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16화 (216/275)

망검 (4)

교검(交劍).

두 검의 끝이 마주친다.

백무량과 망검이 동시에 출수한 검초가 서로 맞물렸다.

거대한 파도를 일어나 두 검객을 덮쳤다. 그러나 기백은 둘 다 변치 않고, 서로를 노려보았다.

그중 백무량의 신색이 범상치 않았다.

‘마음이 흘러가는 대로 두어라, 얽매임 없이 알기만 하라.’

환영진의 고성진과 싸우며 깨달은 금강경의 법문이다.

백무량은 몸에 익숙하게 밴 형(形)을 머리에서 부쉈다.

근육과 가슴이 가는 대로 칼을 휘둘렀다.

힘은 의도적으로 뺐다.

탈력(脫力).

그 요체가 무명의 가르쳐 준 수경의 실마리일지니.

“구천화우검.”

백무량의 입가에서 익숙한 무공명이 흘러나왔다.

망검의 눈가가 비틀리는 순간이었다.

“내가 그걸 모를 성싶더냐?”

백무량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그라면 알 것이다.

곤륜파의 개파조사이자, 검해에 오랫동안 머물러 온 망령.

구천화우검이라면 이치까지 꿰뚫어 볼 수 있을 테지만, 백무량의 구천화우검은 망검이 아는 것과 달랐다.

“나의 구천화우검은…… 형 없이 이루어지오.”

백무량은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하며 웃었다.

둥글게 휘어지는 입꼬리에 맞춰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며 백선신검으로 유려한 곡선을 그렸다.

무형과 무념, 탈력에서 비롯된 자유로움이 백무량의 손목 아래에 있었다.

“……흥!”

그러나 상대는 망검이다.

유성백의 초식을 수십 번이나 맞받아친 그가 백무량의 검초를 보지 못할 리가 없었다.

이미 그 궤도와 변화의 순간마저 꿰뚫고 있었다.

‘곤륜의 무학이라면 자그마한 먼지마저 핥았을 노괴다.’

백무량은 망검의 칼날을 직시했다. 유성백 이상의 강력함으로 자신을 찍어 누르려는 듯했다.

바로 그때.

백선신검의 칼날에 깃든 기운이 사방팔방으로 흐드러졌다.

“……!”

화산파의 화검.

천변만화하는 검기가 백선신검 주변에서 아지랑이처럼 피었다.

진자충의 무학, 풍화뇌동을 기리는 듯한 형상.

백무량의 의념 속에서 풍화뇌동은 가히 강호 제일의 비검술로서 발전해 있었다.

“놈! 잡기술을!”

그러나 태산을 짓누르는 힘 앞에서 비검술은 한낱 잡술에 불과하니.

망검의 검기가 넓게 퍼졌다. 기이하지만 사실이었다.

선이 아니라 면, 바닥을 담요처럼 인식하는 눈.

망검의 직관은 다른 무인과는 달랐다. 검의 기운을 넓게 퍼뜨려, 해일처럼 덮쳐 왔다.

일반적인 검객과는 완전히 다르다.

독자적인 체계를 수백 년 동안 깎아 온 광기가 느껴질 정도다.

‘이것이 검해에 오랫동안 머무른 망검의 초식인가.’

산이 아니라 거대한 파도.

그 광경을 한 명의 검객이 만들어 냈다면, 무공이 아니라 재해에 가깝다.

백무량은 망검이 만들어 낸 재해를 눈으로 담았다.

저거라면 유성백이 패배한 이유도, 무명이 망검을 꺼리는 것도 이해가 되었다.

쩌적, 촤아아……!

검해인지, 검기인지 모를 것이 백무량의 풍화뇌동을 깨트렸다.

보신경을 펼쳐 달아날 수야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망검이 인정하지 않을 터였다.

그렇기에 백무량은.

“……후우.”

호흡을 차분히 골랐다.

검해의 심상이 자아낸 청량한 공기가 전신을 순환했다. 삼단전과 일천세맥에 차가운 기운이 빠르게 내달리는 듯했다.

뒤이어 백선신검을 옆으로 뉘였다.

“화검으로 흘리겠다?”

누군가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백무량은 그저 말없이 웃었다.

저 말이 옳았다.

검 하나로 재해를 흘리고자 했다.

