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승 (1)
태극의 이치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나 운용함으로써 느껴지는 것이 있기 마련이다.
‘내가 무당의 공부를 알았다면 더욱더 깊은 이치로 나아갔겠지만.’
그만한 공부를 거치지 않았으니 형(形)을 보는 것이 고작.
그러나 그것만으로 태극의 묘리를 부수었다.
백무량은 그 사실이 몹시 기껍기도 했지만, 무극진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없잖아 있었다.
그 마음을 읽은 심천검이 욱하여 말했다.
[별다른 공부 없이 형태만으로 사문의 무학을 홀랑 뺏어 가다니, 허, 날도둑도 너보다는 양심이 있겠다!]
심천검은 허탈해하는 무극진인에게 깊이 공감하고 있었다.
보타암을 비롯하여 여러 차례, 심천검과의 비무가 곧 백무량에게 자양분이 되었으니까.
그걸 지켜보는 처지에서는.
[수십 년 동안 집념과 독기를 품고서 수련한 결과물을 쉽사리 흡수하는 걸 보면 얼마나 허탈해지는 줄 아느냐?]
‘……하하.’
칭찬처럼 들리기도 해서, 백무량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러나 내심 조심스러워지는 부분이 있었다.
확실히, 백무량은 지금까지 많은 무학을 배웠다. 배우는 속도나 활용하는 능력 또한 다른 이보다 뛰어나다고 자부한다.
하지만 그것으로 곤륜의 무학과 제대로 뒤섞였다고 볼 수 있을까?
그 격정에 백무량은 경도되었다.
본능적이었으나 최근 싸움에서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결국 필요에 따라 조금씩 끌어다가 쓰는 게 전부라면, 앞으로 다툴 교주들에게 우위를 점할 수 없다.’
다른 문파에서 배운 무학은 곤륜과 비교해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다만 이번에 배운 태극처럼, 공부가 부족한 백무량은 형태를 따라 할 뿐 심원(深原)으로 다다르지는 못하니.
‘공부가 부족하다면 궁리(窮理). 그것이 내 방식이다.’
백무량이 내놓은 답에 심천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마치 정답을 내놓은 후배를 칭찬하는 것 같아, 백무량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무극진인, 잠시 양해를 구하겠소.”
무극진인에게 몇 마디를 흘린 백무량은 눈을 감았다.
심상 속, 검해의 파도.
그 바다에 곤륜의 무공과 무학이 있었다.
심천검이 가르치고 보여 준 무리(武理), 사부인 주자령이 쌓아 준 무공의 기초.
그 위에 여섯 연꽃이 띄워져 있었다.
경파, 화검, 금강, 수경과 팔첨, 이번에 익힌 태극까지…….
모든 연꽃, 무학 들을 되짚은 백무량이 눈을 떴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내쉬며 순서를 생각했다.
“처음은 역시.”
태청신공이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백무량의 기둥이요, 무학이라는 토대를 쌓은 시작.
그렇기에 백무량은 지극한 마음으로 기수식을 취했다.
정(静)에서 동(動).
단전에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던 진기가 전신을 완만하게 휘돌았다.
절대 급하지 않게, 서두르는 일 없이, 구름처럼…….
심상으로는 곤륜산 정상에 있던 운해를 그렸다.
백무량이 생각하는 곤륜파 무공의 근본이었으며, 천하를 굽어보는 형세.
콰르르……!
태청신공의 진기가 십이정경에서 잔잔한 파도처럼 밀려 나오더니 청운으로 유형화했다.
무극진인의 표정에 감탄이 일었다.
“이 무슨…….”
진정 인간이 품을 수 있는 순청함이란 말인가?
무극진인이 감탄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백무량의 내공은 평범하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태청신단.
곤륜파의 보물로써 일천세맥을 깨끗하게 씻어 내었으며.
지금까지 출입한 여러 성지에서 영기를 얻어 냈다.
그 영기가 정종인 태청신공의 진기에 맑은 기운을 더했다.
마교와 대적하기 위한 천의(天意)가 눈앞에 있음인가.
무극진인은 청운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압도되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백무량의 신위는 여기에서 끝이 아니었다.
“하나, 하나씩…….”
검해의 수면에 띄워진 여섯 연꽃.
