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곤륜검해-203화 (203/275)

가르침 (4)

“하하, 하하하…….”

주백천은 울거나 슬퍼하는 것이 아니라, 시원하게 웃고는 백무량의 얼굴을 보았다.

깜짝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아쉬워하고, 미안해하는 듯한 표정.

그 복잡한 감정들이 주백천에게는 우스웠다.

“지금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그리도 아쉬웠더냐?”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닙니까! 제가 그토록…… 얼마나…….”

백무량은 말을 끝까지 잇지 못하고 침음했다.

오랜 기억.

사무친 후회.

기억과 후회에서 파생된 감정들.

그것이 목 아래에서 꽉 뭉쳐서는, 백무량의 입가를 틀어막은 듯했다.

그 모습을 본 주백천은 백무량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겠지.”

“뭘 그리 무덤덤하게 말씀하십니까? 제가 얼마나 마음고생을 한 줄 아십니까?”

백무량이 순간 울컥하여 말하니, 주백천이 껄껄 웃었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 자리가 쉬운 줄 알았더냐!”

“……허.”

이렇게 맞받아치니 백무량도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와 동시에, 주백천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이미 사형은 뜻을 이뤘구나.”

“…….”

주백천은 말없이 빙긋 웃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예전에는 뜻을 직접 전하기 위해 글을 쓰고, 이야기를 통해 돌려서 말하고는 했지. 하지만 이제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는구나.”

“나도 이제 강호의 영웅이라고 불리니까.”

그 말에 주백천이 파안대소했다.

다만 백무량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미래를 위한 안배를 남기고, 내가 그걸 회수하는 과정 자체가 사형이 남긴 뜻이었던 거야.’

현세에서 함께하지 못하냐는 물음에 주백천이 시원하게 웃은 이유가 그것일 터다.

처음부터 자기가 남긴 유업(遺業)을 따라갔는데, 지금 함께하지 못한다고 아쉬워하는 것처럼 보였을 테니까.

‘사형은 대인(大人)이구나.’

백무량은 까닭 없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주백천의 뜻은 굳어진 듯 보여, 무슨 말을 해도 자신만 마음이 상할 것 같았다.

하지만 주백천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후회는 없으나, 아쉬움이 크구나.”

“예?”

백무량이 깜짝 놀라서 되물으니, 주백천이 자기 속내를 허심탄회하게 밝혔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서 아무런 관련도 없던 연호를 끌어들여야 했다. 나를 얼마나 원망했을지 가늠도 되지 않는구나.”

“아니었습니다.”

그 말에 주백천은 엷게 웃었다.

백무량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다.

“허, 그럴 리가 있겠느냐? 나 때문에 얼마나 오랜 시간을 낭비하고 사문에 돌아가지 못했을 터인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사질은…… 사형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괴로워했지만, 이 일을 맡은 걸 후회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더냐.”

주백천은 잠시 침묵했다.

오랜 시간 보지 못하여 얼굴마저 가물가물한 종질, 주연호.

그 아이가 감내했을 고통과 괴로움은 어떠했을까.

멀리서 쇠락해 가는 곤륜파를 바라보는 시간은 얼마나 길었을까.

무릎을 꿇고 사죄라도 하고 싶건만, 검해와 현세는 완전히 단절되어 그 바람은 이룰 수 없었다.

“언젠가 내가 한을 버리고, 승천한다면…… 그때 용서를 구해야겠지.”

주백천이 담담히 읊조리는 동안 백무량은 침묵을 지켰다.

그로부터 한 시진 뒤.

수련이 시작되었다.

***

“상승의 검법, 태청신공이라는 절학. 다 좋지. 곤륜파의 도사로서 대성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외눈의 무사, 유성백이 백무량의 종아리를 검봉으로 툭 두드리며 하려던 말을 이었다.

“하면 검객으로서는 어떠할까?”

“그게 무슨…….”

백무량은 땀방울을 뚝뚝 흘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유성백의 수련 방식이 너무나도 괴팍했다.

‘하루 종일 내공을 쓰지 않고 마보세를 취하라니…….’

검해에서 언제까지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아니던가?

백노나 심천검, 무명에게도 배울 것이 많은데 이러고 있는 것이 참으로 우스웠다.

따라서 백무량은 진지하게 유성백을 설득해 보려고 했지만.

