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7화 (217/275)

망검 (5)

망검의 무학은 백무량이 익힌 것과는 다르다.

백무량은 그 사실은 처음 이곳에서 검을 겨룰 때 느꼈다.

백무량의 무공은 후대로 이어지면서 개량되고 발전된 무학이었고, 망검은 그보다 훨씬 투박하고 묵직했다.

‘사람을 상대하는 검이 아니었지.’

주백천이 동굴의 벽면에 남겨 놓았듯.

검해는 사교들과 마물을 상대하기 위해 만들어진 성지이자 심상였다.

그렇다면 망검은 어떤 검을 수련하였겠는가?

‘마도 고수와 마물을 죽이기 위한 검. 망검은 그것을 만들려고 수없이 많은 망령과 싸웠고, 묵상해 왔을 거야.’

그에 반해 백무량의 검은 어떠한가?

고수에게 이기기 위한 검.

단지 그뿐이라면 앞으로 대적할 놈들에게 닿지 못한다.

무림이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상, 또다시 백련교주에게 패배할 터였다.

개량이 필요했다.

사람을 베는 것뿐 아니라, 마도 전체를 찢을 검. 그보다 더 나아가 마물을 벨 수 있는 검.

백무량은 망검의 무공에서 본 것을 떠올렸다.

‘일반적인 검초와는 완전히 달랐어.’

망검의 검초는 선이 아니라 면.

막대한 양의 내공으로 공간을 점하고서 앞에 선 대상을 송두리째 찢어 죽이는 것에 가까웠다.

망검이 그런 초식을 펼치는 데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백무량은 짧게 생각하고, 답을 떠올렸다.

“선배가 상대한 마물은 덩치가 크고, 상처를 재생했나 봅니다?”

망검의 이맛살이 뒤틀렸다.

“겨우 몇 초식을 보았다고 모든 것을 아는 체하려느냐?”

“앞으로 더 알아 가면 되지 않겠소!”

백무량은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입을 열지는 않았다.

광인과 나눌 수 있는 대화란 몇 되지 않기 마련이니까.

다만 한 가지, 다행인 것이 있었다.

“좋다!”

망검은 미쳤으되, 검객이었다.

그는 검을 휘두를 때만은 눈이 맑았다.

쏴아아…… 콰콰쾅!

두 검객의 검이 충돌할 때마다 검해가 뒤흔들렸다.

그때마다 백무량은 전신이 뒤흔들리는 충격을 받았다.

혹자라면 이를 두고 중검이라고 칭하겠으나, 실제 그의 검을 받아 내는 백무량의 생각은 달랐다.

‘검선 여동빈의 천둔검법이 이랬을까?’

무거움 속에 그윽한 이치가 있었다.

화검으로 흘리려고 하면 검기가 양옆으로 연기처럼 퍼지고, 응축된 검경(劍勁)이 손목을 난도질할 듯했다.

그 안에 구천화우검의 잔재가 있었다.

‘염천일원의 구결을 뒤섞었구나.’

망검의 움직임은 어린아이의 뜀박질처럼 가벼웠다. 하지만 움직임마다 현묘한 묘리가 있었다.

연로한 검객의 고뇌이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마공을 익힌 고수를 무찌를 수 있겠는가, 마물과 맞상대하고도 이길 가능성이 있는 방도가 무엇이겠는가?

그러한 고민이 망검의 칼끝을 타고 들리는 듯했다.

서로 주고받은 대화 하나 없었지만, 고독한 쇳소리와 불똥이 육성을 대신했다.

쩌적, 카드드득!

백무량은 가진 바 모든 것을 쏟아 냈다.

그러면서 조금씩 망검의 무학을 훔치고, 변화를 모색했다.

이를테면 방향성이었다.

무인과 싸우기 위한 무공이 아니라, 마도와 대적하는 길.

그 방향성을 망검과의 싸움에서 찾았다.

하나 붙잡은 끈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었다.

콰콰콰!

검해 한가운데가 갈라졌다.

구천화우검의 사초식, 염천일원이 서로 부딪치면서 거대한 파음이 일어났다.

그 와중에 여섯 연꽃이 바스러지기 시작했다. 연꽃이었던 먼지는 조금씩 검해에 뒤섞였다.