그것들은 둥둥 떠다닐 뿐 개화하지는 못했다. 배우기만 하였을 뿐, 제대로 합일하지 못했다는 방증.
백무량은 백선신검을 쥐었다. 그와 동시에 운룡의 문양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여기에서 분심(分心)하여.’
청운을 운용하는 지극한 마음과 다른 문파의 무학을 떠올리는 궁리를 분리한다.
심천검이라면 후자를 불순함으로 칭할 것이다.
사실은 옳은 말이었다. 곤륜의 무학만을 익힘으로써 얻는 순수함 또한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무림 사상 최악이라 불리는 두 마도 고수.
이전에 맞붙었던 염화가 완성되어 있는 상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흉악한 악적과 맞서 싸우기 위해서라면 그와 대등한 격을 갖추어야 했다.
그것이 설령 순수함을 해치는 길일지라도.
백무량이 칼을 휘둘렀다.
허공을 베었으되, 청운이 나아갈 길을 열었다.
콰르르!
고요하던 청운에 강렬한 파도가 일었다.
무극진인의 눈꺼풀이 크게 뜨였다.
“공동파의 경파……!”
파도에 의해 세차게 분 바람이 나뭇가지를 뒤흔들었다.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음에도 수많은 나뭇잎이 후두둑 떨어져 나갔다.
무극진인과 차기 장문인이 무학의 깊이에 감탄하는 가운데, 백무량은 다른 것을 보고 있었다.
‘열리지 않는가.’
검해 위에 띄워진 연꽃들.
경파를 청운에 실었음에도 그것들은 미동 하나 없었다.
그러나 백무량은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문파의 형식을 빌려 온 것이었다.
단 한 번으로 검해에 뒤섞인다면 그것이 어떻게 구파일방의 무학이겠는가?
다만 백선신검을 다잡는 손에 신중함을 기했다.
백무량의 손목이 기괴망측하게 뒤틀렸다.
“화검인가!”
무극진인의 눈이 즐거워졌다.
하나둘씩 떼어져 나간 청운의 조각이 떨어지는 나뭇잎들을 잘라 낸 것이다.
그때까지도 백무량은 자신의 무공이 만들어 낸 광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말없이, 청운을 일으킨 채 검무를 추었다.
여섯 연꽃, 여섯 개의 무학.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며 뒤섞었다.
경파에 흩날리는 화검이 있었고, 태극 안에서 보타문의 금강이 모습을 드러내기도 했다.
백무량이 무의식중에 빚어내는 분심의 조화.
태극의 굴공에 달빛이 굽어지고 침엽수가 위로 치솟는다.
운용에 자유로움이 있되, 천하거나 흔하지 않았다. 방금 익힌 것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격이 높았다.
“……허.”
그것을 본 무극진인은 허탈함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한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에게 태극의 묘리를 보여 준 것이 헛되지 않았구나.”
평생 무당파의 공부를 했고, 무공을 익혔다. 내심 대성하였다고 자부했으며 강호의 호사가가 그렇게 말해 주었다.
하지만 백무량이 자아내는 이 광경, 달빛 아래의 검무는 어떠한가?
무당파의 어떤 이도 이렇게 파격적으로 펼치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무려, 다른 구파일방의 무학을 뒤섞은 태극이니까.
“옥허야, 보고 있느냐?”
무극진인의 말에 차기 장문인인 옥허진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네가 보기에 어떠하냐?”
“태극의 공부가 부족하여 이화접목을 제대로 끌어내지 못하고, 힘을 한쪽으로 밀어 내는 것처럼 보입니다. 일견 무식하게까지 보일 정도지요.”
이어 ‘그러나…….’라고 중얼거린 옥허진인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무당파가 아니기에 펼칠 수 있는 파격이 눈앞에 있으니…… 보기에 즐거운 광경이 아닙니까?”
백무량이 익힌 것은 도가만이 아니라 불가까지 있었다.
평범한 재능과 육체였다면 진즉 몸이 상하거나 반신불수가 되고도 남는다.
서로 맞지 않은 무공을 익혔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검해.
곤륜파의 성지이자 심상, 천의(天意)가 내려 준 은혜가 그것을 가능케 했다.
주백천의 안배 또한 백무량을 채찍질했다.
