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3)
“안 본 사이에 저놈에게 정이라도 든 것이라면, 버려라. 실망하게 될 일도 없을 테니.”
쇠잔한 목소리였다.
큰 기대를 품었다가 버렸던 경험이 숱하다는 듯.
망검의 어조에는 인간다운 감정이 없었다.
“그놈을 충분히 가르쳤다는 생각이 들면 데리고 와라. 그동안 묵상하겠다.”
“……알겠습니다.”
심천검은 망검에게 가벼운 예를 표했다.
마음은 편치 않았다. 곤륜의 개파조사가 되어서, 검해를 이은 도사를 믿지 아니하고 남에게 방치하는 꼴처럼 보였다.
당장 무명과 유성백만 하더라도 곤륜도가 아니지 않던가?
사교에게 죽은 원념(怨念)이 강하여 검해에 이끌렸을 뿐이다. 그들이 백무량에게 대단한 가르침을 줄 수 있을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심천검은 실망감을 품고서 고개를 홱 돌렸다.
그걸 본 망검이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흐흐.”
광인의 열기 아래에 많은 것이 깔려 있었다.
기억, 혹은 감정, 심천검이 모르는 망검의 무언가.
심천검은 잠시 망검을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다면 지금 꺼내 줬으면 하는 바람이 실린 눈빛이었다.
그러나 망검의 꽉 닫힌 입술은 도무지 열릴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고집 세고 각진 얼굴은 그를 처음 보았던 그때와 다르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그리하지요.”
심천검은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피했다.
그렇게 심천검의 등이 완전히 멀어진 뒤에야, 망검이 눈을 떴다.
“무엇을 가르치면 되려나…….”
“일단은 검이라도 막 휘둘러 보게!”
백무량을 중심으로 모인 다섯 사람.
그것을 보고 있자니 잡념이 들었다.
망검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오래된 세파(世波)에 묻어 둔 것이 자꾸 고개를 들썩이고 있었다.
‘이제는 나만이 남았다.’
그 사실을 속으로 몇 번이고 되새겨 잡념을 죽였다. 심호흡으로 재가 된 감정을 털어 냈다.
그제야 시야가 다르게 보였다.
다섯 나무토막과 하나의 불빛.
아직은 빛의 크기가 희미한 정도에 불과하나, 나무토막에 기름을 먹이고 불꽃을 퍼뜨린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터.
‘내가 그 기름이 되리라.’
망검은 그렇게 마지막 전수를 준비했다.
***
네 무인은 백무량의 검법을 보고 고민에 빠졌다.
“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어야 할지 모르겠다.”
“개성이 강한 무학의 조화를 이루었으나, 어느 한쪽도 두드러지진 않으니…….”
유성백은 백무량의 검법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고, 무명도 그 의견에 크게 다르지 않았다.
동문인 두 도사도 덮어 놓고 두둔하진 않았다.
“곤륜파의 무공만 익힐 순 없었느냐?”
“……개파조사께서는 백무량의 길을 존중했네!”
백노는 아쉬움을, 심천검은 해답 없는 이견을 내놓았다.
백무량이라고 그들을 설득할 순 없었다.
다른 문파의 무학을 또 다른 길로 삼아 검해에 복속시켰으니, 그들이 익힌 무공과는 궤를 달리하는 것이 당연했다.
“으음…….”
“쩝.”
각자 무공의 극의에 도달한 고수임에도 백무량의 무학 체계를 보고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
그 말인즉, 대성할 길을 손을 더듬어 가며 찾는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것을 본 백무량은 껄껄 웃었다.
“하하…… 지금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됩니다.”
“뭐가 말이냐?”
유성백이 외눈을 번뜩였다.
망검 못지않은 신경질적인 목소리였으나, 백무량의 대답은 전과 같이 유쾌했다.
