나는 칠성교주의 부하를 모두 죽일 텐데, 상관없다고 하던가?”

“…….”

그 말에 남자의 가면에 시퍼런 염료가 올라왔다.

예전이었다면 칼부터 빼 들었을 백무량이었지만, 지금은 곧바로 알아차렸다.

칠성교주.

그의 의식이 가면을 통해 남자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야 상관없네. 부하가 죽었다 한들, 하늘을 끌어내리면 충분하지.”

“끌어내려서 마물을 소환하겠다?”

“그럴 생각이네. 자네에게도 크게 손해가 아닐 걸세. 지금까지 곤륜파는 천의에 의해 수백 년 동안이나 조종당하지 않았던가? 나와 손을 잡는다면 독선을 부린 하늘에게 복수할 수 있을 걸세!”

백무량은 차분히 백련교주의 말을 곱씹었다.

그의 어조부터 단어의 선택, 사소한 버릇까지도.

사교 특유의 강한 확신이 어려 있었다. 자기 뜻 말고는 다른 걸 생각해 본 흔적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칠성교주에게 대의 말고는 중요한 것이 없었다.

‘하늘에게 복수하게 해 주겠다……. 이것부터가 내 마음을 지레짐작한 것이지 않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누군가는 칠성교주를 성류(星類)라고 칭한다.

좌도방이라면 단순히 신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백무량에게는 하찮은 놈이었다.

“천하를 남에게 바치는 것이 대의의 전부냐?”

“……뭐라고 하였느냐?”

“자기가 망가뜨린 천하를 마물에게 고스란히 바친다! 그것이 대의라고 하니 우스울 수밖에 없지.”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으며 말했다.

“너희는 전부 죽는다.”

“……!”

“내가 남길 말은 그것뿐이야.”

서걱!

어느새 휘두른 검격이 남자의 가면을 박살 냈다.

뒤이어 백무량의 신형이 산 아래로 향하는 도중, 익숙한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잘했다.]

주백천이었다.

과거에는 심천검 외에는 불가능했지만, 망검에게 검해를 이어받은 직후에는 기거하는 망령 모두와 대화할 수 있었다.

산몸으로 죽은 선배들의 지혜를 빌릴 수 있는 셈이라.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백선신검을 휘둘렀다.

꽈과광!

거대한 폭음이 무당산을 강타했다.

***

네 시진 뒤.

뒤늦게 도착한 청룡대와 흑룡대는 폐허와 마주했다.

“이게 무슨 일이지?”

“관군과 싸우기라도 했단 말인가?”

마치 폭약을 터트린 듯한 폐허.

흑도의 시신은 많았지만, 누구 하나 칼을 제대로 쥐지 못한 상태였다.

‘금모도왕이 전력으로 싸워도 이렇진 않을 텐데.’

진자충의 뒤를 이어 청룡대주가 된 무인이 표정을 굳혔다.

“이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무당파에 올라가 보아라!”

“예!”

발 빠른 무인이 서둘러 등산로로 향하려던 그때.

백무량이 뒤늦게 하품을 하며 나타났다.

“무슨 일이냐?”

“……구천검 선배 아니십니까!”

서둘러 포권을 취한 청룡대주가 시체가 가득한 폐허를 가리켰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지 아시는지요?”

“내가 그랬다.”

“……?”

청룡대주로서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구천검의 강함은 의심할 나위가 없었다.

낙매신검마저도 자기 위라고 인정했으니까.

하지만 수십의 무인이 무기 한 번 쥐지 못했다는 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 이게…….”

“밤을 틈탔을 뿐이다.”

백무량이 쉬운 일이라는 듯 말했지만, 청룡대주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게…….”

“뭐가 그리 어려운 일이라고 그러나? 전대 청룡대주, 진자충이었다면 다른 걸 물었을 거다.”

“……?”

“이들 중에 백련교도가 있었는지를 물어야지.”

“아!”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진 청룡대주가 떠듬떠듬 물었다.

“혹시 여기 모인 흑도 중에 백련교도가 있었는지요?”

“없었다. 오히려 칠성교도가 몇몇 있었을 뿐이지.”

청룡대주의 이맛살이 좁혀졌다.

“으음, 그렇다면 백련교가 흑도와 결탁했다는 건 소문에 불과한 겁니까?”

그 말에 백무량이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이번 일로 확실해졌다.”

“확실해졌다는 건……?”

“백련교주가 강호의 흑도를 장악했다.”

“그걸 어찌 확신하십니까?”

“무당산에 모인 것이 백련교의 술책이었으니까.”

백무량은 품에서 서한을 꺼냈다.

내용은 피에 젖어 제대로 알아보기 어려웠으나, 하단에 적힌 것만은 정확히 보였다.

백련교주.

그의 직인이 햇빛 아래서 번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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