이제 해상육화(海上六花)는 없다.

검해라는 거대한 심상 아래에 녹아들었을 뿐.

그것을 느낀 망검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

소리는 파음에 의해 묻혔으나, 그가 펼친 초식이 분노를 대신했다.

콰르르륵!

검해에서 일어난 물거품이 백무량을 향해 쏟아졌다.

산봉우리를 무너뜨릴 듯한 기세.

운용 방식이나 구결은 다르지만 구천화우검의 육초식, 양천대소를 닮아 있었다.

‘양천대소(陽天大疏), 남동쪽 하늘이 크게 트이니.’

주자령이 말하기를, 검강이 한데 모여 벽력을 그린다고 하였다.

백무량은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리며 운룡대팔식을 펼쳤다.

촤악, 촤아악!

호흡을 여덟 번 나누어, 허공을 여덟 번 누비니.

백무량의 걸음이 향하는 곳마다 망검의 벽력이 내리쳤다.

위태위태한 상황 속에서 백무량은 무심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변천승운(變天承雲)이라!”

“……!”

곤륜파의 도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초식이다.

망검 또한 지지 않겠다는 듯 허리를 뒤틀었다. 뒤늦게 펼친 운룡대팔식으로 허공을 어지럽게 누볐다.

두 도사는 서로를 마주 보고서 검을 휘둘렀다.

그때마다 변천(變天)했다.

꽈르르!

검해의 하늘이 깨질 듯 무너지고, 원상태를 되찾길 반복했다.

그 과정 속에서 백무량은 조금씩 답을 찾아갔다.

‘망검의 수백 년을 모방하고, 내 것으로 바꾼다.’

과도한 운용에 상단전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정신을 놓치면 타 버리는 게 아닐까 싶던 그때.

백무량의 시야에 하나의 심상이 피었다.

‘……길?’

백무량은 망검과 어지럽게 검을 섞으면서, 심상을 보았다.

구천검 백무량, 혹은 곤륜검선 백무량이 평생 동안 닦아 놓은 길.

지금까지 배운 무학에 대한 정리.

그 옆에 하나의 목판이 있었다.

망검(忘劍)이라 적혀 있었다.

척사멸마라는 숙원을 이루기 위해 곤륜의 검을 잊은 검객의 길이 척박하게 나 있었다.

백무량은 그 길로 발걸음을 향했다.

“……!”

그 순간부터 조금씩 백무량의 검이 변화했다.

검을 아는 자라면 모두 눈을 빛내거나 인상을 찌푸렸다.

하물며 백무량과 마주한 망검은 어떠할까?

“놈!”

망검이 수백 년 동안 적공(積功)한 무학이 백무량의 칼끝에서 드러났다.

분노와 멸시 같은 것이 망검의 원동력으로 화했다.

“네가 그것을 익힐 성싶더냐!”

망검은 확신을 담아 외쳤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곤륜의 검법이라는 뿌리만 남아 있을 뿐, 망검이 독자적으로 만든 체계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사소한 검격부터 시작하여 의념을 일으키는 과정마저도 망검에게 맞춰진 무학.

그걸 눈으로 베낀다고 한들 백무량이 손쉽게 펼칠 수 없을 것이다.

망검은 백무량의 행동을 비웃고서 검을 휘둘렀다.

“그 오만함을 뜯어고쳐 주마!”

하지만 언제나 예외가 있는 법이라.

“후.”

백무량이 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눈을 빛내곤, 앞을 보았다.

그 시선을 본 망검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어딜 보는 것이냐?”

“길.”

백무량은 짧게 대답했다.

이에 비무를 지켜보던 모든 이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무슨 길이 있다고 저런 대답을 한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망검의 반응은 사뭇 달랐다.

“하, 길이라.”

웃음을 터트렸다.

그것이 기뻐서인지 혹은 가소로워서인지, 망검을 오래 봐 온 무명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망검의 공세가 더욱 거세졌다는 것만큼은 모두가 알았다.

쩌저적!

경계가 무너지고, 허공을 표표히 떠돌던 구름이 마구잡이로 찢어졌다.

하늘이 망검의 검 아래에 조아리는 듯했다.