“여기 있는 선배들께서도 난색을 보인다면, 어느 무인이 내 무공을 파훼하겠습니까? 하물며 마도 고수에게 평범한 무학은 통하지도 않을 텐데, 파격으로 상대하는 편이 낫지요!”
“…….”
유성백이 순간 침묵함에 다른 무인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천무검성의 무학은 기본기를 갈고닦은 쾌검(快劍)!
허점이라곤 조금도 없는 데다, 섬광을 가를 정도로 빨랐으나 백련교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과연! 그들에게는 파격이 통하기 마련이지.”
무명이 고개를 크게 끄덕이자, 백무량은 공연히 궁금증이 들었다.
“한데 선배는 내력이 어떻게 됩니까? 저기 있는 천무검성이야 얼추 소문으로 들었다지만…….”
그 말에 무명이 히죽 웃었다.
“보여 주는 게 더 빠르겠지?”
백무량이 무언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촤아악!
검해의 표면이 일제히 갈라졌다. 손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으나 무명의 왼팔은 칼날처럼 허공을 누볐다.
신검합일(身劍合一)의 묘리라!
백무량의 눈동자가 커졌다. 간합을 꿰뚫고 펼쳐진 초식 안에 익숙한 구결이 보였다.
‘……아미복호검!’
일찍이 아미파 장문인에게 허락을 받고 익혔던 무공.
아미복호검의 수경(水經)이 극에 이른 모습이었다.
신검합일에 이어지는 수경의 전형(全形)이 검해 표면을 가르고도 힘을 잃지 않았다.
콰르르르!
대기를 가르는 파공성에 이어 무명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처음에는 깜짝 놀랐네! 내 무학이 지금까지 남아 있을 줄 몰랐고, 그걸 자네가 수습할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무명은 쾌활하게 웃다가, 팔을 백무량에게 휘둘렀다.
“……음!”
헛숨을 내뱉은 백무량은 곧바로 백선신검을 뽑았다.
약간의 놀람은 있었지만, 무명의 의도를 곧바로 이해했다.
‘수경에는 수경으로.’
자기가 남긴 무공을 익혔다는 동질감과 그리움, 혹은 호기심.
그것이 잔뜩 담긴 일 초였다.
백무량은 무명의 웃음에 화답하듯이 검을 휘둘렀다.
꽈광!
원초와 후대의 해석.
뿌리와 뿌리에서 분화한 줄기가 맞부딪쳤다. 검해의 파도가 출렁였으나 두 무인의 신형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무명의 얼굴에 화색이 피었다.
“하늘에 감사한다. 사문마저 잊었을 나의 무공이 실전되지 않았고, 네가 익혔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기껍다.”
그 말에 백무량은 무명을 떨쳐 내며 피식 웃었다.
“그래서 선배의 이름이 무엇이라고?”
자기가 창안한 무공이 아미복호검임을 말하였으니, 슬슬 옛 이름을 밝혀도 되지 않겠냐는 듯.
백무량이 스스럼없이 떠보았으나 무명은 여전했다.
“무명(無名). 그것이면 족하다.”
여자만 받는다는 도문, 아미파.
그곳에서 복호검을 창안한 무명의 내력이 궁금하긴 했지만, 억지로 물을 수도 없었다.
백무량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고는 검해를 박찼다. 촤악, 하는 소리와 함께 물방울이 사방으로 튀었다.
“다음으로 가 볼까?”
그렇게 말하는 무명의 목소리가 쾌활했다.
자기가 창안한 무공, 복호검.
그 무공의 중심을 이루는 수경과 팔첨을 후대가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궁금해 미치겠다는 눈치였다.
백무량은 무명의 기대를 배신하지 않았다.
“기꺼이!”
쿠르르!
엄청난 양의 내력이 물밀듯이 움직였다. 오른 어깨 내부에서 검지까지 이르는 수궐음심포경이 저릿할 정도였다.
그 내력이 백선신검을 감싸며 운검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태청의 신공(神功)이로다!”