이것이 현실이었다면 수만 관에 가까운 무게가 짓눌렸겠지만, 망검이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재해라면 달랐다.

‘인간이 만든 것이라면, 마땅히 인간이 파할 수 있을 것이다.’

검해 전체를 뒤덮을 것만 같은 그림자가 자못 두려움을 불러왔지만, 보타문의 부동심이 백무량의 내심을 진정시켰다.

자신에게, 백무량이란 무인에게 많은 것이 있음을 상기했다.

검해에서 궁구하며 검을 익힌 시간, 유성백이 부러워하던 신공절학과 하늘이 부여한 재능.

또한, 영웅은 꺾이지 않음이라.

‘하필이면 왜 지금 영웅담이 생각나서.’

백무량은 피식 웃고 말았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말로 시작한 여정이 서서히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은 그 과정에 불과하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저 자신이 체화한 모든 것을 떠올리고 활용했다.

‘금강.’

재해를 앞두고서 하반신을 단단하게 뿌리박는다.

진각 한 번 밟지 않았음에도 몸이 검해의 표면 아래로 파고드는 감각이 있었다.

그 흐름을 그대로 이어서, 경파.

콰르르…….

진신내공이 천주를 타고 흘렀다.

그러나 경계는 있었다.

중단전을 중심으로 나뉘는 음기와 양기.

지금까지 백무량이 취한 영약들의 기운이 하단전과 상단전으로 향했다.

양이 하단전에 안착하고, 음이 상단전에 기거했다.

갑자기 머리가 차가워지니 백무량의 시야가 순간 명멸했다.

그 와중에 명정한 정신이 중심을 잡아 주었다.

‘이로써 소우주인 혼원에 태극을 이루니.’

무당이 검으로 태극을 그린다면, 백무량은 진신으로 이루었으니.

태청신공과 분심조화결로 내공과 심공을 완성했다면, 천주와 태극으로 외공을 완성했다.

백무량은 어느 때보다 시퍼렇게 물든 눈동자로 재해를 올려다보았다.

잠시나마 있었던 두려움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렇게 되니 판단이 바뀌었다.

‘흘리지 않고, 쳐 낸다.’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재해로만 보였던 검기의 파도에 빈틈이 조금씩 드러났다.

이때 백무량은 태극을 이룬 경파를 검에 실었다. 수경이 자연히 펼쳐지고, 화검도 뒤따라왔다.

그 중심에 구천화우검이 있었다.

‘어떤 것을 펼치느냐는 중요치 않다. 그저…….’

단번에 쏟아 낼 수 있다면.

유성백이 말했듯 누구보다 빠르고 강하기만 하다면 천하에 적수가 없을 것이다.

백무량은 그 말을 믿었다. 유성백이 부족했던 상단전의 조화 또한 완벽하게 갖췄다.

그렇기에 펼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구천화우검의 일초부터 구초까지.’

모든 심상을 떠올렸다. 검해의 파도에 파문이 일었다.

백무량과 망검.

두 검객이 검해의 주인 자리를 놓고 싸우는 자리였다. 검해가 뒤흔들리는 진동이 전신을 두들겼다.

“음……!”

“역시.”

이를 지켜보는 망령들이 제각기 감탄성을 터트렸으나, 정작 중심에 있는 두 검객은 고요했다.

……꿀꺽.

누가 먼저 움직이느냐.

어떤 검객이 선을 취하며, 상대는 선의 선으로 받아칠 수 있을 것인가.

그 긴장감이 점차 구체화되던 그때.

“무량아!”

백무량이 먼저 거대한 파도를 향해 뛰어들었다.

***

-균천관일(鈞天貫日).

고른 하늘의 태양을 꿰뚫을 듯이 찌르는 검이라고 한단다.

백무량은 자신의 원류가 누구에게서 왔는지를 떠올렸다.

태청선 주자령.

그야말로 백무량의 스승이었으며 아버지였다.

검해가 주는 심상과는 달랐다.

‘검해는 결국 망검이 주인인 곳이다.’

검해가 가르쳐 주는 무학과 심상은 무척 달콤했다. 때때로 궁지를 돌파했으며, 그것이 정답이라고 여길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곳에서 무학을 수련하면서 점차 그 생각이 깨졌다.

