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르침 (2)
검객의 발검.
그것은 육체로 행하는 예술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듯, 무인은 검을 휘두르기 위하여 하단전에서 공력을 그러모아 소부혈까지 운반한다.
불완전한 이류는 젓가락질 한 번의 시간.
정기신의 균형을 이룬 일류는 의지를 떠올린 것만으로 행한다.
하면 성강을 이룬 고수는?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자는 또 어떠하겠는가?
카가가강!
“……!”
백무량의 몸이 뒤로 밀렸다. 뒤늦게 불똥이 튕기고, 손목이 욱신거렸다.
반사적으로 쳐 내지 않았다면, 이 충격은 고스란히 상반신을 두부 베듯 갈랐으리라.
그 생각에 백무량은 입술을 씰룩였다. 약간의 호승심과 적의, 황당함이 뒤섞인 시선으로 망검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이격(二擊)째.”
망검의 거침없는 목소리.
문답은 필요 없지 않냐는 시선이 백무량을 관통했다.
그 시선과 마주한 백무량은 반사적으로 공력을 운용했다.
해상육화(海上六花).
검해 위, 여섯 개의 연꽃이 각자 모를 이루어 눈송이의 결정처럼 모였다.
그렇게 모인 깨달음들이 백무량의 의념에 따라 뒤섞이니.
쿠콰콰!
망검이 말한 대로, 이격째.
백무량의 발검이 망검의 검을 막았다.
위태로운 형세가 마치 오궁도화를 보는 듯하였으나, 백무량의 표정에는 여유가 있었다.
‘이까짓……!’
힘이 밀리는 곤궁함쯤은 몇 번이고 마주하여 극복하지 않았던가!
망검의 검 또한 잠깐의 우세에서 그치리라 여겼다.
오랜 경험과 수없이 단련된 육감에서 비롯된 확신이었으나.
망검의 칼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무르고, 무디다!”
망검의 고함에는 끝없는 분노와 울분이 있었다.
백무량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과거 심천검의 과거사가 그렇듯, 망검 또한 자신이 실패한 옛 기억을 검에 투영하고 있었다.
‘왜 나한테.’
지랄을 하는 것일까.
백무량은 인상을 가볍게 찌푸렸다.
자기가 이루지 못한 멸마척사의 뜻, 대의, 혹은 과거의 사문.
그거야 백무량도 이해할 수 있었다.
백련교의 난에서 죽고, 칠십여 년 뒤에 되살아나 사형을 찾아 헤맸으니까.
‘하지만 이건…….’
무공의 부족함을 꾸짖고 알려 주는 것이 아니라, 화풀이에 가깝지 않나?
불만을 품은 백무량이 정신을 정돈했다.
망검은 사문의 선배가 아니라, 단순한 취객.
그렇게 여기니 마음이 편해졌다. 검을 휘두르는 마음에 짜증이 뒤섞였으나, 주저함이 사라졌다.
“……후우.”
백무량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망검과 검을 뒤섞었다.
처음에는 가공할 만한 검력에 휘둘렸으나 어떠한 흐름이 있다는 것을 깨닫고 나서는 밀리지 않았다.
도리어 그 앞을 예지하기 시작한다.
‘과거에 배운 것, 새로이 배운 것, 그렇게 쌓은 기둥.’
백무량의 심상 속, 과거에 배운 곤륜파의 무학은 견고하게 쌓은 석주(石柱)였다.
포탄을 터트리지 않는 한 무너지지 않는다는 믿음으로 강호를 주유했다.
그것만으로 백무량은 구천검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백련교주는 상식을 부수는 괴력난신이요, 칠성교주 또한 그에 뒤지지 않는 괴물이니.’
포탄 수준이 아니라 기둥을 우수수 무너뜨리는 거인이나 다를 바 없다.
따라서, 기둥을 새로 세우기 위해…… 배운다.
곤륜의 무학만이 최고라는 마음을 버리고, 공동파와 화산파에서 우월한 개성을 훔쳐서 구천화우검에 적용한다.
그리하여 검해에 이질적인 연꽃을 둥둥 띄우게 되었다.
‘그것들을 억지로 뒤섞는 게 아니라, 조화를 이룬다면.’
백무량은 망검과 검을 부딪치며 걸음을 내디뎠다.
그것이 첫걸음이었다.
망검을 상대로, 처음으로 물러나지 않았을 때.
