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5)
산맥을 깎아 내고, 하늘을 가를 수 있는 고수가 마보세부터 시작하여 삼재검법을 수백 번 펼친다고 생각해 보라.
어느 무인일지라도 거짓말처럼 여길 수련이다.
백무량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 그만둔 기본을 처음부터 다시?’
지루하고 고된 하루였다.
그럼에도 백무량이 때려치우지 않은 이유는 오직 하나.
“그만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 때, 나에게 말하게.”
그 한마디가 족쇄였다.
뒤이어 유성백은 백무량의 존재를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그의 수련은 백무량에게 시킨 것과 같았다.
한 시진의 마보세.
마보세를 끝내면 가부좌를 튼 채로 묵상.
묵상으로 다진 심공(心功)을 태을검법, 삼재검법, 육합검법으로 천천히 풀어내는 검무.
그것을 열두 시진 동안 반복했다.
수면욕은 아예 없는 사람 같았다. 그의 정신력은 사람이 아니라 식물의 영역에 달해 있었다.
반면 백무량은 어떠한가.
‘……죽겠다.’
발끝부터 파고드는 한기가 있었다.
발을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 피부가 찢어질 듯 갈라지고, 숨을 내뱉으면 이빨이 꽝꽝 얼어붙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허으으…….”
백무량이 앓는 소리를 흘리자, 유성백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엄살 피우지 마라.”
“허, 이게 엄살이오?”
“사람의 육신을 한계까지 단련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곳이 어디 흔한 줄 아나?”
유성백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혼백과도 같은 하얀색 입김이 부옇게 피어올랐다.
찰나 동안 백무량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유성백이 내뱉은 것은 분명 입김이었으되, 아지랑이 사이로 다른 기억이 비쳐 보였다.
“방금, 그게 무슨…….”
백무량은 자연스레 유성백에게 방금 본 것을 물으려고 했다.
하지만 유성백의 태도는 쌀쌀맞기만 했다.
“호기심을 해결할 시간에 수련에나 집중해라.”
“……칫, 알겠소.”
참으로 재수 없는 양반이다.
백무량은 속으로 툴툴거리며 유성백의 입가를 흘낏거렸다.
찰나였지만, 그의 입김에서 나무꾼으로 보이는 장한(壯漢)을 본 것이다.
‘방금 그건 뭐였을까? 생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백무량은 유성백에게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자신의 성정이 아무리 가벼울지라도 스승으로 삼은 무인에게 말을 함부로 붙일 만큼 개차반은 아니었다.
그저, 검해에 온 목적을 상기했다.
마도 고수를 이기고자 하는 마음, 그 너머에 있을 마물과 싸우는 데 필요한 일수(一手).
‘그 점에 있어서 유성백은…… 믿을 수 있는 검객이다.’
백무량의 시선이 유성백의 등에 따라붙었다.
그는 백무량에게 기본을 강요했으되, 자기 자신의 단련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오히려 후자에 더더욱 맹목적이었다.
수련을 멈추면 죽는 사람처럼.
감정을 조각칼로 깎아, 검(劍)으로 된 뼈대만 남은 사람 같았다.
‘미친 사람이야.’
백무량은 고개를 내저으면서도 유성백의 수련을 따라갔다.
시간의 흐름을 잊고, 바깥으로 향하려는 시선을 내면의 관조로 조금씩 끌어모아서.
육체에서 비롯된 피로와 고통이 백무량의 인내를 키웠다.
그 과정에서 정신은 연단되었다.
머리를 내리치는 한기와 백련교주를 향한 집념이 횃불의 연료가 되어, 길을 밝혔다.
‘내가 가야 할 길.’
발아래만 간신히 보이던 것이 조금씩 넓어졌다.
내면의 관조가 깊어지니 검해를 바라보는 시야가 커졌다.
여기까지가 열흘.
식욕이나 수면욕이 줄었다. 숨을 내뱉는 것조차 잊는 집중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렇게 이어진 찰나는 영원(永遠)이 되려는 듯했다.
유성백이 백무량의 손목을 잡아채지 않았더라면.
“더 멀리 가서는 안 된다.”
“……?”
무아(無我)의 관념에서 벗어난 백무량은 물끄러미 자신의 발아래를 보았다.
자연스레 눈동자가 커졌다.
“허!”