주백천이야말로 칠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나태하게 살았던 구천검을 영웅으로 살게 만든 주역이었다.
그 잠재력은 태극을 통하여 진면목을 드러내니.
‘개화한다.’
한 꺼풀씩, 느리지만 조금씩.
검해의 파도에 여러 차례 휩쓸린 여섯 연꽃이 조금씩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제야 백무량은 깨달았다.
곤륜을 포함하여 일곱 개의 무학.
서로 다른 뿌리를 가지고 있는 것 같아도, 이 무학이 탄생한 목표는 같았음을.
그것을 알아차리니 검해의 표면에 무언가가 떠올랐다.
‘멸마척사(滅魔斥邪)!’
마귀를 숭앙하던 사특한 자들이 있었다.
천마신교, 성화교, 백련교, 칠성교…….
그들이 바로 사특한 자의 진전을 일부 이어받은 사교(邪敎)였다.
그러다 백무량의 표정이 찡그러졌다.
-끄아악!
-말도 안 된다! 어찌 저런 것이 인세에……!
옛 도사와 승려, 무인.
심지어는 눈이 파란 남자까지 검을 들고서 한 존재와 맞서고 있었다.
고대에 존재했던 진정한 마물.
형체조차 불분명한 놈이었으나 백무량의 내심에 큰 동요가 퍼졌다.
지금까지 어떠한 고수에게서도 느끼지 못했던 잡념과 망념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놈들이 말하던 대업!’
설마 마교가 목표하던 것이 저게 아니었을까?
불안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저런 것이 되살아난다면 지금 검해가 보여 주듯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갈 터였다.
백무량의 숨이 삽시간에 가빠졌다.
“허억, 허.”
곤륜파의 무공을 익힌 이래로 이만큼 동요한 적이 있었던가?
과거, 등정로에서 현종휘를 나무랐던 때보다 숨이 훨씬 다급했다.
백무량을 지켜보던 무극진인이 이상을 알아차릴 정도였다.
“설마 주화입마인가?”
그 말에 옥허진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태극의 묘리를 배운 도사, 그것도 천의를 이은 백무량을 이대로 죽게 둘 순 없었다.
바로 그때.
“드디어 천의가 도사에게 닿았으니, 전령(傳令)은 퇴장할 때가 되었구나.”
주연호가 아쉽고 슬픈, 복잡한 표정으로 백무량에게 다가갔다.
무극진인은 직감했다.
“……작별인가?”
“그건 우리가 따로 했었지, 아마?”
주연호가 방긋 웃었다. 오랫동안 보아 온 친우에 대한 예였고, 작별의 웃음이었다.
뒤이어 백무량에게 다가가 하나를 꺼냈다.
종이가 누렇게 바래, 옛날에 쓰인 듯한 부적 하나.
백무량이 보았다면 매우 놀랐을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백무량이 제일 그리워하던 도사의 필체였으니까.
주백천.
그가 손수 준비한 수호부가 백무량에게 닿자마자 재가 되어 스르르 흩날렸다.
***
“으음…….”
완전히 새벽이 된 시각.
백무량은 상반신을 일으켰다.
검해에서 마교의 비밀과 마물의 형체를 본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정신력으로 버틸 수 없는 존재.
그런 것을 상대로 무공을 펼칠 수나 있을까?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광경이었다.
그것을 기억에서 억지로 지운 백무량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인가?
백무량이 고개를 돌리기가 무섭게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일어났습니까?”
낡은 낚싯대를 든 노도사, 그 뒤에 배경처럼 위치한 암자.
노도사가 죽립을 쓰고 있다지만 백무량의 눈에는 노도사의 화상이 그대로 보였다.
“누구시오?”
“……흐.”
노도사가 한숨 소리를 흘렸다. 한데 표정이 몹시 복잡하여 감정을 쉽사리 알 수가 없었다.
그 모습을 본 백무량은 끅끅 웃다가, 종래엔 포복절도하듯이 크게 웃어 댔다.
“내가 어찌 너를 못 알아보겠느냐?”
“……예?”
“이놈! 사숙을 놀리려고 들어? 옛날엔 어리숙하고 사람이 순하여 좋게 봤더니만, 나이가 들었다고!”
백무량의 말에 노도사, 주연호가 울 듯 웃을 듯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