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6)
마보세와 묵상에서 이어지는 검무.
백무량은 유성백의 단련을 치열하게 따라갔다.
조금의 뒤처짐도 없이, 남은 시간조차도 잊고서 뒤를 좇았다.
하지만 한 가지의 고민은 있었다.
‘태을검법과 삼재검법은 천지인을 표방한 기본 검식(劍式)에 가깝지만, 구천화우검은…….’
한 호흡에 여러 선을 꿴다.
구름 안에 무엇이 맺혀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검기가 비처럼 흩날린다.
유성백의 무학이 기본으로써 무적(無敵)을 목표한다면, 구천화우검은 화검과 경파에 가까웠다.
아무리 유성백처럼 검무를 담백하게 간소화하려고 해도 불가능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렇게 백무량이 사흘 동안 고민하던 차에, 유성백이 한심하다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뭘 하고 있나?”
“예?”
백무량이 눈을 끔뻑거리는 모습에 유성백은 한숨을 내쉬었다.
“왜 나를 따라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거야, 선배가 기본을 잘 쌓으라고 했으니까…… 태을검법이나 삼재검법을 연마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유성백은 고개를 작게 내저었다.
“후배는 나를 따라 익히려고 하면 안 돼. 애초에 잘못된 행동이야.”
“……?”
“자기가 익힌 무(武)를 완벽하게 펼치기 위해, 마보세를 취한다. 보다 나은 초식의 형(形)을 그리기 위해, 묵상을 하고…… 허공에 그리는 것이다. 이렇게.”
유성백은 검지를 허공에 일자로 그렸다.
어린아이가 나뭇가지를 가지고 노는 듯, 아주 가벼운 움직임이었다.
그저 휘두른다. 거기에만 치중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의지(意志)가 있었다. 집념, 한, 백 년의 망념이라고 해도 좋았다.
유성백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후배가 상단전을 개화하고, 분심조화결을 익혔다는 것을 안다. 의념을 무공에 활용하여 심상을 그리는 것 또한, 익혔겠지. 하지만 진정으로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콰아아……!
세찬 바람이 백무량의 옷깃을 때렸다.
백무량은 피부가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진원지는 분명했다.
유성백이 장난처럼 휘두른 손가락.
그 끝에서 갈라지는 허공을 보았다.
안력을 집중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을 만큼 미세했으나, 백무량이 아는 강호십대고수보다 고절한 수법이었다.
꽈아악.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백선신검을 쥐었다. 손바닥 안쪽에서 맺힌 땀이 오늘따라 차갑게 느껴졌다.
“선배의 일 수를 보지 않았다면 안다고 말했겠지만, 보고 나니 자신이 없습니다.”
“원래 그런 것이다. 아는 만큼 보인다, 그건 비단 학문이 아니라 무학에도 적용되는 법이니까.”
유성백은 엷게 웃고는 숨을 가다듬었다.
일순, 고요해졌다.
손가락을 휘두르면서 생긴 바람, 갈라졌던 허공, 이어 생긴 여파까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보았다. 유성백의 의지는 일개 념(念)이 아니라 현상마저 간섭하는 영역에 있었다.
“대단하게 보이나?”
“……예.”
백무량이 기탄없이 말하니, 유성백도 솔직하게 답했다.
“반은 대단하고, 반은 무용한 것이다. 검해에서만 펼칠 수 있는 것이니까 말이야.”
“그게 무슨 말입니까?”
“내가 이곳에서 얼마나 많은 수련을 했을까?”
“대략 팔십여 년 아니겠습니까?”
“현세의 기준에서는 그렇지. 하지만 이곳은 후배가 경험했다시피, 바깥과는 다르게 흘러. 느리거나 빠름을 분간할 수가 없지.”
유성백이 두 팔을 폈다.
이에 검해의 기류가 유성백의 어깨를 타고 흐르더니 하복부에서 용천혈까지 주르륵 흘렀다.
백무량의 눈동자가 순간 경악으로 커졌으나, 곧바로 이해했다.
“……검해와 동화한 겁니까?”
“잘 아는군. 아니, 한 번은 경험해 봐서 그런가?”
백무량은 고개를 끄덕였다.
유성백의 수련을 이해하고 난 뒤 열흘.