“내 방식에 타협이란 없다. 어렸을 때부터 신공절학을 접한 너와는 다르게, 나에겐 이것밖에 없었으니까.”

“이런 것으로 고수가 될 수 있다 칩시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는 방식이잖습니까?”

“다른 사람에게 배우는 것이 낫다?”

“예!”

“그러면 그만둬도 좋다. 말리지는 않겠다.”

그 말을 끝으로 유성백이 등을 돌렸다.

어떠한 말없이, 백무량의 판단을 수긍하겠다는 태도로 보였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마보세를 풀었다.

“내가 겁이라도 먹을 줄 알았나?”

그렇게 투덜거리며 굳은 근육을 풀려는 그때, 심천검의 전음이 귓가를 간질였다.

[답답하게 느껴질지라도 배워라.]

[이유가 뭡니까?]

[곤륜파의 무공을 배우지 않고, 하물며 도학이라곤 조금도 모르는 남자가 여기까지 왔다. 어떤 사람일 것 같으냐?]

심천검의 조언은 틀림이 없었다. 마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유성백의 비범함은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중후했다.

하지만 저런 수련 방식마저 배워야 한단 말인가?

백무량은 유성백을 쉽사리 신뢰할 수 없었다.

되살아나고 칠 년, 숱한 사건을 겪으면서 생긴 버릇이었다.

[일단은 다른 선배들에게 배우고 싶습니다.]

[……네 생각이 그렇다면, 더 말리지는 않으마.]

심천검의 한숨 소리가 뒤섞여 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유성백의 수련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지는 것을.

백무량은 어깨를 한차례 휘돌리고는 검을 맞댔던 무명에게 걸어갔다.

“아미복호검을 가르쳐 주십시오.”

“유 씨는?”

“그만두었죠.”

그 말에 무명은 잠깐 눈을 끔뻑거리다가 껄껄 웃었다.

“하하, 그럴 만도 하지. 밑도 끝도 없이 기본을 중시하는 남자이니까. 후배가 신공을 익혔다는 점도 그놈에겐 고깝게 느껴졌을 거야!”

“……예?”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반문했다.

그 순간, 유성백이 했던 말 몇 가지를 떠올렸다.

-어렸을 때부터 신공절학을 접한 너와는 다르게.

이것만 하더라도 백무량에게 가진 감정이 좋지 않다는 뜻 아니겠는가?

백무량의 얼굴이 짜증으로 뒤덮였다.

“현세는 지금 마교도로 인해 혼란하거늘…… 신공을 익혔다는 게 무슨 상관이라고?”

“어허, 그놈 앞에서는 그렇게 말하지 말게. 유 씨한텐 나름대로 인생의 중대사일 테니까.”

무명이 한쪽 눈을 찡긋거리고는 유성백을 가리켰다.

“하지만 지금 후배가 스승으로 삼아야 할 사람이 유 씨인 건 확실하네.”

그 말에 백무량이 기겁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저 사람한테요?”

“사람이라니, 선배지!”

“아니, 제가 죽기 전에는 동시대 사람이었습니다. 나이가 조금 많았을 뿐이지…….”

“배움을 청하는데 나이가 무슨 소용이야? 하물며 백련교주라는 같은 적을 두고 있지 않나?”

무명이 히죽 웃었다. 호기심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였다.

“후배가 그래도 도사니까, 저런 꽉 막힌 놈한테 아량을 베풀게!”

“……그럼 이것만 물읍시다. 제가 왜 저 사람을 스승으로 삼아야 한다는 겁니까?”

무명은 잠시 웃음을 거두고서 진지한 목소리로 답했다.

“후배가 저기 있는 노친네한테 일 초식에 제압당한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노친네라면, 망검 말입니까?”

“그래.”

백무량은 깊이 고민하고서 대답했다.

“그야 선배가 말했던 대로, 모든 무학이 완성에 다다르지 않아서가 아닙니까? 구천화우검과 다른 방향성을 억지로 조화에 욱여넣은 것도 있을 테고요.”

“그보다 더 원론(原論)으로 가 봐.”

“……그게 아니란 겁니까?”

“기본.”

무명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저기 있는 유성백이는 망검을 상대로 수십 초를 교환했네. 구천화우검 같은 상승의 검법이 아니라, 태을검법과 삼재검법으로만 말이야.”