“……!”
망검의 표정이 찌푸려졌다.
건방진 후배를 꺾겠다는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 것 같아서 백무량은 히죽 웃었다.
“쉽게는 이길 수 없소.”
한마디를 툭 내뱉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망검의 공세가 전보다 두세 배는 빨라졌다.
지금까지 봐줬다는 것처럼.
“……허.”
백무량의 몸이 뒤로 미끄러졌다. 검해 위가 아니었다면 엉망진창으로 넘어졌을 충격이었다.
그러나 단념하지는 않았다.
격차는 있되, 지금까지 배운 것을 엮어서 대처할 수 있었다.
‘다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을 생각이라면…….’
고민을 거듭하던 백무량은 저도 모르게 심천검을 곁눈질했다.
상단전에서의 조언은 언제나 큰 도움이 되었고, 심적으로 의지가 되었으니까.
그 시선을 받아 든 심천검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전음을 보내 봐야, 어차피 네가 잘할 것이라며.
심천검이 보낸 신뢰에 백무량은 피식 웃으며 공력을 그러모았다.
성강 이상의 경지를 이룬 검객의 발검, 찰나의 순간.
그것을 두어 번 쪼갠 시간 동안 많은 것을 떠올렸다.
‘경파는 눈으로 훔쳤으나, 화검은 운 좋게도 허락을 받아서 배울 수 있었지…….’
백무량이 기둥을 새로 쌓는 동안 걸어온 행적.
사건과 사람, 도움과 고통.
칠 년의 시간은 참으로 우스웠다.
강호의 왈패였던 자신이 어엿한 영웅으로 불리는 꼴이라니.
백무량은 끅끅 웃으며 망검의 검을 걷어 내고는 안쪽으로 깊게 파고들었다.
망검의 숨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올 정도의 거리에서 태청신공을 전력으로 운용했다.
콰아아…….
청량한 기운이 전신세맥을 꿰뚫는 감각에 이어 여섯 연꽃이 검해의 표면에서 휘몰아쳤다.
“헛.”
망검의 숨이 처음으로 흐트러졌다.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자연스레 움켜쥐었다.
그러자 머릿속에서 무엇인가가 만개했다.
이에 백무량의 비무를 지켜보던 다른 도사들이 고개를 돌렸다.
“……!”
“허어! 이럴 수가! 어찌 검해에!”
검해의 표면에 둥둥 떠다니기만 하던 연꽃이 한 꺼풀씩 열리기 시작하니.
다른 문파의 무학들이 점차 검해와 조화를 이뤄 간다는 징조이리라.
백노와 심천검이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으나, 백무량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깨달은 것이다.
‘이미 개화했으나,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백무량 자신이 육화(六花)의 무게를 감당할 때까지, 천의의 무게를 짊어지고도 나아갈 의지를 갖출 때까지.
그것을 깨달으니 여섯 연꽃이 수레바퀴처럼 휘돌았다.
검해의 파도를 빨아들이며 조화를 이루는 움직임이라!
콰르르……!
치솟은 파도가 백선신검의 칼날 끄트머리에 매달리자, 백무량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한번 받아 보시오.”
이번 검격은 망검일지라도 쉽게 받아 내지 못하리라.
혹여나 다칠까 싶은 걱정이 불쑥 치솟았으나, 망검의 얼굴엔 여전히 분노가 가득했다.
“누굴 걱정하느냐!”
망검의 칼날에서 한 줄기 한기가 피어오른 순간.
꽈과과광!
엄청난 굉음이 검해를 뒤덮었다.
***
“성지란 마물, 사교들과 싸웠던 도사들이 천명제를 통해 남긴 영지(靈地)이니, 그들의 유지를 이은 문파에만 존재했던 게야.”
주백천의 말에 백무량은 허망한 표정으로 하늘을 보았다.
“하면 청성파의 사대사행은…….”
“먼 과거에 마물과 싸웠던 선배가 남긴 것이지.”
“망검은…….”
“어찌 개파조사를 그리 가벼이 말하느냐?”
“…….”
주백천의 꾸지람에도 백무량은 입술을 삐죽이고 말았다.
분명히 최선을 다했을 일격.
염화를 죽일 때보다 더욱 원숙하게 펼쳤으나, 망검은 아무렇지 않게 막아 버렸다.