백무량답지 않게 놀란 목소리가 새었다.
균열이 일어난 피부 사이에서 혼백이 연기처럼 흐르고 있었다.
다르게 말하자면, 정신(精神).
어느새 육체와 조화를 이룬 영혼이 검해에 녹아들고 있었던 것이다.
백무량의 뺨에 식은땀이 흐르는 찰나에, 유성백이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뻐해도 좋다. 검해가 네 무학을 최우선으로 받아들여야 할 가치로 여겼다는 뜻이니까.”
“그게 무슨 기쁨입니까? 자칫 잘못하면 죽을 뻔했는데!”
“기쁘지 않다?”
유성백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무감정한 눈.
중요한 것을 몇 가지 거세한, 검성(劍星)의 외눈이었다.
“사교와 대립한 곤륜파가 가진 수백 년의 세월보다 네 무공이 뛰어나다는 보증인데도 말이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하물며 내가 옆에 있는데 후배가 죽게 두었을 것 같나?”
그렇게 말한 유성백이 잠시 턱을 매만지고는.
“뭐, 그것도 나쁘지 않았을지도 모르겠군.”
“진심이시오?”
“농담이었다.”
“…….”
백무량은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유성백을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유성백은 다시 자세를 고쳐 잡았다.
이제는 지켜보는 것조차 질릴 정도로 본 태을검법의 기수식이었다.
천주부동세(天柱不動勢).
검해의 파문이 멈추고, 저 멀리서 백무량의 무학을 논하는 백노와 주백천의 목소리마저 흩어진다.
만물이 고요해지는 착각이 들었다.
백무량으로선 쉽사리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유성백만이 이룬 극점의 경지.
그것을 열흘 동안 지켜본 지금에야 유성백이 제시한 과업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깨달았다.
‘부동세를 이루거나, 부수거나.’
처음에는 부수는 가능성을 떠올렸다.
무당의 태극을 부수었듯, 유성백의 천주부동세에도 틈이 있으리라고 여겼었다.
하나 그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달라졌다.
아니, 애초에 전제부터 잘못되었다.
‘난 어느 쪽도 이룰 수 없어.’
천주부동세는.
외눈의 검성이 많은 것을 거세하고서야 이뤄 낸 극점이었다. 아무리 백무량이 천고의 기재라고 한들 부동세를 베낄 수는 없었다.
부수는 것 또한 마찬가지.
태청신공의 공력으로 억지로 짓누를 수야 있겠지만, 천주부동세의 형태는 부서지지 않을 터였다.
기본 혹은 뿌리, 기둥.
유성백이 삼단전에 걸쳐서 세운 천주부동세는 불굴(不屈)의 형상이자 과거에 대한 반기로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무량은 과거에 유성백이 남긴 유서를 보았다.
[백련교주.
그 괴력난신과 겨루지 말라. 인세의 무공으로는 다툴 수 없다. 명심하라, 피하는 것이야말로 사는 방법이다.]
그 유서를 백무량이 보았다는 사실은 유성백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구태여 말하지 않았다.
천주부동세.
그것을 펼칠 때마다 기둥 사이에 덧칠한 집념과 집착이 드러났다. 모두 백련교주를 향한 감정이었다.
그 감정은 그대로 백무량에게 투영되었다.
“그래서야 어찌 백련교주에게 이길 수 있겠나?”
“집중이 옅다.”
“기본기가 부족하면 언젠가 신공절학도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나에게 목이 베인 명문의 후예가 몇인 줄…….”
은근슬쩍 자기 자랑을 꺼내면서 백무량을 깠다.
유성백 자신은 느끼지 못했지만 말 중에 질투가 담기기도 했다.
생전에 가지지 못한 신공절학.
절대적인 지지자, 주백천의 존재.
검해로부터 이어진 재능과 완성된 신체.
검객으로서 완성되었으나 백련교주와의 악연이 인간다운 감정을 지탱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조급한 심정이 들었다.
“얼른 천주(天柱)를 이뤄야 한다.”
“천주가 뭡니까?”
“나의 독자적인 무학 체계로, 정기신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넘어 삼단전과 일천세맥이 하나의 기둥처럼 전신에 존재하는 것이다.”
내공을 의지로 수발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재하게끔 하는 체계.
호사가의 헛된 망상을 빌리자면 자연지체에 가깝다며.