그 공세 속에서 백무량은 평정을 유지했다. 쳐 내는 것뿐만 아니라 반격을 꾀하기도 했으나 상처가 더 많아졌다.

단 한 번이라도.

망검의 초식을 허용한다면 가슴팍부터 베어질 상황인데도 백무량의 눈은 망검에게 있지 않았다.

심상이 빚어낸 길만을 보았다.

‘고통의 길이구나.’

곳곳에 만들어진 피 웅덩이와 깎아지른 절벽.

망검이 검해에 기거하면서 맞닥뜨린 심마와 적공의 여정이 길에 있었다.

“얼마나 오래 계셨던 거요?”

백무량의 나직한 물음에 망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를 동정하느냐?”

꽈과광!

망검의 손끝에서 막강한 공력이 일었다. 검해 전체가 허공으로 점차 휘말렸다.

마치 폭풍을 연상케 하는 운용이었다.

“저건……!”

“대체 무슨 초식이란 말인가!”

검해의 망령들이 눈을 크게 떴으나 초식의 실체를 파악하진 못했다.

다만 백무량의 눈에는 보였다.

“유천앙시(幽天仰視)라.”

그윽하게 펼쳐진 심상에 무공과 의념을 뒤섞어서 펼치는 절초.

구천화우검의 마지막 초식을 자기 마음대로 개조한 듯했다.

도저히 검으로 펼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사교가 숭앙하는 마물이 저만큼 강력하단 거겠지.’

백무량은 초식을 창안한 뜻을 가늠하고는 검을 꽉 쥐었다.

극히 찰나 동안, 천주에 내공이 휘몰아쳤다.

망검이 펼친 것과 동일한 유천앙시의 구결을 가늠했다.

“……무량아!”

그 뜻을 알아차린 건지, 심천검이 걱정 어린 시선을 보냈다.

같은 초식이라면 당연히 개파조사일 망검이 더 강력하리란 생각처럼 보였다.

하지만 백무량의 뜻은 달라지지 않았다.

“…….”

그저 믿고 지켜보라는 듯 백무량은 고개를 쳐들었다.

그러고서 생각했다.

‘내가 지금까지 익힌 것, 이곳에서 익힌 것, 망검의 길에서 본 것 모두를 조화롭게 뒤섞을 수 있을까?’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리 천주의 그릇이 넓고, 무극세의 범주가 크다고 한들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할 순 없었다.

다만 한 가지 확신은 있었다.

“선배의 무학은 틀렸소.”

“……뭐?”

“선배의 길엔 오로지 고통밖에 없는데, 어찌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겠소?”

“…….”

그 말을 들은 망검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부정하지는 않았다.

망검이 겪은 수백 년은 고통뿐이었다.

실패를 곱씹으면서 복수를 다짐했고, 필사적으로 남과 싸우며 적공했다.

어쩔 때는 후대의 도사들에게 큰 짐을 떠넘겼다는 사실에 실의하기도 했다.

자기가 사교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도 이백 년은 되었다.

망검의 길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나를 깎아 내서라도 세상을 평화롭게 만들 수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너는 천의를 이었으면서도 그만한 각오가 없단 말이냐?”

망검의 목소리가 몹시 차분했다.

지금까지 소리를 질러 온 것과는 다른 반응이었으나, 백무량은 그의 본래 성격이 드러난 것이라 여겼다.

그도 그럴 것이, 망검이 펼치려는 절초는 검의(劍意) 그 자체였으니까.

광인의 정신으로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까스로, 아주 조금 남은…… 제정신을 짜내는 거겠지.’

저것을 펼치고 나면 망검은 자기가 곤륜의 도사였다는 것조차 잊을지도 몰랐다.

그만한 각오를 하고서 펼치려는 것이 보였다.

그렇기에 백무량도 각오를 했다.

“선배의 무학을 넘겠소.”

“…….”

“그래서 증명하겠소.”

백무량은 담담하게 말하며 백선신검을 쥐었다.

남은 것은 본능이었다.

두 도사가 어떠한 전조도 없이 서로를 향해 달려들었다.

검이 마주치는 순간은 극히 짧았다.

“……이제부터 네가 검해의 주인이다.”

망검은 검해에 기거하기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웃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