무명은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운검을 이룬 백선신검이 한 호흡을 쪼개고 공세로 전환했다.
백무량의 오른손에서 펼쳐진 일 초는 수없이 봐 온 것.
구천화우검의 일초, 균천관일.
하지만 태청신공과 아미복호검의 팔첨이 가미되니 감히 전과 비교할 수 없었다.
천하를 쪼갤 듯 내질러진 균천관일 앞에서도 무명의 신색은 평온했다.
도리어 이런 것을 원했다는 것처럼 앞으로 성큼 걸었다.
“이것이 너의 팔첨이더냐?”
태청신공의 공력으로 이루어진 편검(片劍)이 무명의 여덟 사혈을 노리고, 백선신검이 거궐혈을 노린다.
그 연격은 언뜻 보면 조화를 이룬 듯했다.
무당파의 태극과 공동파의 경파.
서로 다른 무류가 한 무공에 맞물려 있는 무인의 가슴을 떨리게 하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이 완벽했다면 망검이 쉽사리 부술 수 있었겠는가?
무명은 백무량의 균천관일에 있는 틈을 발견했다.
“아직은 부족하군.”
무명의 무명지가 백무량의 팔뚝을 툭 건드렸다.
그것만으로 편검과 운검의 조화가 무너지고, 공력이 삽시간에 흩어졌다.
무명은 그 모습을 보며 자그마한 한숨을 토했다.
“좀 더 완벽했다면, 내가 졌을 것이다.”
“……예?”
“진짜다.”
백무량은 무명이 괜한 겸양을 떤다고 생각하여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무명의 말은 사실이었다.
목숨을 내걸고서 싸운다면 무명은 백무량에게 패배한다.
오래도록 신공을 익혔기에 백무량의 심기체는 원숙을 넘어 완벽에 가까웠고, 깨달음 또한 만만치 않았다.
이번에 손쉽게 이긴 이유는 오직 하나.
무명이 아미복호검을 창안했기 때문에.
백무량의 빈틈을 파고들어, 흐름을 부술 수 있었다.
백련교주나 칠성교주 같은 마도 고수라면 그 빈틈을 자연스럽게 부술 터였다.
“마공은 일반적인 것과는 다르다. 무인이 점과 선의 형태로 무공을 펼친다면, 마인은 면(面)이다. 굳이 의식하지 않더라도 사기(邪氣‘)가 빈틈을 침범할 거야.”
“그것을 막으려면…….”
“나한테 아미복호검을 배우는 것이야 당연한 거고, 네가 지금까지 익힌 다른 무학도 완벽하게 익혀야 할 것이다.”
무명의 말에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곳에서 어찌 공동파나 화산파의 무학을 대성할 수 있겠는가?
차라리 이곳에서 나가서, 그 문파로 찾아가는 것이 빠르지 않을까?
여러 고민을 하는 도중에 비무를 지켜보던 백노가 입을 열었다.
“그거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백무량의 말에 백노가 자연스레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 하물며, 네 사형도 너를 도울 것이다.”
백무량은 놀랐다는 눈으로 주백천을 보았다.
자신이 아는 주백천이라면 곤륜파의 도학 말고는 몰랐으니까.
하물며 주백천이 남긴 회고록에도 좌도방을 익혔다고 하지 않았던가?
강한 의구심을 담고서 바라보자 주백천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곳에서 가만히 있었겠느냐? 검해에 기거하시던 고인분들과 교분을 나누곤 했지.”
“하, 하하…….”
그 말에 백무량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영웅담의 주인공.
그 자리를 마련해 준 건 사실상 사형이었으니까.
“이 은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하나 더.
백무량은 잠시 주저하다가 심지가 굳은 눈빛으로 주백천을 바라보았다.
“사형이나 사질은 현세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겁니까?”
그 말에 주백천이 백무량에게서 등을 돌렸다.
주백천의 어깨가 자그맣게 떨리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