‘나의 뿌리, 내가 생각하는 무공의 극점을 검해에서 빌려 와선 안 돼.’

그 생각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검해가 백무량의 주인(主人)이 되었을 터였다.

자신이 아니라, 옛날부터 전해 내려온 심상 따위가.

‘그런 꼴은 못 보지.’

백무량은 씩 웃었다.

언제부턴가 천의를 이은 도사라고 주변에서 칭송해서, 어깨가 으쓱해져서 잊고 있었지만 자신은 구천검 백무량이었다.

백무량의 뿌리는 검해가 아니라 스승에게 있다.

그 사실을 깨친 순간 백무량은 검해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독자적인 검을 찾기 시작했다.

시작점은 유성백에게 무공을 배울 때부터였고, 환영진에서 점차 구체화했다.

그 결과가 옳았는지는 망검과의 비무로 밝혀질 것이다.

백무량은 균천관일에 심상과 심의를 담았다.

그렇게 칼끝이 파도에 닿는 순간.

꽈꽈광!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했다.

균천관일이 파도에 커다란 구멍을 뚫으면서 찬란한 햇빛이 백무량의 얼굴을 비추었다.

그러나 백무량의 검무는 끝나지 않았다.

팔첨으로 헤아린 다음 초식을 백선신검에 담았다.

-창천명월(蒼天明月).

곤륜산맥의 운해를 가르는 검이란다. 극성에 이르면 명월을 볼 수 있을 것이야.

주자령의 목소리가 여전히 백무량의 귓전에 남아 있었다.

백무량은 그 울림에 따라 검을 휘둘렀다. 구멍이 뻥 뚫린 곳을 중심으로 우측이 잘려 나갔다.

거대한 빙산이 무너져 내리는 굉음이 검해 전체를 울렸다.

“……이제야.”

백무량의 시야에 망검이 보였다. 그는 여전히 분노하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무엇이 그를 분노케 하였는가.

그건 백무량도 알지 못했다.

검해에 오래 거주하면서 생긴 병증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후배에게 이렇게 살기를 흩날릴 리가 없으니까.

“놈!”

망검의 우수가 움직였다.

단 한 번의 움직임이었으나 수십 갈래의 검격이 있었다.

하나하나가 유성백의 일 초식과 같았다.

눈으로 보는 게 아니라, 몸으로 반응해야 쳐 낼 수 있는 일격이 겹겹이 쌓였다.

“……하.”

백무량은 웃음을 터트렸다.

“과거에 놓친 숙제를 선배를 통해 풀겠군.”

“……뭐라?”

망검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백무량에겐 별 상관 없었다.

과거에 반응하지 못했던 유성백의 일 초식.

그것을 쳐 내는 것이야말로 과거의 자신을 넘었다는 증명이 될 테니까.

백무량의 천주가 그그긍거리는 소리를 냈다.

태극을 이룬 태청신공이 가공할 만한 기운을 일으켰다.

-호천풍연(昊天風煙).

진실하게 펼쳐진 호천풍연은 운검이라 불려도 모자람이 없다. 기억하여라, 검경(劍經)은 검기와 다르다는 것을.

백무량의 칼끝에 희끄무레한 경파가 일었다.

자그마한 무형의 구체 안에 구름 조각이 겹겹이 있었다.

화검의 이치가 담긴 검경이 망검을 향해 쏘아졌다.

“……!”

망검의 눈동자가 커졌다.

여태껏 봐 온 호천풍연 중에 깊은 무학이 담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카가가강!

망검의 살초에 구름 조각이 각각 달라붙고서는 거듭 몰아쳤다.

처음으로 망검의 초식이 백무량에게 밀리는 순간.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얄밉게 웃어 보였다.

“아직 여섯 초식 남았소.”

망검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다.

“나를 십초지적으로 여기느냐?”

“그래야 선배에게 인정받을 수 있을 테니까.”

“놈……!”

망검의 눈동자에 불꽃이 튀는 듯했다.

그와 동시에 검해 전체가 뒤흔들렸다.

지금까지는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망검의 전신에서 아지랑이가 피었다.

그의 옷자락 하나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곤륜산 정상에 흐르는 운해.

그 광경을 방불케 하는 모습에 백무량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제야 저 선배의 진심을 볼 수 있겠군.’

백무량은 망검에게 내심 노리는 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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