백무량의 피부에 균열이 일어나면서 혼백이 흐른 적이 있었다.
만일 유성백이 중간에 멈추지 않았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골이 송연해졌었다.
한데 그 결과물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니!
백무량의 목소리가 그답지 않게 흔들렸다.
“이제 알았습니다.”
“무엇을?”
“선배가 이룬 천주부동세는…… 동화한 이후에 완성한 게 아닙니까?”
그 말에 유성백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내어 웃었다.
“이래서 신공절학을 익힌 천재라는 놈들은 재수가 없어. 설명하는 맛이 없군.”
유성백의 수련.
방금 보여 준 일 수.
천주부동세의 체계와 구성.
그 세 가지가 단숨에 백무량의 머릿속에서 맞물렸다.
‘내 생각이 맞는다면, 천주부동세는 우연히 완성된 무학일 거야.’
천주란 삼단전과 일천세맥을 묶어서 정(精)에 기둥을 이루는 것.
상식을 넘어선 발상이다.
유성백이 무공에 미친 광인일지라도 하나의 계기 정도는 필요했을 터였다.
백무량은 유성백에게 물었다.
“선배가 검해와 동화하면서 천주를 이룰 방법을 알아냈고, 부동세는 부차적인 무학이 아닙니까? 천주를 이루는 동안 정신을 잃지 않게끔…….”
“하하, 하하하!”
유성백은 하늘을 바라보며 크게 웃었다.
기꺼워하는 웃음 속에 복잡한 감정이 있었다.
천주부동세를 평생 싫어하던 부류에게 전수하는 짜증.
목숨을 잃고 나서 이룬 극점(極點)을 현세에 남기게 되었다는 안도.
무엇보다, 백련교주를 직접 상대하지 못하기에 생기는 분노와…… 백무량에게 거는 기대라.
유성백은 그 모든 것을 웃음으로 털어 냈다.
뒤이어 자신의 진전을 이을, 뻔뻔한 제자를 보았다.
“천주를 이룬 발상은 정확하게 알아냈지만, 부동세는 아니야.”
“그럼 뭡니까?”
“다 이곳에서 버티기 위함이지. 나 말고도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하나쯤 있을 거야.”
후우우…….
유성백이 숨을 내뱉었다. 그러자 하얀색 입김이 새었다.
백무량이 두 차례 보았던 광경.
장한에 관한 형상이 어렴풋이 지나갔다. 백무량의 눈이 자연스레 커졌다.
“저건…….”
“내가 죽기 전에 품었던 한과 기억이네. 모두 흘리고 나면 미련이 없어질 테고, 여기에 남아 있지 못하겠지.”
그 말에 백무량은 유성백이 유난히 조급해 보였던 이유를 깨달았다.
“하면 선배는 언제까지 버틸 수 있습니까?”
“길진 않아. 애초에 내가 곤륜도가 아니니까, 이곳에 온 것도 순전히 우연이거나 기적이겠지.”
유성백은 무덤덤하게 대답했다.
“뭐, 기적이란 단어 자체를 좋아하진 않지만…… 이렇게 된 걸 보면 한 번쯤 믿어도 될 것 같군.”
“……?”
“천주부동세를 익힐 수 있는 뻔뻔한 놈이 내 눈앞에 있지 않나. 기대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야.”
유성백의 눈가가 둥글게 휘었다.
첫 만남에서 냉정하고 차가운 모습만 보였던 유성백이었기에 극적이었고, 불안함으로 다가왔다.
백무량은 억지로 웃었다.
“뭘 그리 금방 갈 사람처럼 말합니까?”
“어차피 난 죽은 사람이고, 후배는 아니잖아.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자네 사형처럼 엄청난 뒷배를 만들어 두는 건데 말이야.”
말하다가 문득, 유성백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마음속 안에 있던 독기.
백련교주를 향해 다시금 칼을 들이밀겠다던 감정이 어느새 사라졌음을 깨달았다.
신공절학을 익힌 백무량에게 품었던 사소한 짜증이나 질시마저도.
“……정말 얼마 남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어.”
유성백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곤 피식 웃었다.
예전이었다면 화를 내거나 하늘을 향해 무정하다며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지금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평생 수련한 무학을 누군가에게 남길 수 있다.’