“……!”

백무량은 순간 깜짝 놀라 유성백의 뒷모습을 보았다.

사소한 움직임마다 꿈틀거리는 근육.

평생 몸을 혹독하게 몰아붙인 결과물이 유성백의 전신에 있었다.

가볍게 검을 휘두르는 것만으로 검해의 잔물결이 이리저리 흔들리니.

태청신공으로 구천화우검을 펼치는 것보단 약하나, 완성된 초식으로서의 깊이는 상상 이상이었다.

“허.”

백무량이 감탄성을 흘리자, 무명이 유성백의 과거사를 꺼냈다.

“맨바닥에서 시작하여 정상에 오른 검객(劍客)일세. 평생 축적한 고집이나 신경질이야 뭐, 소 힘줄보다 질기지만…… 배울 것이 있을 거야.”

“…….”

“사실, 후배는 어린 시절부터 신공절학으로 성장해 온 것도 맞지 않나? 내가 어렸을 땐 후배 같은 도사를 볼 때마다 엄청 질투했다고.”

“기본부터 다지라는 겁니까?”

백무량의 구겨진 표정을 본 무명이 피식 웃었다.

아무리 봐도 마음에 차지 않는 듯해서, 진심을 꺼냈다.

“어디가 부족해서 기본부터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이지?”

“솔직히 그렇지요.”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네.”

그 말에 백무량은 무명에게 시선을 돌렸다.

자기도 그렇게 생각하면서 왜 유성백에게 배우라고 말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지만 무명의 뜻은 제법 깊었다.

“이미 후배가 품은 검법과 무학의 조예는 깊네. 우리가 참견하는 게 아니라 다듬는 수준일 정도면 사실 말 다 했지. 하지만 기본은 어떨까? 태을검법이나 삼재검법만으로 망검과 합을 나눌 정도라고 단언할 수 있나?”

“……그건.”

“확신할 수 없겠지. 나도 마찬가지야.”

무명은 유성백의 첫인상을 떠올렸다.

“하지만 저놈은 그 노친네에게 다짜고짜 비무를 청했고,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태을검법을 펼쳤네. 그게 후배와 저놈의 차이야.”

“…….”

그 말까지 듣고 나니 백무량도 느끼는 바가 없잖아 있었다.

‘저 사람에 비하면 부족하단 거지.’

기본 혹은 토대.

태청신공과 구천화우검 같은 신공절학 아래에 깔려 있는 것.

무명은 그 지점에서 유성백에게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실제로, 주백천과 대화가 끝났을 때 가장 먼저 찾아온 선배가 바로 유성백이었다.

이에 대해 다른 선배의 반응은…… 침묵이었다.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많은 고수가 그러하듯이.’

정기신이 마땅히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 것처럼.

검해에 기거한 선배들이 유성백에게 먼저 가르침을 양보했고, 유성백이 자신에게 서슴없이 다가왔다는 것을.

백무량은 뒤늦게 깨닫고서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운 감정이 확 와닿았다.

“애가 칭얼거리는 것처럼 보였을까요?”

“뭐, 저놈한테는? 어렸을 때부터 신공절학을 익힌 놈은 근성이 썩었다고 생각했겠지.”

무명은 빙긋 웃으며 백무량의 등을 두드렸다.

“저놈이 완전히 토라지기 전에 가 보게.”

“가르침 감사합니다.”

“뭐, 후배가 저기 있는 학도사랑 대화하는 거…… 감명 깊게 들었네. 영웅담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거 말이야.”

그 말에 백무량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다 들린 겁니까?”

“아마 여기 있는 사람이라면 모두 다?”

무명이 클클거리니 백무량의 한숨이 더더욱 깊어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다 들렸다면 별수 없는 법이거늘.

백무량은 유성백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자연스레 두 손을 모아서 사죄를 취하려고 했다.

하나 유성백의 반응은 남달랐다.

“토라진 적 없네. 자네가 생각을 고치길 기다렸을 뿐이지.”

“……예?”

“저기서 한 대화가 다 들렸단 말이네.”

유성백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음의 준비가 되었다면 다시 시작하도록 하지.”

“…….”

검해에서의 수련이 쉽지 않으리란 것을, 백무량은 가슴 깊이 깨달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