그러고서 한다는 말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허, 절대자처럼 말하더니만 그저 잡스럽기만 할 뿐이라니!
분명히 조화를 이뤘다고 생각했건만, 망검의 눈에는 잡동사니처럼 보였던 걸까?
백무량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갑자기 자신감이 뚝 떨어집니다.”
“뭐가 말이냐?”
“저는 분명 최선의 답을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쉽게 꺾일 줄은…….”
“그러기 위해서 개파조사께서 침묵을 풀지 않았겠느냐?”
뜻밖의 말에 백무량이 눈을 끔뻑거렸다.
“예?”
“내 듣기로, 지금까지 개파조사께서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고 한다. 심천검이나 백노께서 검해를 이었을 때도 말이다.”
“……그러면 저한테는 왜 그랬을까요?”
“나라고 그 뜻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느냐? 다만, 너에게서 가능성을 보지 않았겠느냐?”
주백천이 부드러운 미소를 보이고는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서는 백무량의 절초를 부순 망검이 선배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망검의 표정은 여전히 못마땅해 보였으나, 심천검이 보기에는 경이(驚異)처럼 보였다.
당장 심천검이 검해를 잇고 나서 이곳으로 왔을 때 망검의 표정이 어땠던가?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때와는 다르게, 백무량에게는 다짜고짜 검을 휘둘렀으니까.’
관심이 없으면 그렇게까지 행동하지 않는다.
심천검은 약간의 호기심을 담아 망검에게 물었다.
“거, 조사께서 보시기에 어떻습니까?”
“뭐가 말이냐?”
“저 후배라면…….”
“불가능한 소리를!”
망검의 눈동자에 아집이 한가득 깃든 귀화가 피었다.
“끝내 사교가 마물을 부활시키려는데, 싹수가 보이는 놈이라고는 저거 하나다! 다른 도문은 대체 무얼 하는 건지…… 쯧!”
‘싹수가 보인다고.’
겉으로는 못 써먹을 놈이라며 욕하지만, 속으론 가능성을 점치고 있지 않나?
게다가…… 다른 도문을 논하다니.
심천검은 조심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원래는 다른 도문이 도와야 했단 말입니까?”
“그것이 원래 약속이었으니까. 시간이 너무 오래 흘러, 집착에 미친 놈 말고는 모두가 잊었을 뿐이지.”
망검의 목소리가 잠시 낮아졌다. 잠깐이었지만 슬픔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물론 그것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저놈의 사형 덕분에 가르칠 기회가 생겼으니…… 마침 잘되었다! 부족한 후배를 이끄는 것이야말로 선배가 할 일이지!”
“그, 그렇지요.”
“한데 네놈은 후배가 곤륜의 무학에서 벗어나는 걸 두고 보았단 말이냐?”
“예.”
“대체 왜? 나한테 깨질 정도라면…….”
“어차피 실패하지 않았습니까?”
그 말에 망검이 주먹을 꽉 쥐었다.
가까스로 분노를 참고 있는 듯했으나, 심천검의 의견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다른 도문이 돕지 못한다면, 저기 있는 후배에게 도움이라도 되는 것이 나을 겁니다. 잘된 일 아닙니까, 개파조사께선 다른 도문과도 깊은 교분을 쌓았을 테니까요.”
“허, 그걸 저놈에게 가르쳐라?”
“그만한 무재가 있음을 함께하면서 보았습니다.”
심천검이 강하게 단언하자 망검의 시선이 백무량에게 향했다.
“저런 아이에게…… 다른 사문의 짐까지 얹자?”
자기 사형과 즐겁게 대화하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이 보였다.
처음에는 백무량이 마뜩잖았으나 가벼운 마음으로 여기까지 오지 않았음을 비무에서 깨달았다.
“…….”
망검은 잠깐 동안 백무량에게서 다른 사람을 보았지만, 고개를 내저어서 부정했다.
그것 때문에 집념을 버린다면 검해마저도 다른 성지처럼 본의(本意)를 잃어버릴 테니까.
망검의 입술이 가늘게 열렸다.
“저놈,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 있는 것이냐?”
아무리 분심조화결을 극성까지 익혔다고 한들, 검해의 바다에 휩쓸릴 가능성이 없지 않다.
따라서 백무량의 정신력이 가장 중요한데…….
심천검이 강한 확신을 담아서 말했다.
“무량이라면 모든 것을 얻고서 나갈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