유성백은 평소답지 않은 친절함으로 백무량에게 천주의 개념을 설명했다.
“외공을 익히지 않더라도, 내공이 충분하다면 전설상의 금강불괴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물며 신공을 익힌 후배라면 더더욱 높은 지점에 이르겠지.”
“지금까지 마보세를 한 이유가 이겁니까?”
“계속해서 육체를 몰아붙이면 기는 자연스럽게 목숨을 이어 붙이려고 하고, 정신은 또렷해지기 마련이다. 그것을 관조하면서 조금씩 조화롭게 만들고 하나로 이어 붙이는 것이지.”
“그러면 부동세는…….”
“노력 여하에 따르겠지. 하지만 내가 보기에 후배는 침착함이 부족하지 않나.”
유성백이 보기 드물게 빙긋 웃고는 백무량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마저도 어딘가 찝찝하게 느껴진 백무량은 유성백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렇게 또다시 열흘.
“……후우.”
유성백이 입김을 불어 냈다.
전에 보았던 것처럼 입김 사이에서 장한이 나무를 베고 있는 듯한 형상이 엿보였다.
그와 동시에 유성백이 인상을 찌푸리고 하늘을 보다가, 백무량에게 고개를 돌렸다.
불식간에 시선이 마주쳤다.
“수련에 전념하지 않고 무얼 하나?”
유성백의 불호령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서릿발 같은 한기와 분노가 뒤섞인 목소리였다.
백무량은 유성백의 초연한 태도가 무너졌음을 느꼈다.
‘이따위로 할 거면 다른 사람한테 배우러 가라고 했을 텐데…….’
천주의 개념을 가르칠 때부터 달라졌을까?
아니었다. 자신을 가르치는 데 전념하기 시작한 건 그보다 이전이었다.
잠시 대답을 망설이던 백무량이 유성백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김.”
“헛소리를 할 것이라면 당장…….”
“전부터 느꼈는데, 선배가 흘리는 입김은 뭡니까? 그때부터 급해 보였단 걸 아십니까?”
“…….”
“사정을 깊게 묻지 않으려고 했지만, 지금은 선배가 제 스승이 아닙니까? 현세에 있는 선배의 후인에게 뭐라도 전달하겠습니다.”
“…….”
유성백은 계속해서 침묵했다. 뱉으려는 낱말을 골라내거나, 망설이는 기색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도리어 결연했다.
“내가 남겨 놓은 자식이나 가족에게 정이라도 붙여 놓은 사람처럼 보이나?”
“짧은 시간이긴 해도 스승이시지 않습니까!”
“쓸데없는 소린 그만하고, 수련에만 집중해.”
그렇게 말하는 유성백의 목소리는 엄중하기만 했다.
꾸며낸 연기가 아니라, 진심으로 남겨 둔 후인에 대한 미련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백무량은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마보세를 취했다.
눈으로는 유성백의 검무를 담았다.
스르륵, 촤아아…….
완벽에 가까운 검세와 몸의 움직임, 균형.
잠시나마 품었던 조급함은 온데간데없었다.
유성백의 칼날은 향하는 곳마다 검기로 이루어진 파도를 일으키고, 금세 사라졌다.
천주의 개념으로 펼치는 검법이었다.
‘검극이 향하는 곳에서 일어나고, 뜻대로 사라진다.’
여기까지는 흉내 낼 수 있는 영역이었으나, 부동세는 달랐다.
콰콰쾅!
산맥을 깎아 내고도 남을 충격이 허공을 때리면 천지가 진동하기 마련.
하지만 검해의 표면은커녕 백무량의 옷깃 하나 흔들리지 않았다.
‘……이래서 부동세(不動勢)인가.’
적을 제외하고는 조금도 건드리지 아니하니, 부동.
낭비하지 않은 힘을 자기 의지대로 다스리기에, 세.
‘모든 힘을 온전히 통제하기에 천주부동세는 공방일체의 무학이라 불리어도 부족하지 않다!’
백무량은 유성백의 검무를 눈에 담으면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제야 다른 선배가 유성백에게 자리를 내준 이유를 깨달았다.
‘천주부동세야말로 모든 무학을 모아 줄 큰 그릇이자 기둥이 되겠구나.’
백무량의 얼굴에 화색이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