천주부동세는 백무량에 의해 남는다.
그 칼날은 백련교주를 향하고, 언젠가 목숨을 연명하고 있을 후인에게 건네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나서 유성백은 마음을 다잡았다.
“앞으로 한 달, 그 안에 전수를 마치지.”
“천주부동세를 어찌 한 달 만에 배웁니까?”
“나야 여러 시도를 하느라 팔십여 년이 걸렸지만, 후배는 나한테 배우는 입장이 아닌가? 하물며 신공절학을 익힌 천재인데 그 정도는 해야지.”
“…….”
“그리고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게 무공을 배워야 할 것 아닌가? 엄살 피우지 않도록 해.”
유성백은 백무량에게 으름장을 놓고는 태을검법을 천천히 펼쳤다.
이에 백무량도 백선신검으로 검무를 추기 시작했다.
유성백이 펼치는 검법과는 달랐다.
구천화우검.
곤륜파의 고유한 검법으로서, 주자령에게 건네받은 혼.
그것을 단련하고자 했다.
***
백무량이 유성백과 수련하는 동안, 다른 고수들은 심도 있는 무론을 나누었다.
구천화우검과 다른 문파의 무학.
그것을 천주부동세에 담고서 어떤 방향성으로 나아갈지, 아직 답이 나오지 않았다.
특히 심천검과 백노의 대립이 격했다.
“경파는 구천화우검의 이초에 어울리는 무학이야. 그걸 천주의 의념과 함께 펼친다면…….”
“경파에만 집중해선 안 됩니다. 다른 무학과 조화를 이루어야지요.”
“내가 저 후배 놈과 함께 다닌 시간이 길다. 누구 말이 옳겠느냐?”
심천검과 백노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면, 한쪽에서 주백천과 무명이 합리적인 방안으로 엮었다.
“하나의 무학을 하나의 초식에 덧대는 방식은 이미 망검과의 초식으로 파훼당했으니…… 백노의 말이 옳긴 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게. 하나에만 집중해선 마도 고수에게 범접할 수가 없어. 게다가 그 너머에는 마물이 있지.”
“으음.”
주백천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백무량이 익힌 무학들.
그것을 하나하나 짚어 보면 천고의 보물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몸에 품은 것만으로 대단하다 여길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 있는 선배들의 목표는 합일 내지는 조화.
백련교주와 칠성교주를 동시에 상대하고도 남을 경지를 논했다.
‘괴력난신과 성류(星類)를 이길 궁극의 무학이라.’
그것이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저기 묵상하고 있는 망검이라면 가늠하고 있을까?
주백천의 시선이 망검에게 향했다가, 백무량에게로 돌아갔다.
쿠르르…… 쾅!
유성백과 함께 검무를 추는데 그 움직임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언뜻 보면 유성백에게 대적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광경을 함께 본 무명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쩌면, 어쩌면 말일세.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더라도…… 저 후배가 알아서 답을 찾을지도 모르겠어.”
“제 사제니까요.”
주백천은 백무량에게 무한한 신뢰를 드러냈다.
한편으로는 무명에 대한 궁금증이 일었다.
“한데…… 선배께서는 어떤 위치에 있으셨기에 아미복호검을 창안하게 된 겁니까?”
“저기 있는 유 씨도 말하지 않는데, 내가 뭐 하러 말하겠나?”
무명은 그렇게 둘러대고서 심천검과 백노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아무래도 옛이야기는 피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
얼마나 긴 시간이 흘렀을까.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고서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지쳐서 헉헉거리는 유성백의 어깨가 시야 한구석에 있었다.
잠시 후, 유성백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차마 스승이라고, 힘들어하는 모습은 보기 싫다는 거냐?”
“…….”
“흥, 말하는 것은 왈패나 다름없는 놈이 마지막에는 도사처럼 구는구나.”
한쪽 입술을 씰룩인 유성백이 처음으로 자신의 검을 꺼냈다.
뒤이어 그것을 백무량에게 겨누었다.
필살의 기세가 전신을 누비는 듯해, 백무량의 숨이 순간 멈췄다가 짜증을 토해 냈다.
“이건 무슨 짓입니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가르침이다.”
유성백은 고아한 목소리로 말했다.
“검을 들어라, 백무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